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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日人 위장 이토 사살?’…NYT 저격 동영상 삽화 깜짝'
<안중근순국 104주기④> “처형직전 남긴 말은 동양평화!” 1910년 사형집행 생생보도 발굴... <중앙일보
 
조선일보 기사입력 :  2014/03/0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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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日人 위장 이토 사살?’…NYT 저격 동영상 삽화 깜짝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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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4.03.07 14:08 | 수정 : 2014.03.07 14:13

    “저격 장면 촬영 동영상 재판 활용”…1910년 NYT 특집 보도

    
	'안중근 의사 日人 위장 이토 사살?’…NYT 저격 동영상 삽화 깜짝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사살할 당시 일본인으로 위장 잠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와 함께 저격 순간을 촬영한 동영상 자료가 안중근 의사의 재판에 채택된 사실이 당시 보도를 통해 확인됐다.

    뉴욕 타임스는 1910년 8월14일자에 깜짝 놀랄 특집기사를 실었다. ‘스릴 넘치는 순간을 포착한 희귀한 사진들(Unusal Snapshots Taken at Thrilling Moments)’의 제목으로 한 면 전체를 채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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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잠수함 조난, 러시아 광산 폭발 등 20세기 초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포착한 것으로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순간 등 8대 사건이 사진과 함께 게재됐다. 그중에서도 신문의 정중앙에 위치해 ‘세기의 사건’으로 대접받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 순간은 유일하게 삽화로 소개됐다. 그런데 이 삽화엔 특이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이토를 사살하는 안중근 의사의 복장이 일본 기모노 차림이었고 이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사 내용을 보지 않는다면 영화 촬영장을 묘사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뉴욕 타임스는 삽화 설명문에 ‘이토 백작을 저격하는 장면은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고 재판에서 상영된 후 일본 정부가 압수했다’고 표기했다.

    이에 앞서 뉴욕 타임스와 샌프란시스코 콜, 로스앤젤레스헤럴드 등 미국의 주요 미디어들은 1909년 12월9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발 기사로 일제히 동영상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는 “오늘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입항한 일본의 증기여객선 가가마루호가 가져온 소식에 따르면 하얼빈에서 이토 백작이 피격될 때 러시아 촬영기사가 저격 순간을 촬영했다”면서 “이 동영상은 한국인 저격자의 재판 때 활용된다”고 보도했다.

    타임스는 “일본 관리들은 비극의 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500피트(약 10분 분량)의 동영상 필름을 입수, 재판 때 활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또다른 필름 한 세트도 일본에서 공개될 예정”이라고 덧붙여 촬영된 필름이 두 세트임을 시사했다.

    이 동영상은 이듬해 2월 일본에서 일반에 공개 상영됐고 이후 미국에서도 상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12월25일 미니애폴리스의 ‘더 벨맨’ 지는 “사망한 이토 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백작이 한국 통감으로 임명됐다”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로 권력을 번갈아 행사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촬영기사가 촬영한 이토의 피격 장면이 내년 재판 때 활용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 “동영상 저격 등 모든 장면 촬영”

    뉴욕 타임스는 1910년 8월14일 특집 기사에서 “이토가 코콥포프를 만날 때 이례적으로 동영상 촬영이 된 것은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메라 필름은 빠르게 돌아가며 열차에서 내린 이토 일행이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향해가는 장면을 담았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계속 돌아갔고 모든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장면들이 이어졌다.”

    뉴욕 타임스는 이어 “이토 백작의 피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실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부서졌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러시아 촬영기사가 이토 도착 직전부터 저격 순간, 안중근 의사 등이 체포되고 현장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호송되기까지의 전 장면이 촬영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날 게재된 애니메이션은 동영상을 확인하고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저격 상황의 그림은 이토의 관복과 수행원의 위치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성 두 명이 환영의 인사를 하는듯한 포즈도 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안중근 의사의 일본옷 차림이다. 이는 현장의 삼엄한 경비를 고려해 일본인으로 위장했을 개연성을 말해준다. 뉴욕 타임스가 저격 직후 송고한 기사에 따르면 플랫폼엔 이토를 환영하려는 일본인들이 운집했다고 돼 있다. 만일 안중근 의사가 현재 남아 있는 자료사진처럼 허름한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러시아 경찰이 수상쩍게 봤을 가능성이 크다.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를 처음 발굴한 재미 언론인 문기성씨는 “뉴욕 타임스가 동영상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삽화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없다. 당시 장면들은 사진 촬영된 것도 없고 우연히 찍힌 이 동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일본인 위장이 사실이라면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안중근 의사 저격 동영상 1910년 미국서도 상영

    역사에 남을 세기의 동영상은 그러나 이후 종적을 감췄고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로부터 85년이 지난 1995년 일본 NHK 방송이 방영한 다큐물에서 안중근 저격 동영상의 일부가 방영됐다.

    이토가 타고온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과 이토 일행이 환영객의 영접 속에 플랫폼에서 걸어오는 장면, 안중근 의사 등이 포박돼 호송되는 흐릿한 장면 등 30초 분량이었다. 그러나 저격 순간이 촬영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포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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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KBS 역사스페셜팀은 동영상 원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NHK 다큐물이 1941년 아사히신문이 제작한 ‘약진의 흔적’이라는 영화 필름을 활용한 것임을 알게 됐다.

    동영상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저격 일주일만인 1909년 11월3일 경성신문의 보도였고 일본 정부가 동영상을 현재 가치로 2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 1만5000원을 주고 구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이듬해 2월1일부터 6일까지 도쿄 국기관에서 공개 상영되는 일도 있었다.

    저격 동영상이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미국에서도 상영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지만 이 동영상이 사본인지, 원본을 임대한 후 다시 돌려줬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만일 사본이라면 미국에서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로선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가 안중근 의사가 감행한 ‘세기의 저격’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현존하는 최고의 자료인 셈이다.

    다음은 1910년 8월14일 뉴욕 타임스 특집 기사 중 이토 처단 부분.

    '지난해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진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한국 통감인 이토 백작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로 돼 있었다.

    이토 일행을 일본 환영객들이 플랫폼까지 나와 맞이 하기 위해 공식적인 경호의 벽이 완화된 상태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례적으로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다.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내 촬영토록 한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카메라 필름은 이토 일행이 열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건너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곟속 돌아갔고 모든 상세한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모습이 이어졌다.

    현장을 촬영한 필름이 현상됐을 때 내용은 물론, 반응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유럽의 관료 집단은 이것이 공개되면 비슷한 폭력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한 태도는 최근 미국 회사가 코네티컷의 폭발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을 유럽의 딜러들에 판매하려고 했을 때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한 남성은 그것을 러시아로 가져가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폭력이나 범죄의 장면을 보여주는 동영상에 대한 편견은 국가검열위원회(National Board of Censors)의 영향에 따라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토 백작의 저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실제 상황”이다.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파괴됐다. 동영상은 소방차용말들이 멀리서 다가오고 그중 하나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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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순국 104주기④> “처형직전 남긴 말은 동양평화!” 1910년 사형집행 생생보도 발굴

    [뉴시스] 입력 2014.03.08 13:51 / 수정 2014.03.08 16:09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10년 3월 26일 뉴욕타임스에 짧은 외신이 실렸다. 만주 하얼빈(哈爾濱) 발 기사였다.

    “이토의 저격자가 사형됐다. 지난해 10월 26일 전 한국통감 이토 백작을 저격한 한국인, 안중근이 오늘 아침 포트 아더에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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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10월27일 촬영한 안중근 의사 가족.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 안중근 의사는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09년 10월 26일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지 정확히 5개월되는 날이었다. 저격 당일 급전으로 미대륙에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을 전했던 뉴욕타임스는 사형 소식도 어떤 언론보다 빨리 송고했다.

    뉴욕타임스가 명기한 ‘포트 아더(Port Arthue)’는 뤼순(旅順)의 영어 표기다. 영국 해군 중위 윌리엄 아서(William C.Arthur)가 이곳에 정박한 것을 기념한 이곳은 지정학적 요충지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뤼순 교도소 또한 러시아, 일본, 중국 등 관할국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거사 직후 러시아제국 경찰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 넘겨져 다롄(大連)시 뤼순교도소에 수감됐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40여일 뒤인 3월 26일 형이 집행되기까지 일본의 통제를 반영하듯 영어권 매체의 보도는 거의 없었다.

    뉴욕타임스의 짧은 보도이후 미국 매체들이 안중근의사에 관한 속보를 전한 것은 4월 8일이다. 오레곤 살렘에서 발행되는 데일리 캐피탈 저널(Daily Capital Journal)은 1면에 ‘유나이티드 프레스’의 기사를 전재했다.

    ‘배려심있는 정부(A Thoughtful Government)’라는 이색적인 헤드라인의 기사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빅토리아 항에 입항한 일본 증기선 쿠메릭호로부터 전해진 소식이었다. “이토 백작의 저격자에 대한 사형집행은 당초 3월 25일로 예정됐으나 이 사형수가 ‘동양평화론(Peace in the Far East)’이라는 저서를 완성하기 위해 연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기사는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스포케인 프레스(The Spokane Press)’에서도 같은 날 소개됐다. ‘책을 끝내기 위해 처형 연기(Postpone Execution to Finish Book)’라는 보도에서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안중근은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평화론자이기도 했다. 그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보도했다.

    ▲ “동양 평화를 위해 이토를 죽였다”

    알려진대로 안중근의사는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옥중에서 집필했으나 완성을 짓지 못했다. 그는 ‘동양 평화론’ 서문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은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설파한 것이다.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와 고종황제 폐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고 정권을 빼앗은 이토의 15가지 죄악을 들며 “동양의 평화가 어지럽혀지기때문에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나아가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한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또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를 처단했므로 살인자로 대우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같은 인식은 ‘특파독립대장’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킨 1908년 당시 그가 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 석방해 준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한·중·일 3국이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이라는 특별한 단어를 통해 지구 반대편의 미국인들은 이토를 저격한 청년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 ‘배려심있는 정부’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미국 독자들은 사형연기의 사유가 죄수의 책 탈고라는 사실에 감동받았을 법 하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당초 안중근의사는 형의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책을 완성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형집행이 하루 연기된 것은 3월 25일이 순종의 생일인 ‘건원절’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던 시점이라 이들을 자극할 것을 우려했기때문이다. 예정했던 분량의 5분의 1도 쓰지 못한 상황에서 ‘책 탈고를 위해 처형을 하루 연기해주었다’고 외국 미디어에 홍보한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책탈고가 허위였다는 사실은 5월 25일 ‘아리조나 리퍼블릭(Arizona Republic)’의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이 신문은 ‘이토 저격자 처형’이라는 기사에서 “안중근은 15일의 관대한 유예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3월 25일 다음날 처형됐다”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가 기실 보름의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것이 거부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어진 사형집행 전날의 풍경은 애달프다. “별도의 방에서 그는 형제들을 만나 포옹하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은 곧 무릎을 꿇고 20분간 기도를 했다. (안중근 의사는) 두 형제의 얼굴을 보면서 손을 잡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안중근의사 사형집행 생생보도 싱가포르 영자신문

    안중근 의사의 처형 전후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듯 누구보다 생생하게 전한 매체가 있다. 싱가포르의 영자지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다. 스트레이츠는 4월 14일 7면 기사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촌이 가져온 수의를 입고 마지막 당부한 말, 참석한 일본관계자들 이름, 하얼빈의거를 같이 감행한 우덕순 등 동지들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두 형제의 시신인수 요청을 교도소가 거절하고 매장한 내용들을 상세히 전해 주목된다.

    ‘이토백작의 저격’, ‘안중근(An Ju Kon) 포트 아서에서 사형집행’ 두 줄의 제목을 단 기사는 “지정된 시간 사형집행장에 당도한 그는 사촌인 안명근이 가져온 한국산 명주로 된 흰색의 새 옷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창백해보였지만 충분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듯 했다”고 묘사했다.

    사형집행장에는 미조부치 검찰관과 구리하라 교도소장, 통역을 맡은 소노키 등 관계자들이 자리했다. 교도소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하고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전할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때 안중근 의사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남기고 갈 말은 없다. 다만 여기 와 있는 일본 관리들이 마지막까지 동양의 평화를 위해 힘껏 노력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해 숙연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그가 마지막 기도를 올린 후 올가미는 씌워졌다. 신문은 “교수형 집행이 되고 의사 검시후 시신이 안치된 관은 교도소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조도선과 우덕순 유동하 등 함께 거사를 결행한 3인의 동지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우덕순은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고 전했다.

    이어 “유해는 오후 1시에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안중근의 두 형제(정근 공근)는 교도소장에게 시신을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됐다”고 덧붙였다.

    기사에 따르면 사형 집행부터 매장까지 채 3시간도 안걸린 셈이다. ‘시신이 밤에 황급히 묻혀졌다’는 일설과 달리 정상적인 경로로 교도소에 인접한 공동묘지에 매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형제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의 정확한 매장 기록이 없고 오랜 세월속에 홍수로 인한 유실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2000년대 이후 유해발굴 작업은 아직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서울 효창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빈묘(虛墓)가 있다. 해방후 백범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묘를 만들며 언젠가 유해를 봉환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 둔 것이다.

    마침내 유해가 봉환된다면, 필경 그 날은 의사의 유지대로 한일 양국이 화합하여 동양평화를 일구고 나아가 오대주에도 모범이 되는 날이지 않을까.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전한 1910년 4월14일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 기사 전문을 소개한다.

    “이토백작의 저격”
    ‘안중근 포트 아서에서 사형집행’

    이토 백작을 저격한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지 꼭 5개월만인 3월 26일 오전 10시 포트 아서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지정된 시간 사형집행장에 당도했다. 새 한복을 입은 그는 사촌인 안명근이 가져온 한국산 명주로 된 흰색의 새 옷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보였지만 충분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듯 했다.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교도소장, 소노키 통역 등 관계자들이 자리했다. 교도소장은 사형집행문을 낭독하고 안중근에게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전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남기고 갈 말은 없다면서 여기 와 있는 일본 관리들이 마지막까지 동양의 평화를 위해 힘껏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 기도를 하도록 허락됐을 때 잠시 나지막히 기도를 했다. 올가미가 그의 목에 걸렸고 사형이 집행됐다. 15분이 지나 검시의사가 확인한후 시신은 교도소측이 준비한 관에 입관됐다. 관은 교도소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조도선과 우덕순 유동하 등 함께 거사를 결행한 3인의 동지들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도록 허용됐다. 우덕순은 아주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유해는 오후 1시에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안중근의 두 형제(정근, 공근)는 교도소장에게 유해를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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