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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불길한 망국 예감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구한말 망국 때보다 더 열악하다.이 시점에서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을 냉철히 인정하자.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3/12/03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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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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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구한말 망국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필자가 『인민의 탄생』(2011) 후속작인 『시민의 탄생』을 출간하면서 가진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덧붙이고 싶다. ‘그때보다 더 열악하다’고. 한국을 두고 벌어지는 극동정세가 그렇고, 그와는 아랑곳없이 터지는 내부 분열이 그렇다. 누군가는 항변할 것이다.
 
그래도 백 년 동안 힘을 길렀는데 오늘의 한국은 구한말 조선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4강은 한국이 커진 것보다 더 커졌고, 북한 변수가 돌출한 이 시대 역학구도에서 한국의 입지는 한없이 쭈그러졌다고. 내부 분열? 당시에는 분열상이 조정에 한정되었지만 지금은 시민사회 전반을 갈라놓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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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믿기지 않는다면 중국·일본이 겹겹이 쳐놓은 방공식별구역으로 바짝 좁혀진 바다와 거기에 갇힌 한국을 보라, 4강 역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방공식별구역 경쟁은 용암처럼 꿈틀대는 극동정세에 잠재된 하나의 상징적 사건일 뿐이다. 한국은 두 개의 분절선이 엇갈리는 위치에 몰려 있다.
 
한·중과 일본을 가르는 ‘역사대치선’, 한·미·일과 중국·북한을 가르는 ‘군사대치선’이 한국의 지정학적 주소를 모순적으로 만들었다. 정세 변화에 따라 눈치를 살펴야 할 판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모순의 딜레마를 증폭한다. 아베 정권은 역사대치선의 중추신경인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곧장 미국 뒤에 숨었는데, 한국은 중국과 위로주를 나누다가 얼떨결에 군사대치선으로 복귀해야 할 형편이다. 제주도 남쪽 상공에 신예전투기들이 난무해도 한국은 구경할 뿐 뾰족한 방법이 없다.
 
 구중궁궐에 갇혀 ‘정의의 대국’이 오기를 고대했던 고종(高宗)과, 틈새전략도 구사하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이 무엇이 다른가. ‘난폭한 북한’이 불거지고 여기에 영토분쟁이 겹치면 한국의 운명은 강대국 역학에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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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이나 지금이나 한국은 4강 역학에서 종속변수다. 두 개의 대치선에 끼어 쩔쩔매는 판에 내부 분열은 고종 때보다 더 심하다. 일 년간 정치권은 집요한 싸움밖에 한 일이 없고, 분쟁에 시달리던 시민사회는 끝내 쪼개졌다. 종교계 일부가 듣기에도 거북한 대통령 하야 선언을 하고 나설 정도니 부지불식간 정권의 거버넌스는 금이 갔다. 회복해도 영(令)이 설지 의문이다.
 
 국민의 건강한 판단력도 마비상태다. 명박산성보다 더 견고한 ‘요새정치’ 앞에서 지쳤고, 야당과 비난세력의 ‘돌격정치’에도 넌더리가 났다. 대통령 하야 요구가 정말 민주적인지, 120만 개 부정 댓글에 더해 뭐를 더 폭로할지 모를 판국에 법률 판단에 맡기자는 ‘회피정치’가 과연 민주적 리더십인지 헷갈린다. 정치권 분열, 약한 국력, 쪼개진 사회, 비전의 소멸, 그리고 열강의 충돌, 이것의 결말은 민족의 파멸이었다. 110년 전 대한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파국드라마, 그 악몽은 오늘날 한국과 정확히 닮은꼴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을 냉철히 인정하자.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을 이만큼 키운 20세기 패러다임은 끝났음을, 우리는 막힌 골목에 와 있음을 말이다. 산업화 세력이 그토록 자랑하는 성장엔진은 구닥다리가 됐고, 민주화 첨병이던 재야세력은 기득권집단이, 강성노조는 이익집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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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비관적 진단이라고? 아니다. 구한말에는 그래도 민지(民智)를 모을 생각은 했다. 지금은 민지를 쪼개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유길준이 강조한 ‘시세(時勢)와 처지(處地)’는 이 시대에 더 절실한 교훈이다. 망국의 아픔이 있는 민족은 이보다 더 비관적 진단을 안고 살아야 한다. 대한제국의 패망이 식민지, 전쟁, 독재를 치르게 했듯이 ‘침몰하는 한국’의 유산은 당대의 것이 아니다.
 
 우리 자녀들과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할 고난의 짐이다. 망국을 부르는 전면전에 나서기 전에 한번 자녀들의 얼굴을 보라.그 맑고 순진한 표정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다 같이 싸워 끝장을 봐도 좋겠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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