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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유일한 박사의 생애앞에 부끄럽지 부끄럽지 않을 자신있나?
철수야~철수야! 니가 대체 뭐꼬??[2]
 
김기백 특별칼럼 기사입력 :  2012/08/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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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안철수 뒷조사를 했다고, 안철수와 금태섭이 충격을 받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게 아니고?

참 어처구니 없게도 엊그제 부터, 안철수가 과거에 룸싸롱을 다녔느니 안다녔느니 술을 마셨느니 마실줄 모른다느니 하는 황당한 문제로 온나라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히고 있다.


안철수쪽 말마따나, 꺼리 조차되지않는 문제의 발단이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문제로 까지 비화되고 있는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온세상이 다 알고 있는터라 전반부는 생략하더라도 참 기가 차는것은, 안철수가 기자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실은 나도 옛날에는 유흥주점에 더러 간적도 있고 술도 꽤 잘했지만 1998년이후에는 술을 끊었고, 그뒤에도 사업상 몇번 술자리에 동석은 했지만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고하면서 "따라서 나는 여자가 동석하는 술집에 간적이 없다"고 말한 사실이 없는데, 거짓말 장이로 매도 하는건 부당하다"고 해명성 항의를 하고 나서부터 문제가 전혀 다른각도로 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바로 그직후에 어떤 사정당국자라는 녀석이 뉴시스라는 매체의 기자에게 말하기를 "실은 경찰이 작년초에 안철수의 뒷조사를 했고, 그과정에서 안철수가 다녔다는 룸싸롱의 속칭 새끼마담이 안철수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 캐봤더니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보고한적이 있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안철수가 룸싸롱에 다녀놓고 안다녔다고 거짓말을 했느냐 아니냐에서 이명박 정권이 그토록 큰 홍역을 치른 '민간인 사찰행위'를 안철수 한테도 적용했다느니 그게 아니라느니 하는 문제로 변질되고 있는데다가 더 기가 차는것은 안철수쪽의 실질적 법률대리인이자 대변인격인 금태섭이라는 변호사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상황이고 , 인터넷과 트윗이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이나고 벌집을 쑤쎠논듯 난리가 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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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안철수 뒷조사를 했다고, 안철수와 금태섭이 충격을 받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게 아니고?

내가 참 웬만해서는 이런말까지는 안하는 사람이지만, 안철수와 그 주변 핵심똘마니들이 놀고들 계시는 꼬라지가 하도 가소롭다 못해 이만 저만 웃기지도 않아서, 안철수와 금태섭에게 한번 물어보거니와 , 뭐라?경찰이 안철수 뒷조사 한것이 너무 충격적이라고?"놀고들 계시는건 니들 맘대로지만 제발좀 더는 웃기지 않을수 없냐?"

뭔소리냐고?

"니들이나 우리나 어디 세상 하루이틀 살아본 서너살 짜리 젖먹이가 아니잖아?!"


단언 하거니와 안철수와 금태섭을 비롯한 그 핵심똘마니 니들은 시방 회심의 미소정도가 아니라 ,입이 귀에 걸려있을만큼 쾌재를 부르며 함박웃음을 참기가 어려운데도 ,표정관리 하느라 무지 애를 쓰고 있다는 거지!
 
 왜냐고? 선수들끼리는 굳이 설명하고 자시고 할것도 없지만, 이글을 읽는 순진한 젊은남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마디만 더 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안철수가 얼마나 깨끗하고 털게 없으면 ,무슨 룸싸롱이 다녔느니 아니네,술을 마셨느니 마니,하는 따위를 약점이랍시고 캐고 있는놈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웃기는 나쁜놈들이냐!"는 단순소박한 안빠들이 부지기 수로 많은터에, 닭대가리만도 못한 짭새들이 거룩하신 안철수 원장님 뒷조사까지 했다는게 만천하에 들통(?)나버렸으니, 안철수와금태섭 니들한테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있겠는가?!
 

게다가 더 경사스러운것은, 이번 룸싸롱 해프닝이 결국 민간인사찰문제로까지 비화되어버렸으니 앞으로는 진짜 웬만한 거짓말이나 위선적 행적이 드러나도 ,거룩하신 안철수원장 각하님은 굳이 나설것도 없이, 수많은 안빠광신도들이 곧바로=자동적으로 예의 짭새들을 비롯한 정권의 사찰과모략음해로 몰아부쳐버리고 덮어드릴 수 있게 됐으니, 니들한테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거 아니고 뭐겠노?!

문제의 진짜 본질과 핵심 요체는 안철수가 룸싸롱에 다녔느냐 아니냐 하는 따위가 아니라, 안철수의 신비주의와 안개작전이 오죽했으면 낼모래가 대선인 시점에서 고작 그런같잖은 문제따위가 온나라를 들썩 거리게 만드는 국민적 이슈가 되겠느냐는것!



안철수에게 묻는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를 아는가? 모르는가?


안철순지 뭔지하는 희대의 어릿광대의 출현으로 ,내가 참 기가차기 시작한 것이 이미 한두번도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이글을 쓰기 바로 하루전에 ,평소에 좀 알고 지내는 멀쩡한 , 올해만 가면 나이 우리나이로 사십이나 되는 녀석한테 (그녀석도 대학나와 처자까지 있고 인터넷과트윗을 늘 하는녀석이다)마침 뭘 좀 물어볼게 있어서 전화로 "자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알지?"라고 했더니 천만뜻밖에도 그녀석이 반문 하기를 "유한양행 설립자는 문국현씨 아닙니까?"라고 하기에 당혹한 정도가 아니라, 맥이 탁풀려서 도저히 뭐라고 할말도 없고, 설명해줄 방법도 없어서 "알았다" 고 하고 전화를 끊을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백낙청씨 정도되는 야권전체의 최고 원로가 안철수를 직접 만나고도,대선출마선언의지와 시기를 확약 받지도 확인 하지도 못했다는 것은,안철수가 아직도 안개낀 장충단 공원을 해메고 있다는것!




더 기가 찬것은 , 예의 안철수 룸싸롱 파문이 확대되자 황공무지하옵게도 안철수원장 각하님께서 직접기자들에게 메일을 보내 해명하시기 직전에, 백낙청씨를 비롯한 이른바 재야 원로들이 애간장을 태우다 못해, 다시한번 무슨'원탁회의'(?)를 긴급소집해서 "안철수는 빨리 대선판에 나와서 판을 키워야 된다"고 재촉하면서 "안철수가 이제와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 큰일"이라고  실토 했다는 것이다.
 
그보도에 이이서 곧바로  ,실은 "백낙청씨와 안철수가 얼마전에 만났다"는 사실을 안철수쪽에서도 시인했다는 보도와 함께,금태섭과 안철수 쪽에서 말하기를 "당연히 경청할것이나 국민들이 너무 늦다고 해도 안되지만 준비가 안되도 못하는것" 이라면서"아직도 안철수 현상과 안철수에 대한 지지가 일치 하는 것인지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다"면서 결국 "국민여론(?) 수렴(?)이 끝나야 대선출마 선언을 할것"이라고 했다는 보도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황직후에 '경찰의 안철수 뒷조사' 파문까지 터지고 있는 상황인것이다.




그같은 일련의 연속보도와 상황전개는  무엇을 의미 하고 있겠는가?


간단히 말해서,안철수는 지금도 '안개낀 장충단공원'을 밑도끝도 없이 뱅뱅돌고 있는 상태에서 참으로 절묘하게도,당초에는 별것도 아닌 해프닝으로 끝날뻔 했던 '안철수 룸싸롱 소동'이 상당한 악재로 변질되는가 했더니 , 호재중에 호재로 급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희한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중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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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한번 분명히 지적해두거니와 '안철수 룸싸롱 소동'의 본질은 "안철수가 얼마나 흠잡을게 없는 사람이면 정말 치사하게 꺼리도 안되는 고작 그딴것을 약점이랍시고 물고 늘어지느냐?"가 아니라 "안철수라는 희한한 물건이 얼마나 안개를 피우고 거룩한척 하면서  실체=생얼을 얼마나 숨겨왔고, 국가 최고지도자감으로써의 컨텐츠=알맹이를 제대로 제시한것이 얼마나 없으면, 고작 룸싸롱에 간적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따위가 한창진행중인 명색이 제1야당의 대선경선보다 더큰 이슈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것이다.


또하나, 지금상황에서 거의 확신에 가까운 단정을 할수 있는것은 하필 이시점에서 "실은 경찰이 작년초에 이미 안철수의 뒷조사를 해봤더니 소문만 무성할뿐 아무것도 하자가 없고 깨끗하더라"고 떠벌인 무슨 사정당국자라는 작자는 안그래도 숨만쉬고 있는 이명박 정권내부의 자발적 '안철수 빠돌이'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1초만 생각해보라!
지난 4년여동안 안그래도 만신창이가 된데다가 그놈의 '민간인사찰 '때문에 정권이 얼마나 큰 홍역을 치루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무슨 '고위 사정당국자'라는 작자가 문자그대로 미친놈이거나 닭대가리가 아니고서야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극비(?)사항을 왜 떠벌이겠는가?!
 
 
안철수아니라 안철수의 고조 할배라도, 대통령되고 싶으면 다른무엇보다 민족통일에 대해서 말하라 !

'안철수의 생각'인지 뭔지 하는 어줍잖은 짜집기 대화록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성향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분명한것은 '대학교 1학년수준'이라는 정도의 최악의 혹평은 제외하고라도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뭔가 중요한 알맹이가 빠졌다" 거나 "그나마 실현가능한지가 의문스러운 원론적인 얘기 뿐이다" 혹은 "앞뒤가 안맞고 어슬픈 짜집기 수준이다"라는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고,특히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서 적당수준에서(?) 좌우 양쪽 비위를 다 맞추려다 보니, 좌우양쪽으로부터 맹비난과 혹평을 동시에 당하고 있을만큼, 전형적인 양다리걸치기 전술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난 상태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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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임을 숨기거나 통찰할줄 모르는자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오빤 강남스타일"하나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싸이처럼, 인기절정의  예능적 대통령을 뽑아도 되는 시대가 아니라,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志士的대통령이 필요한 시점!


이시점의 대한민국에서 북한과 국방, 세계관이 없는자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장관.국회의원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할줄 알아야!



그가 누구이든, 안철수아니라 안철수의 고조할배라 할지라도 특히 지금 이시대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자는 왜 반드시 다른무엇보다 민족통일에 대한 설계도와 시물레이션을 확실하고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측면에서 누누이 반복.강조해왔으므로 , 오늘의 이글에서는 가장 최근에 외신에서 소위 '안철수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해 기사 그대로를 요약 ,전재코자 한다.

‘안철수의 생각’ : 북한과 국방, 세계관은 없어: WSJ

월 스트릿 저널은 책 ‘안철수의 생각’은 국내경제문제에 대한 의견이 많은데 이슈는 아래와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1. 감원, 임시직 근로자, 젊은이의 실업률
2. 가정의 빚
3. 대학입학경쟁과 학원, 학교폭력 등의 교육 이슈
4. 일본핵 사고에서 배운 교훈
5. 한국농부의 생존
6. 강정마을과 서울 용산에서 경찰과의 대피
7. 언론파업과 표현의 자유
8. 여성, 장애인, 다문화 사회

북한의 변화는 한국, 미국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비단 안철수만 그런것도 아니지만, 요컨대 온국민으로부터 가히 단군이래 초유의 파격적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안철수마저도, 고작해야 시각과 관점이 임진강이남에 집중.고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월 스트릿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토록 극심한 증오의 시대의 출발점과 뿌리는 바로, 우리민족이 自力으로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탓으로 강대한 외세들에 의해 원통하게도, 전범국가인 일본을 대신한 희생양으로  나라와겨레의 허리가 잘리우고, 분단 민족으로 전락해버린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줄 알아야!

이같은 외신의 논평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안철수가 얼마나 황당무계하고도 허무맹랑한 희대의 어릿광대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여러번 다각적 측면에서 누누이 논증한바 있으므로 ,이쯤에서 더이상의 중언부언을 생략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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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야~철수야! 니가 대체 뭐꼬??
안철수, 희대의 어릿광대, 그 황당무계한 오만과착각!
[세상 읽기] 정치는 왜 하는 걸까?
대통령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통일을 말하라!
지금 이땅에 대통령과정부 정당과대권주자들은 있으되 지도자는 없다

그대신 바로 어제 안철수의 문제점에 대한 나의 짧은 트윗과 보수우파 진영의 30대기수인 변희재의 관계 트윗 하나와어던 20대 청년의 트윗하나씩을 (트윗화면 그대로를 옮겨올줄 몰라서)내용만 그대로 전제하는 것으로 대체 하고 , 마지막으로 2030세대들을 위해 '유일한 박사'가얼마나 투철한 애국자이자 위대하고 숭고한 선각자이며, 얼마나 탁월한 기업가이자 고결한 인격자였는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할수 있는 그대로 옮겨와 전재하는 것으로. 안철수원장의 최소한의 양심과 지성과 상식을 마지막으로 노크 해보고자 한다.

@bbk43333: ”안철수, 국민 의견수렴 끝나야 출마 결심” - 중앙일보 뉴스 http://joongang.joinsmsn.com/r/?id=9138853 철수야~철수야!고따위로해서는후보등록마감 10분전까지 뭔 수렴해봤자 아무 결론 안날것이 분명한즉 고마 철수하고, 영희랑 바둑이하고^^ 쎄쎄쎄 놀이나 하거라! ㅋㅋ


민족신문 김기백 대표 같은 분, 이 분 박근혜, 문재인 모두에 비판적입니다. 웬만하면 제3의 무소속 후보를 지지해야 하는 노선인데, 하필이면 안철수 같은 인물이 튀어나와, 안철수 까고 있습니다.
16시간전 | byun hee jae / 변희재(@pyein2) | 관련트윗 166 | 답글 2
40301^http://twitter.com/pyein2/


@revcho @bbk43333 안철수 지지자들은 대부분 새누리,이명박, 박근혜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과 철없는 저희세대(20대)입니다. 근데 문제는 안철수가 삼성 이재용이나 이명박과 얼굴만 다르지 본질은 이들과 똑같죠. 안지지자들은 크게 속을겁니다


단기:4345(서기2012) 년8월26일새벽
인터넷 민족신문 발행인 김기백

http://www.minjokcorea.co.kr/
 
유일한 박사의 생애와경영전략 유언장...
유일한,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한 독립운동가이자 노불리스 오블리제를 솔선구범한 위대한 선각자이자 선구자



네이버캐스트


우리는 공평한 기회, 합리적인 경제정책, 세계 각국과의 자유로운 교역 등 전체 국민생활의 제한없는 발전을 위해 가장 유망한 여건을 형성시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전적으로 따르고 있다.


-1919년 4월 한인자유대회에서 선생이 작성한 결의문 내용 중에서-



국권수호를 위해 선생의 부친은 아들을 유학시키기로 결심




유일한(柳一韓, 1894. 12. 13~1971. 3. 11)선생은 1894년 12월 13일 유기연과 김씨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 유기연은 장사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평양 시내에서 농산물 도매상과 재봉틀 대리점을 경영하여 재력을 쌓은 상인이었다. 일찍이 그는 숭실학교를 설립했던 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S. A. Maffet)에게 세례를 받았고, 단발을 몸소 단행한 개화인사이기도 하였다.

당시 선생의 부친은 우리 나라를 둘러싸고 벌이던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전투구와 러일전쟁을 목격하면서 국망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국권을 수호하고 자주 독립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 양성과 경제적 자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진 자본주의 대국인 미국에 아들을 유학시키기로 결심하고, 외부 참서관을 지낸 박장현과 그의 조카인 박용만의 미국행에 선생을 딸려보냈다. 1905년 2월 일행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선생은 곧 네브래스카주의 커니(Kearney)에 정착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해 11월 일제는 온갖 협박과 위협으로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우리 나라의 국권을 강탈하더니, 1907년 7월에는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우리 나라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민족방위의 핵심 동력인 군사력을 말살하였다. 이같이 국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국내에서는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구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즉각적인 반일 무장투쟁으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한인소년병학교 입교


재미동포들 또한 이 시기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등 한인 자치단체들을 확대 개편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특히 국내에서 활빈당에 가담하여 반일 무장투쟁의 경험을 갖고 있던 박용만은 장래의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미주지역에서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1908년 7월 개최된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 대표자회의’에서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하여 일부의 반대를 누르고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1909년 6월 그의 주도로 한인소년병학교가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Hastings)에서 설립되었다. 이렇게 미주지역에서 최초의 한인군사학교가 개교하자, 박용만을 따라 도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독립전쟁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선생은 이 학교에 나가 학비를 벌고 오후에는 학과공부와 군사훈련에 임하였다. 독립전쟁의 지휘관이 되겠다는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선생은 남보다 부지런하고 열심일 수 있었다.


선생의 소년병학교 생활은 이 학교가 문을 닫는 1912년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길지 않은 3년여의 기간이었지만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열렬한 독립전쟁론자인 박용만을 지도자로 모시고, 조국 독립에 헌신하려고 하는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받았던 이 학교에서의 민족 군사교육은 선생에게 조국과 민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사상이야말로 선생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원천이었고, 기업 경영의 지표로 작용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참석

이후 선생은 1915년 헤스팅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트로이트 변전소에 취업하여 학비를 마련한 다음 1916년 미시간 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면서 선생은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무역업을 하던 중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거족적인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동포들은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를 개최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지 후원하며, 세계 만방에 한국 독립의 의지를 선전 전파하기 위한 대규모의 독립선언대회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 동부 필라델피아의 리틀 극장에서 150여 명의 재미 한인대표들은 미 상원의원과 시장 등 다수의 미국인 후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대학 4년생이었던 선생은 대의원 자격으로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 등과 함께 이 대회에 참가하여 실무적인 일을 맡았다. 이 대회에 참석한 한인대표들은 한국의 독립 승인을 촉구하면서 4월 13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 국민에게 알리는 ‘한국 국민이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 등을 작성 반포하였다.

이 대회의 마지막 행사로 참석자 모두는 대형 태극기를 든 선생을 필두로 필라델피아 시내를 시위 행진한 뒤 미 독립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여 한국인의 독립열망을 다시 한 번 표출하였다. 이 대회 기간 중 선생은 헨리 김, 조안 우 등과 함께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 기초 작성위원으로 선출되어 결의문을 성안 낭독하였다.



결의문의 내용을 통해 선생을 비롯한 당시 미주 한인대표들이 상정한 독립국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우선 이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대통령 중심제를 모델로 하면서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한 국가체제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는 대통령 1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제도적으로 방지함은 물론 새로 건설될 독립정부에 각지 독립운동자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특히 이들은 민중 주도의 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 민중 교육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는 선생을 비롯한 재미 한인동포들이 미국 민주주의를 실제로 경험하면서 그 토대로서 민중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던 탓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민족 실력양성을 위해서도 민중 교육을 매우 시급한 과제로 인식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향후 선생이 고국에서 기업 경영과 더불어 교육사업에 온갖 정열을 쏟았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1926년 유한양행 설립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



이후 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와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사(General Electric) 등에 취직하였다가, 1922년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였다. 이를 운영하여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이 마련되자 선생은 곧 귀국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선생은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1926년 12월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선생은 1928년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라는 영문책자를 간행하여 미국인들에게 우리 나라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유한양행의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진력하고, 우리 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하였다.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한인국민회에 기부한 자금에 대한 영수증(1925.5.27) 영수액은6달러이며기부금으로 여겨지는 액수가 18달러로 기록되어 있다.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 참여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일제에 의해 만주침략(1931. 9)과 중일전쟁(1937. 7)이 도발되어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변화하여 갔다. 이에 따라 선생은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수출선의 다변화를 위해 유럽 및 중국 시장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1년 4월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 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지와 후원 아래 항일 독립전선에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광복대업을 촉성하기 위한 대일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해외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은 ①대한민족은 주의와 이론을 초월하고 온갖 역량을 항일전선에 집중할 것 ②대한민족과 각 단체는 임시정부를 절대 신뢰하며 물질과 정신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봉대할 것 ③해외 한족단체는 전체 동포에게 광복군 군인의 의무가 있을 것을 인식시키며 전선 출동의 훈련을 장려하기로 할 것 등을 결의하고, 그 통일조직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이때 선생은 이 위원회의 집행부 위원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자금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인 국방 경위대로 창설된 맹호군 편성에 참여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년병학교 출신으로 대일 무장투쟁과 독립군 양성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선생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한인 국방 경위대로서 창설된 맹호군(猛虎軍) 편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같은 해 8월 29일 LA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 김호와 함께 참석하여 중경임시정부의 축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이는 비록 주정부에서나마 재미 한인동포들이 일본 국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감격의 순간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결실이 있기까지는 선생의 보이지 않는 활동이 밑받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냅코(Napko)작전이라 불리는 국내 침투작전에 참여


선생이 콜로라도에 있는 M.O. Jung에게 보낸 편지(1943.9.4) 세계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조국의 독립이 요원함을 한탄하고, 재정적 지원을 해준 데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선생의 조국 광복에 대한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냅코작전계획(Napko Project)의 참여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군 전략정보처(OSS)에 의해 수립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이었다. 이 같은 작전계획은 미주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을 이용하여 동시에 계획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1월 선생은 이 작전계획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되어 입대 훈련을 받고,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작전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실행되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 선생은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 등을 설립 운영하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자본의 사회 환원에도 힘썼다. 특히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함으로써 전문경영인 시대의 서막을 열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했던 사실과 더불어 기업경영사의 미덕으로 남을 것이다. 선생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9. 한인소년병학교 입교
1919.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참석
1942. 맹호군 편성에 참여
1945. 냅코작전이라 불리는 국내 침투작전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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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유일한( 柳一韓, 1895∼1971 ) :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 우리 나라 최초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 준 훌륭한 사업가이다.

●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첫째,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림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 공업고교 학생들의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며 그 학생들이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유일한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내 초미리는 딸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다섯째, 아들 유일선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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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전략론 과제

유일한의 경영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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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과 명:

경제통상학부


과 목 명:

경영전략론


지도교수님:

윤 대혁 교수님


조 원:

2004033037 김종률




2007033048 명하영



1. 머릿말

‘버드나무 문양이 상징인 기업’,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싱싱하고 푸르게 성장하였으며, 항상 국민보건 향상에 앞장서온 모범기업’, ‘국민의 존경을 받는 기업’, 이러한 수식어가 붙는 기업은 바로 유한양행이다. 유한양행은 우수의약품 생산을 통해 국민 건강향상에 기여하고 성실한 납세를 통한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며,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통한 사회복지 증진에 기여한다는 기업이념을 중심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1등 보건기업’이라는 비전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한양행의 경영이념은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유일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존경받는 기업’인 유한양행을 있게 한 유일한 박사의 생애와 경영이념을 통해 유한양행의 성공전략을 살펴보자.




2. 유일한의 생애

1)탄생



유일한은 1895년 1월 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유기연과 김기복 여사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청일전쟁으로 평양에서 강계로 피난 가는 와중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부친 유기연은 싱거미싱(싱거재봉틀)의 대리점을 경영한 개화된 상인이었고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정의감이 강한 애국자였다. 유기연은 ‘젊은 사람들을 많이 외국에 보내어 새 교육을 공부해야 나라가 빨리 개화되고 그럼으로써 나라가 온전히 설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개화입국론을 접하고는 1904년 무렵 한일합병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1904년 대한제국 순회공사였던 박장연의 멕시코 순방길을 따라 아홉 살 난 어린 일한을 미국으로 보냈다. 그로부터 6년 뒤에 한일합병이 되자 유기연은 북간도로 가서 항일독립투쟁에 투신하였다. 그가 아들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낸 것도 미국에서 견문을 넓히고 경륜을 쌓아 누구보다도 크게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이었다.




2)미국생활


미국에 도착한 유일한은 ‘네브레스카’로 가서 그곳 ‘커니’라는 마을에 침례교 신자인 미국인 가정에서 생활하며 신문팔이 등의 고학으로 소학교를 거쳐 1915년에는 헤이스팅스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미식 축구선수로 발탁되어 선수장학금을 받았다. 이런 경험들은 유일한에게 무슨 일이든지 성의와 노력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잇다는 신념을 가지게 하였다.

이와 같은 불굴의 정신력으로 다져진 소중한 신념은 그가 후일에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기업가가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고생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1916년 미시간 대학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한 뒤 제너럴 엘렉트릭 회사에 유일한 동양인 회계사로 취직하였고 학창시절에 알게 된 중국태생의 소아과의사 호미리 여사와 결혼 하였다. 이때 제너럴 일렉트릭에서는 유일한을 장차 동양시장개척을 위한 총 지배인 직을 맡길 계획이었다.


3)라․초이 식품회사


유일한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자본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사업을 시작했다. 유일한이 택한 사업은 중국요리에 쓰이는 숙주나물을 생산하는 업종이었다. 숙주나물은 중국인의 음식인 만두의 맛을 내는데 꼭 들어가야 하는 재료이다. 그런데 당시의 미국에서는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많은 화교들이 맛없는 만두를 먹어야 했다.

그런데 숙주나물이 들어감으로써 제 맛을 내는 중국요리가 널리 보급되고, 이로써 중국요리를 좋아하는 미국인이 많아지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미국인은 중국 요리집에 가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일한은 숙주나물의 구입난으로 맛없는 만두를 먹어야하는 중국인과 중국요리에 맛을 들이긴 했으나 중국 요리집에 가기를 꺼려 자기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를 원하는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숙주나물을 공급한다면 튼튼한 기반을 지니는 독특한 기업이 성립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신선한 상태의 숙주나물을 제때에 공급해 줄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유리병을 사용했으나 파손이 많고 내용물인 숙주나물이 마르거나 썩거나 해서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 통조림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끓여서 깡통에 넣으면 죽이 되었으며 뚜껑을 덮으면 가스가 차서 터지기도 하였다. 다시 도전하여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썩지 않고, 죽이 되지도 않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완성하였다. 이 후 소규모의 생산공장을 마련하여 제품을 생산․ 판매 하여 예상대로 좋은 성과를 올렸다.


그는 자신이 직접 숙주나물 통조림과 간장 등 양념 일체를 들고 다니면서 판매 일선에서 뛰었다. 그는 숙주나물로 만드는 요리인 찹스요리를 스스로 양념해 주며 조리하는 방법까지 실현해 보이면서 판매촉진 활동에 나섰다. 여기에서 숙주나물의 독특한 시장이 형성되리라고 전망한 유일한은 사업의 규모를 확대하기로 결심하여 대학시절의 친구로서 디트로이트에서 식료품상을 경영하고 있던 웰레스 스미스라는 미국인과 함께 투자하여 1922년에 “라․ 초이식품회사” 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4년만에 50여만 달러라는 거액의 수익금을 올리게 되었다.



4) 독립운동



숙주나물 식료품제조로 성공한 유일한은 원료인 녹두를 수입해 가기 위하여 1925년 22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4반세기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서울에 들렀다가 가족을 만나기 위하여 북간도로 갔다.

꿈에 그리던 양친과 동생들을 만나고 난후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22년 만에 돌아와서 고국의 모습을 보고난 후 사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유일한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대학생 때부터 싹터있었고 애국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3․1독립만세 운동이 있었던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국내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재미 한국인이 각 주에서 대표를 뽑아 대대적으로 궐기하여 미국에서 벌인 또 하나의 3․1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 때 유일한은 미시간대학 학생으로 재미 한국인 대표로 선출되어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했다. 이 시기에 유일한은 이미 자신이 지닌 목숨은 오직 나라사랑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다져져 있었다.




5)유한양행 설립



1926년 귀국했을 때 유일한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에비슨 박사로부터 그의부인 메리 우와 함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교수로 취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교육계와 실업계 사이에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커다란 고심을 한 끝에 실업계에 투신하기로 결정하고 1926년 12월 29일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3. 유일한의 경영이념



유일한은 어려서부터 그의 부친인 유기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일한의 아버지는 “모든 가치의 척도를 돈으로 삼되 그 돈은 응분의 노력의 대가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고 이런 부친의 엄격한 상벌제도를 통해 배운 상도로 인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기업경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애국애족정신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의 독립을 위한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애국애족정신과 청지기사상을 바탕으로 유일한은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 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배출하며 기업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 남는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 한다.”라는 기업이념을 바탕으로 유한양행을 창립하게 된다. 이러한 기업이념을 바탕으로 유일한의 주요 경영이념을 살펴보자.



1)애국애족사상


유일한이 유한양행을 창립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상은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도움을 주자”는 그의 말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유일한의 이러한 사상은 투철한 애국애족정신을 가진 부친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며, 주요 독립 인사들과 한인 자유대회에 참석하여 결의문을 낭독하는 등 독립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국 유학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재치하의 절망적인 조국의 상황을 보며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애국애족사상이 더욱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애국애족사상은 1930년대 조회 때 마다 전 사원에게 항상 국민을 위해 일하며,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일하고, 유한은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며 국가의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일한의 이념은 유한양행의 기업활동에도 반영되었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우선 유한양행이 제일 먼저 제품광고를 한 것이 의약품이 아닌 염료였다는 점이다. 당시 사람들이 즐겨 입던 무명옷은 거의 염색을 하지 않아 흰옷 그대로 입기 때문에 금방 때가 끼고 검댕이 묻어서 불결하게 보였다. 그래서 자주 빨래를 해야 했고 그 수고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유일한은 염료로 흰옷을 염색해 입으면 빨래하는데 시간을 덜 빼앗겨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로인해 생활의 다른 부분도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이는 염료를 팔아 수익을 높이기 위한 광고가 아닌 백의의 비경제성을 불식시켜 동포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는 계몽적 성격이 짙은 광고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는 그 당시 많은 약품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과대광고를 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과대광고에 관한 처벌법은 약품광고에는 유명무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기업이 광대광고를 하고 조작된 치료사례를 소개하는 와중에도 유한양행은 과대광고가 아닌 약 이름과 치료효과가 있는 질병들에 대한 설명만을 함으로써 정도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유한양행의 행동은 과대광고보다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제품들을 소개함으로써 국민들의 건강증진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유한양행의 기업활동은 유일한의 애국애족사상이 반영된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2)국익사상



유일한은 기업의 활동은 결국 국가의 이익이 되는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국익사상은 ‘납세정신’과 ‘공선사후’의 신념으로 나타난다.


‘납세정신’이란 정직한 납세를 통해 국익에 기여하겠다는 신념으로 유일한은‘국가는 세금 없이 운영이 불가능하고 기업은 세금으로 운영 유지되는 국가의 법적 보호 없이 존립할 수 없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유한양행은 1968년 3월 제2회 ‘세금의 날’ 기념식전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국세청으로부터 ‘국세청 선정 모범 납세업체’라는 동제현판을 받기도 하였다.




‘공선사후’의 신념이란 국가나 사회가 필요로 하면 공적인 측면에서 사익보다 공익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제2한강교 건설 당시 제2한강교의 건설에 필요한 부지를 그 당시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여 기업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 하였다.

이러한 유일한의 국익사상이 반영된 유한양행은 ‘탈세없는 투명한 기업’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다.


3)인재양성



유일한은 ‘연마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라고 하며 유능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는데 힘썼다. 또한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산업발전을 위해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세우고 전액 장학제도를 채택하여 기능공을 양성하였다. 후에 이 학교를 영등포로 옮겨 오늘의 유한공업고등학교로 발전시켰고 1967년에는 유한 중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사회의 일꾼을 배출하는데 노력하였다.


4)청지기 사상

청지기란 기업을 통해 개인의 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것의 공익적 성격을 말한다. 유일한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한다.’는 말은 그의 청지기 사상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바탕으로 초창기의 유한양행에서는 약품만이 아니라 국민건강과 직결된 여러 제품들을 수입, 생산하였다. 그 예로 화장지, 생리대, 락스, 아이보리비누, 치약 등의 다품목을 수입한 것을 들수 있으며, 얼마 후에는 농기구와 염료, 페인트까지 수입하였다. 즉 유한양행은 사업의 품목을 정하는 것을 단지 기업이 이윤추구의 면에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국민 기초생활의 보장을 위한 품목을 우선적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유일한의 청지기 사상은 그의 유언장에서 가장 잘 들어난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손녀에게 교육비용으로 약 1만 달러의 유산을 남기고 미국에 있는 장남에게는 ‘너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라.’는 유언과 함께 한 푼의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딸에게는 유한중학교, 유한고등학교 내에 묘소 및 주변 대지 5천 평을 상속하되 ‘유한동산’으로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게 해줄 것과 자신의 소유 주식 전부를 제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할 것을 부탁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기업 소유권을 후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었으나 유일한은 그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서 그가 강조하던 청지기 사상을 몸소 보여주었으며, 그의 딸 유재라 역시 죽으면서 나머지 재산을 사회에 기증함으로써 2대에 걸쳐 청지기 사상을 보여주었다.



5)혁신주의 사상




유일한은 ‘기업은 물건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 이것이 기업에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라는 혁신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라초이 식품회사의 설립을 통해 숙주나물의 통조림화에 성공하면서 유한양행을 설립할 수 있었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934년 독일의 도마크 박사가 개발한 프론토실을 재빨리 도입하여 ‘GU사이드’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였다. 프론토실의 도입은 한국 최초였을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처음이었으며 일본보다도 빨랐다. ‘GU사이드’의 판매는 유한양행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약업 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




유일한의 혁신주의 사상을 보여주는 일화는 이외에도 다양하다. 그는 항상 직원들에게 새로운 사고와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무렵에 백신이 제시간에 도달하지 못하여 백신을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직원들과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그는 솜으로 싼 특수용기에 백신을 넣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하였다. 결국 그 안이 발전되어 직원들은 특수용기에 넣은 백신을 개발하여 기차가 정차하지 않는 역에서는 그것을 던지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6)경영과 소유의 분리



‘기업과 개인적 정실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요, 또한 기업을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유일한은 경영과 소유를 엄격히 분리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이념을 철저히 실행에 옮겨져 훗날 경영에서 부각되는 경영전문인체제를 일찍이 도입하여 자신이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친인척이 아닌 사람에게 사장직을 잇도록 했다. 지금도 유한양행의 1,100여 임직원 가운데 창업주의 친인척은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7)공동운명체적 노사관계



유한양행은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기업 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다.’라는 유일한의 경영철학에 따라 노사가 상생하는 기업문화, 노사가 화합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창업 이후 단 한차례의 노사분규도 겪지 않은 것도 이처럼 전 임직원상호간의 신뢰가 형성돼 있기에 가능했다.


4. 유일한의 성공전략



유한양행은 일제시절 창립해 현재까지 그 명목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기업이다. 의약업계의 모든 기업이 과대 과장광고를 행하고 마약계통의 약품을 판매 할 때 이를 거부 하였고 모든 기업이 정부에 정치자금을 지원할 때 유한양행은 정치자금을 지원하지 않고 정경유착을 거부하였다. 이렇듯 유한양행은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당시 관행처럼 해오던 일을 거부하고 기업 스스로의 힘으로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고 살아남았다. 과연 어떠한 점이 유한양행을 살아남게 했을까?


우선 창업주 유일한의 확고한 기업이념을 들 수 있다. 우수의약품 생산을 통해 국민 건강에 기여하고 성실한 납세로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며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에 힘쓴다는 그의 이념은 하나의 비전으로 작용하여 기업의 조직원들에게 확고한 방향성과 목표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둘째로 그는 그의 경영이념을 관철함에 있어 인센티브를 통해 직원들이 최선을 다하게 했다. 유한양행은 매년 영업실적에 따라 연말에 월급이외의 보너스를 지급했는데 보너스는 사원 마다 달랐다. 어느 해 연말 사원 중 시말서를 많이 쓴 사원들은 보너스가 적을 것을 염려해 전전긍긍 하였으나 막상 보너스를 받고 보니 오히려 시말서를 쓴 사람들의 보너스가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유일한은 ‘시말서를 많이 썼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일을 해보려고 했다는 증거’이며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실수도 하게 마련’이라면서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은 적당히 일하겠다는 ‘적당주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방침은 조직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일찍이 ‘종업원 지주제’를 시행해 종업원들의 근로 의욕을 높임과 동시에 종업원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통근버스를 운영하고 공장 옆에 기숙사와 수영장을 지어 종업원의 복지에 힘쓰는 등 종업원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유일한의 경영전략은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서 경영전략의 장애요소 중 하나인 인적장애를 극복한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유일한은 능력 개발에 힘썼다. 기업에 뛰어난 자원이 존재하더라도 자원을 활용하여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 자원은 유명무실한 것이다. 유일한은 일찍이 ‘연마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라는 생각을 기초로 능력개발에 힘썼으며, 유일한 자신도 끊임없이 자기 개발에 노력했다. 또한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의 양성에 힘썼으며 이는 유한양행의 핵심역량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넷째로 유일한은 혁신을 추구하면서 신제품의 개발에 노력하였다. 유일한은 실수의 유형을 둘로 나누고 뭔가 일을 의욕적으로 하다가 실수를 한 경우는 오히려 연말에 보너스를 더 챙겨 주는 등 사원들의 새로운 노력을 격려하였다. 이러한 격려를 통해 유한양행은 계속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하여 시판했다. 대표적인 신제품으로는 코테나, 비타나인, 이소짓, 파스정 등으로 특히 비타나인과 코데나는 인기가 매우 높아 1956년도에는 3억 환 가량의 매출을 올리기도 하였다.


다섯째로 고품질의 제품을 제공하고 기업의 이익보다 소비자의 효용을 먼저 추구하는 차별화 전략을 펼쳤다. 당시 ‘밀가루 항생제 파문’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함량이 턱없이 미달되는 항생제로 당시 항생제는 50~60% 함량미달 제품이 대다수였으며 심한 것은 90%함량미달 제품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제품을 시중에 판매한 5개 제약회사가 처벌을 받게 되고 그 영향으로 사람들의 약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제약업계의 손실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유한양행은 평소에도 생산과정에서 감소할 분량까지 계산하여 10% 가량 함량을 보태어 생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소비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드링크제가 인기가 있어 유한양행의 임원들이 드링크제의 판매를 건의 하였을 때 ‘드링크제는 약간의 약 성분을 물에 타 부풀린 것이며 알약으로 충분한 것을 드링크로 만들어 비싼 값에 판매하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짓’이라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약품회사들이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마약계통의 약품의 판매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일한은 ‘기업의 이윤을 위해 국민을 아편쟁이로 만들 수 없다.’며 마약계통 약품의 판매를 거부하면서 사람들은 이제 버들표 마크가 찍혀 있는 유한양행의 약은 일단 믿고 산다며 유한양행의 가장 큰 자산은 ‘신용’임을 강조하였다. 즉 유한양행은 믿고 먹을 수 있는 고품질의 의약품을 제공하는 차별화 전략을 통해 고객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이는 유한양행의 큰 힘이 되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유일한의 기업이념을 바탕으로 한 여러 경영활동들이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꾸준한 능력 개발과 혁신추구를 통해 신제품을 개발함과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제품, 고품질의 의약품을 제공함으로서 다른 기업과 차별화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과 ‘탈세 없는 투명한 기업’이라는 명성이 유한양행의 핵심역량으로 작용하여 환경의 변화를 극복하고 현재의 ‘존경받는 기업’ 유한양행을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5. 맺음말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유일한은 경영자임에 앞서 한 인간으로써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또한 합리적이고 부패 없는 투명한 경영을 한 존경받는 경영자였다. 특히 그의 유언장은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면서 끝까지 그의 신념을 지킨 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기업가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한 인간으로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유일한은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며 갖은 방법을 통해 세금을 회피해 자손에게 재산을 넘기려 하는 기업가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의 기업문화가 더욱 성숙해지고 한국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일한의 이념과 행동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기업들이 국민을 위해 생각하고 활동하면 국민들은 신뢰라는 형태의 기업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핵심역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참고문헌



1. 이종하(1992). 청지기 유일한의 버드나무길. 도서출판 태성



2. 유한양행 광고사 편집위원회(2000). 광고로 본 유한양행



3. 조성기(2005). 유일한 평전. 작은 씨앗



4. 차중근(2005), 주식회사 유한양행과 섬김 리더십



참고 사이트



1.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최선을 다한 오늘이 어제와 내일을 만든다.

http://blog.naver.com/jklovelike/5000152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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