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 드러낸 천년 王城… 30cm 팠을뿐인데 토기-기와 쏟아져
김상운 기자
입력
2015-03-19 03:00:00 수정
2015-03-19 06:01:25국립경주문화재硏 월성터 시굴 현장
흙구덩이 곳곳에 주춧돌 드러나… 건물터 6곳 담장터 12곳 발견
길이 28m 폭 7.1m 대형 회랑터… 신라 왕궁이 있었던 사실 뒷받침
▲ 18일 문화재청 산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주 월성 시굴 현장에서 공개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토기와 고배, 벼루, 뚜껑들. 이번에 함께 출토된 각종 기와와 더불어 이곳이 신라시대 천년 왕성이었음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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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파사왕 22년(101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고 불렀다. 그 둘레가 1023보(약 1.9km)에 달했다.’ (삼국사기) ‘왕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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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으로만 전하던 천년 왕성(王城)의 역사가 우리 앞에 처음 속살을 드러냈다. 18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경주 월성 시굴(試掘) 현장은 30cm 깊이로 파헤친 흙구덩이 사이로 1000년 전 주춧돌(초석·礎石)과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기초 부분)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 시작된 시굴을 통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기의 건물터 6곳과 담장터 12곳, 기와, 그릇, 등잔, 벼루 등을 발견했다.
본격 발굴에 앞서 ‘트렌치(시굴갱)’라는 얕은 갱도만 파는 단계인 만큼 관심이 쏠리는 정전(正殿) 등 핵심 전각(殿閣)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터 내 주춧돌이나 기단 대부분은 한눈에 봐도 거의 다듬지 않은 원석 상태였다. 5호 건물지에서만 동그란 주춧돌과 기다란 장대석 기단이 발견됐다. 함께 현장을 둘러본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왕궁의 전각에는 잘 다듬은 주춧돌과 장대석 기단이 들어가기 마련”이라며 “토층을 더 깊게 파야 전각 터가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발굴팀은 8년 전 지하 레이더 탐사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시굴이 진행된 석빙고 부근에 정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더 서쪽지역에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발굴팀 관계자는 “통일신라 이후 왕경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각의 중심축이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월성 시굴과정에서 발견된 건물터 6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호 건물지.
이와 관련해 길이 28m, 폭 7.1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3호 건물지)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적심 사이의 거리도 2m나 된다. 근처에서는 이 건물터와 평행선을 그리는 담장과 ‘ㄱ’자 모양의 배수로도 함께 발견됐다. 전체적으로 한 변이 훨씬 길쭉한 모양을 감안할 때 ‘회랑(回廊)’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박윤정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서민 주거지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회랑형 건물터는 이곳이 왕궁이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했다.
신라와 가야에서 제사용으로 쓰인 고배(高杯·굽다리 접시)를 비롯해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 등 신라시대 유물도 함께 출토됐다. 특히 일부 평기와에는 ‘習部(습부)’나 ‘漢(한)’과 같은 왕경을 구성한 6부(部)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마립간 시대 이전 신라 6부의 부족장은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기와에서는 제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의봉사년(儀鳳四年·서기 679년) 개토(皆土)’라고 적힌 명문도 함께 발견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거쳐 다음 달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갈 예정이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94년 만에 신라 왕릉 5기 재발굴, 새로운 유물 출토될까?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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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왕릉 5기 재발굴. 사진 = 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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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 5기 재발굴
94년 만에 신라 왕릉 5기 재발굴이 이루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은 9일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유물·기록물이 너무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라 올해부터 다시 발굴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는 3년에 걸쳐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 출토물 외에 새로운 유물이 나올지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경주 도심에 있는 큰 무덤은 155기까지 일련 번호가 매겨져 있지만 실제로는 200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1921년 노서동 한 민가에서 구슬을 주웠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금관총 발굴 조사에 착수했다. 금관이 최초로 발견됐다고 해서 금관총으로 명명됐다.
1924년에는 금관총 동쪽에 인접한 무덤을 조사했는데 또다시 금관이 나왔다. 보물 383호로 지정된 금관이다. 무덤에서 금방울(金鈴ㆍ금령)이 출토됐다고 해서 금령총이 됐다. 부장품 크기가 작아 요절한 왕자 무덤으로 해석한다. 금관은 이어 서봉총에서도 수습된다. 보물 339호다. 칼과 관모 대신 여성용 귀고리와 허리띠 장식이 나왔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1970년대 실시한 천마총과 황남대총 조사도 지금 관점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은데 3개 무덤은 발굴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라며 “당시 발굴 기술이 낙후돼 시신을 모셨던 목곽 안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대충 조사했다”고 밝혔다.
신라 왕릉 5기 재발굴. 사진 = 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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