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은 , 자신과 다른 민족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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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의 원(元) 황궁 터는 바로 자금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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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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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
2016/06/10 [0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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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의 원(元) 황궁 터는 바로 자금성"
송고시간 | 2016/06/09 16:25
(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 세계를 호령하던 원(元) 대제국을 '통치'했던 쿠빌라이 칸(1215∼1294년)의 황궁 터가 어디였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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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기록을 보면 14세기 쿠빌라이를 이은 마지막 지배자 토곤테무르 칸 시기에 내분이 일어난 상황에서 명나라 세력의 공격을 받아 베이징에 있던 원나라 황궁이 사라졌다고 쓰여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명나라 군인들이 원나라 황궁 터를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짓밟았고, 자금성을 짓기 위해 원나라 황궁을 헐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자금성은 명나라 시기인 1천406년 건설이 시작돼 14년간 공사 끝에 완성됐다. 명에 이어 청나라 때까지 황궁으로 사용됐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원나라 전성기의 쿠빌라이 칸이 거주했던 황궁 터가 현재 베이징(北京)의 자금성(紫禁城)일 것으로 추정됐다고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9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자금성 터의 지하 전기·소방 시설을 개선하는 공사 과정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자금성 터 아래 지층이 원나라 황궁 터인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해당 지층을 대상으로 고고학적인 시기를 조사한 결과, 명나라 시기 조성된 터 아랫부분이 원나라 때 다진 황궁 터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베이징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왕광야오(王光堯) 부원장은 "고궁(자금성) 중앙의 서쪽 부분의 지층이 원나라 시기의 수도 4곳 가운데 하나인 허베이(河北) 성 장자커우(張家口) 소재 중두(中都) 유적과 같은 양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고고학자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로 볼 때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황궁 터가 자금성과 동일한 장소일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완전히 겹친다고 하기에는 아직 섣부르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고 SCMP는 전했다.
왕 부원장은 "적어도 현재 알 수 있는 것은 쿠빌라이 칸의 황궁 터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자금성)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우구데이, 그 아들 구육, 넷째 아들인 톨루이의 맏아들 뭉케에 이어 다섯 번째로 권좌에 올라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이라고 정했다. 이전이 몽골 제국이었다면, 원이라는 공식적인 국호가 쓰인 것은 쿠빌라이 칸 때부터다.
명나라 시기 건축된 자금성 지층에서 원나라 황궁 터 지층 확인하는 모습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캡처 사진)
동아시아·중앙아시아 전문가인 모리스 로사비의 저서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을 보면,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의 둘째로 태어난 출생 배경 탓에 처음부터 권력의 핵심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기다림·포용·소통·통합의 리더십으로 몽골제국 전성기를 이뤘다.
쿠빌라이 칸은 자신과 다른 민족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았다. 통치에 도움이 된다면 몽골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인, 중국인, 위구르인, 티베트인 등을 모두 기용했다. 소통 시스템을 마련해 참모들의 거슬린 소리도 처벌하지 않는 등 민족, 종교, 지역을 뛰어넘는 포용과 통합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런 기조는 몽골 제국 최고의 경제부흥은 물론 군사적인 강성대국을 이끌었다. 칭기즈 칸이 유라시아를 '정복했다'면 쿠빌라이 칸은 유라시아를 '다스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의 '빛나는' 제국 통치는 중국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사실 한(漢)족 중심인 중국에선 이민족인 몽골족이 주축인 원나라의 역사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며, 원나라 황궁 터에 대한 고증이 미진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연합뉴스 자료
kjihn@yna.co.kr<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6/09 16:2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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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개황
쿠빌라이 칸[ Khubilai khan ]
쿠빌라이
지역 |
아시아 > 몽골 |
분야 |
역사 |
출생 - 사망 |
1215년 ~ 1294년 | 1215년 칭기즈칸의 손자(4남 톨루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쿠빌라이는 어려서는 별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1251년이 될 때까지 톨루이 가문이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었고, 쿠빌라이는 톨루이 가문에서도 둘째 아들이라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소르각타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이 훗날 그가 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중국을 다스리는 데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1259년 형 뭉케가 남송원정 도중에 사망하자 모든 이목이 쿠빌라이에게 집중된다. 칸으로 즉위함에 있어 막내동생인 아릭베케와 대립하게 된다. 1260년, 쿠빌라이는 상도에서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제5대 대칸에 오르게 된다. 아릭베케는 몽골에서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언하는데 킵차크, 어거데이, 차가타이칸국이 아릭베케의 편에 서고 훌레구가 이끄는 일한국은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릭베케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북경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 칭하였다. 대원제국 수립 후 내적으로는 아릭베케의 잔당인 하이두(어거데이의 손자)와 도와(차가타이의 손자)의 반란으로 인해 30여 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났다. 쿠빌라이가 실시한 주요 외정으로는 고려, 동남아시아, 일본 정복이 있다. 쿠빌라이의 만년은 만주에서 티베트, 중앙아시아까지 제국 각지에서의 잇따른 반란과 끝날 줄 모르는 통치권 도전으로 시끄러웠다. 게다가 의지했던 황후 차비가 1281년에 죽고, 그녀가 낳은 황태자 친킨 역시 1285년에 병사하자 쿠빌라이는 인간적인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후 10년 동안 정치 업무를 새 황후인 남비에게 일임하고 폭음과 폭식을 거듭했다. 그 결과 급속도로 건강을 해친 그는 1294년 사망하고 친킨의 아들인 테무르가 대를 이었다.
- 출처
- 몽골 개황, 2011. 8., 외교부 표제어 전체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쿠빌라이 칸 [Khubilai khan] (몽골 개황, 2011. 8.,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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