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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엄앵란이었고…김지미, 오드리 헵번이었다
KBS 1기 성우 고은정씨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5/02/1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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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그는 엄앵란이었고 … 김지미, 오드리 헵번이었다


[중앙일보] 이 기사는 2015-02-11 오전 00:01: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KBS 1기 성우 고은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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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지금껏 숱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해온 영화 대사다. 원작은 신성일·안인숙 주연의 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작)이다. 이 장면의 백미는 남자 배우의 한껏 힘이 들어간 느끼한 목소리와 여자 배우의 꾀꼬리 같은 미성이다. 영화 화면을 가득 채운 두 주연 배우는 정작 이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다. 이때 영화는 배우의 표정과 행동만 찍어 편집한 ‘벙어리 필름’에 성우가 목소리를 입혀야 비로소 완성됐다. 무대 위 스타는 배우였지만, 목소리 연기의 주역은 성우였다. 당시 남심을 녹인 ‘경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우 고은정(79)씨다. 60~70년대까지 최고 인기 여배우 목소리는 죄다 그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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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희빈’(1961년작)의 히로인 김지미를 포함해 60년대 청춘스타 엄앵란, 여배우 트로이카 1세대라 불렸던 남정임·문희·윤정희까지 영화에선 고씨의 목소리를 빌렸다. 외국 배우도 예외가 아니다. TV에 방영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애수’의 비비안리,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도 고씨였다.1954년 KBS 공채 1기로 성우의 세계에 발을 디뎌 지금껏 라디오 드라마 1000여 편과 한국 영화, 외화에까지 숨결을 불어넣어온 고씨의 지난 60년 여정은 한국 방송의 역사였다.

“강습(연수) 때 대체 뭐 들었어!”

55년 3월 1일, 첫 생방송을 마치고 녹음실 문을 열자마자 고씨의 귓전을 때린 건 칭찬이 아니라 방송 엔지니어의 성난 외침이었다. “요즘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TV에서 특집 드라마를 하듯, 50년대엔 라디오에서 시를 낭송하는 게 국경일 특집 방송이었어요. 성우 연수 직후 삼일절 특집을 맡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사고를 친 거죠.”

고씨가 낭독한 작품은 선동적인 애국시였다. “시를 보니까 감정이 격앙되는 거예요. 사실 라디오 보급률도 얼마 안 될 때였는데 스무 살이었던 당시 내 생각엔 전 국민이 이 시를 들을 것만 같았죠. 흥분해서 연극 투로 감정을 넣어가며 격하게 낭독했는데 글쎄, 마이크가 그 소리를 감당 못하고 고장이 나버렸지 뭐야.” 마이크 내부에 있던 울림판 2장이 붙어버려서 생긴 사고였다. 당시 마이크 성능은 그 정도였다.

신인의 열정과 패기에 의한 해프닝으로 볼 만도 한데 고씨는 이 실수로 방송 일이 뚝 끊겨버렸다. “54년 KBS 공채 1기생으로 뽑힌 성우가 나 포함해 스무 명 남짓이었어요. 다른 동기들은 단역이라도 하는데 난 ‘사고 친 애’로 찍혀서 통 배역이 안 들어오더라고요.” 대기실에 얌전히 앉아있기라도 했다면 배역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는 학교 생활과 성우 일을 병행하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땐 ‘난 준비가 돼 있는데, 왜 기회가 안 오나’라고 불평도 많이 했었죠.”

라디오 드라마를 하고 싶었던 고씨는 이 시간을 연습에 쏟았다.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할머니로 나오셨던 고 정애란씨나 배우 고 황정순씨, 고 최무룡씨가 성우로 활동하던 때였어요. 이분들이 쓰고 버린 드라마 대본을 쓰레기통에서 주워다 집에 가져가서 이불 뒤집어 쓰고 밤새 읽고 또 읽었어요.” 대본을 읽을 땐 모든 배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며 읽었다. “주인공 역할을 포함해서 드라마 속 모든 배역을 진지하게 연기하며 읽었어요. 이 연습을 거의 1년 정도 했어요.”

어느 순간 변화가 느껴졌다. 고씨는 “귀가 트인 것”이라 표현했다. “처음엔 아무리 다르게 하려고 해도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 똑같았거든요. 그런데 연습을 하다보니 귀가 열리면서 내 소리결의 차이가 감지되더라고요.” 그 시절 터득한 노하우는 더 있다. “연기를 제대로 하려면 글을 보고 읽는 것만으론 안돼요. 내 머릿속에 이 드라마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담겨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됐죠.”

1957년 한국 최초의 일일극 ‘산 넘어 바다 건너’ 출연

1957년 라디오 드라마 ‘산 넘어 바다 건너’ 녹음실 모습. 고씨는 ‘미라’ 역을 맡아 ‘백만불짜리 연기’라는 호평을 받으며 스타 성우가 됐다.
기회가 찾아왔다. 56년 젊은 남녀의 사랑을 다룬 라디오 멜로드라마 ‘청실홍실’에서 호연을 펼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스타덤에 오른 건 우리나라 최초의 일일극인 ‘산 넘어 바다 건너’(1957년)란 작품에서다. “30대의 농염한 여인 ‘미라’ 역할이었어요. 중국 상하이에서 돌아온 여자로 직업도 살롱 마담이었다니까요.”

스물한 살에 불과했던 고씨에게 이 역할을 맡기기 불안했던 극작가 조남사씨는 “미스 고가 미라를 할 수 있을까?”라며 미심쩍어했다. 고씨는 “겉으론 ‘한번 해 볼게요’라고 말꼬릴 흐렸지만, 속으론 자신있었지. 그냥 느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수준이 아니라, 확실하게 미라를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고 회상했다.

드라마 첫 녹음 연습날부터 대박 조짐이 보였다. 상대 배우였던 윤일봉씨가 “누이, 오래간만이오”라고 대사를 한 뒤에, 고씨가 목소리 쫙 깔고 “그래, 어서 오너라”고 답을 했더니 대본 보던 성우들이 눈이 동그래져서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야?”라고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전파를 탄 직후부터 신문 기사에는 연일 고씨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백만불짜리 연기’ ‘산 넘어 바다 건너의 수확은 미라뿐’ 등 스타 탄생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앞다퉈 쏟아냈다.

국민 스타로 자리매김한 건 ‘장희빈’(1959년)을 통해서였다. 지금이야 장희빈이 영화며 드라마에 자주 등장해, 거듭 우려내는 사골국만큼이나 식상한 소재가 됐지만 당시 그 드라마는 장희빈을 극화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드라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씨도 “전무후무한 인기였다”고 표현했다. “올 1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 근령씨가 전하기를 고 육영수 여사가 밤낮 장희빈 틀어놓고 들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라디오에서 ‘장희빈’이 나올 시간이면 여자 목욕탕에서 사람이 쫙 빠져 나가고, 거리에 사람이 텅텅 빌 정도였어요.”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장희빈’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였던 김지미가 주연을, 고씨가 더빙을 맡았다. “지미가 연기를 정말 잘했어요. 배우가 연기를 잘해놓으면 더빙하기가 무척 쉽거든요. 아주 깜짝하고 앙칼지고 요염하기도 한 모습을 다채롭게 표현해서 더빙하면서도 흐뭇했죠.”

영화 ‘동심초’로 엄앵란과 인연

69년 녹음실에서 기념촬영.
최고의 인기 작품에서 주인공을 도맡았던 고씨지만, 연기 인생에 획을 그은 작품으로는 ‘동심초’(1959년작)를 꼽았다. “매번 농염하고 성숙한 여인 역할을 하다가 이 작품에서 내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열아홉 살 풋풋한 여대생 경희 역할을 처음 맡았어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의욕을 갖고 시작했지만, 대본 연습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선배의 말투를 따라한 게 문제였다. 당시 성우들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는 옥희의 말투처럼 또박또박 억양을 강조하며 발음하는 게 대세였다. ‘동심초’의 연출을 맡은 이보라 PD는 고씨의 대사를 가만히 듣더니 “커피나 한잔 하자”며 다방으로 데려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 갔지. PD 양반도 다방에선 연기 얘긴 안 하고 자꾸 딴 얘길해. 근데 가만 보니, 거기 레지(다방 종업원)가 아주 어려요. 머리를 하나로 야무지게 묶고 맨발에 굽 높은 샌들 신고 살랑살랑 다니면서 ‘어써 오쎄여(어서 오세요)~’ ‘안냐이 가쎼여(안녕히 가세요)~’ 이러는 데 아주 방울처럼 예뻐요. 아, 이걸 보라는 거구나 싶었죠.”

다시 대본 연습에 들어가선 “어머니, 다녀왔어요”가 아니라 “어므니, 다녀 와쎄여~”라 대사하자, 이 PD는 “그거야. 진짜 열아홉 여대생의 소릴 내라고”라며 무릎을 쳤다. “그때 터득한 거예요. 말이란 건 사람마다 세대마다 다르단 걸요. 성우는 그냥 목소리 예쁜 사람,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의 말을 담아내는 감각이 있어야 해요.”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작품인 ‘동심초’가 스크린으로 옮겨지자, 제작진에게 “경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벙어리 영화’ 상태인 ‘동심초’를 봤는데, 경희 역할을 한 엄앵란의 모습이 내가 라디오 드라마에서 생각한 그림과 너무 흡사하더라고요. 그 역할을 꼭 해야겠단 생각을 했죠.”

이 영화를 시작으로 엄앵란이 출연한 영화의 99%를 고씨가 도맡게 됐다. ‘성우 고은정=배우 엄앵란’이라는 공식도 이때 만들어졌다. “앵란이 어머니 노재신 여사가 배우 출신인데, 감각이 탁월했어요. ‘내 딸 목소리는 고은정 아니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죠. 그때 다른 배우들은 성우에 거의 신경을 안 썼거든요. 같은 배우를 여러 성우가 맡다보면 관객들도 좀 어색하게 느끼죠. 지금으로 치면 앵란이는 배우의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케이스라 볼 수 있어요.”

“성우는 죽은 화면에 생명을 불어넣는 직업”

71년 TBC 라디오 드라마 ‘달래’를 녹음할 때 모습.
라디오 드라마에서의 연기와 영화 더빙의 차이점은 뭘까. 고씨는 “라디오 연기는 하얀 도화지에 내 마음껏 창작의 날개를 펼 수 있다면, 영화 더빙은 배우의 연기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배우 중에 화면에 잘 나오려고 슬픈 장면에서도 찡그리지 않고 예쁘게만 우는 이들이 있어요. 스토리 상으로는 분명히 가슴이 찢어지게 울어야 하거든. 그럼 난 녹음할 때 배우 얼굴이 나오면 절제한 듯 흑흑 흐느끼다가 배우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지면 그때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면서 아프게 울어주고, 다시 배우 얼굴 잡히면 감정을 추스르는 것처럼 표현하고 이랬죠.”

원로 방송인 송해가 고씨의 더빙 모습을 목격하고 혀를 내둘렀단 일화도 유명하다. 배우 윤정희가 출연한 영화를 더빙할 때의 일이다. 극중 시골처녀로 분한 윤정희가 인민군들에게 끌려가 헛간에서 겁탈을 당하는 장면을 고씨가 더빙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영화에선 겁탈당하는 장면은 찍을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화면엔 그냥 헛간 문만 한참 보여주는 게 다였다. “내가 헛간 문을 쳐다보면서 처음엔 소리를 지르며 반항을 했다가 고통을 당하다가 지쳐서 울기도 하는 그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을 해내더랍니다. 송해씨는 그때 그 모습에 너무 놀랐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시더군요.” 성우는 ‘죽은 화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라고들 하는데 그에 딱 들어 맞는 사례다. 고씨는 “솔직히 난 기억이 안 나요. 송해씨가 봤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라며 웃었다.

첫째 낳고 12일 만에, 셋째 땐 진통 참으며 녹음

연년생으로 낳은 네 아이와 고은정씨 부부.
여성이 직장을 다니는 것도 흔치 않던 50년대, 게다가 방송이라는 색다른 일을 하는 게 결코 쉽진 않았다. 고씨는 “내가 생각해도 두 번은 못할 일”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씨는 59년 12월에 결혼해 60년부터 연년생으로 네 아이를 낳았다. 이 시기가 성우로 엄청난 주목을 받던 때라 아이를 한 명도 편하게 낳은 적이 없다.

첫아이 낳곤 12일 만에 나와서 엄앵란의 목소리를 더빙해야 했다. 7월 중복 무렵에 아이 낳고 8월 말복 한더위에 녹음을 하는데, 담배 연기에 먼지까지 자욱한 녹음실에 새벽까지 녹음을 하다보니 온몸에 땀띠와 두드러기가 올라와 사경을 헤맬 지경이 됐다.

셋째 임신하고 해산을 닷새 앞둔 날, 제작사 사람들이 “내일 당장 극장에 내걸어야 하는 데 추가 상영분이 생겼다”며 “제발 녹음 좀 해달라”고 찾아왔다. “이 사람들한텐 생명 같은 작품인데 안 해줄 수가 없잖아요. 결국 친정 어머니가 해산 준비 다해서 방송국 휴게실에 대기하고 있고, 난 녹음실에서 진통이 멎는 중간중간에 더빙을 해서 마무리해줬죠.”

고열에 시달려 불덩이 같은 몸을 이끌고도 일이 밀려 있으니 녹음실에 나가야 했다. 몸이 힘든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세간의 입방아였다. “남들 눈엔 독하고 극성맞은 걸로 보였겠죠. 솔직하게 말해볼까요. 부귀영화 누리겠다고 저처럼 일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 순간 내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하려다보니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도 내가 뭔가에 홀린 것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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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성우의 역할 더 필요할 때”

팔순을 앞둔 고씨는 여전히 현역 성우다. 극동방송에서 매주 월~금요일 ‘연속낭독’이라는 코너를 12년째 진행하고 있다. 혼자 마이크 앞에 앉아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라디오 드라마, 한국 영화, TV 외화 더빙까지 한국 방송에서 성우의 전성기를 이끌어온 고씨는 “지금이 오히려 성우의 역할이 더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우리 방송이 세계적으로 재미있다고 하잖아요. 한류 이야기도 많이 하고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같이 손잡고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문법은 죄다 틀리고 어휘도 품격을 잃어가고. 나쁜 말은 보이지 않는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사회 곳곳에 퍼지는 데, 가만 보고 있기 두려울 정도예요.”

그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말을 구사하는 성우의 역할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방송가에 성우가 설 땅이 좁아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올바른 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하는 데 성우들이 앞장을 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SNS 등을 통해서 정말 좋은 라디오 드라마도 부활시키고요.”

글=박형수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박형수 기자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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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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