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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앞세운 북 '고조선평양설'은...“고고학 자료 모두 고조선과 억지연관
"북한의 선전나팔, 역사 (1) 고조선과 단군릉... 정치적으로 이용된 단군... 통일부대학생기자단 /톡톡바가지
 
한겨레 기사입력 :  2016/08/2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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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앞세운 북 '고조선평양설'은 또 다른 '국뽕'
한겨레| 입력 16.08.25. 20:06 (수정 16.08.25. 20:16)

[한겨레]‘고난의 행군’ 시기 애국심 고취 목적
“고고학 자료 모두 고조선과 억지연관”
한국고고학회 ‘북한 학계 동향’ 발표문

북한은 1993년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예전부터 있던 고구려식 석실분을 발굴해 단군과 그 부인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뒤 이 무덤에서 200m 위쪽에 높이 22m, 한 변 50m 크기의 거대한 규모로 단군릉을 개축하고, ‘고조선평양설’의 근거로 삼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북한은 1993년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예전부터 있던 고구려식 석실분을 발굴해 단군과 그 부인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뒤 이 무덤에서 200m 위쪽에 높이 22m, 한 변 50m 크기의 거대한 규모로 단군릉을 개축하고, ‘고조선평양설’의 근거로 삼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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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낙랑의 위치를 둘러싸고 남한 학계가 안팎으로 소란스런 지금, 북한 쪽 논의는 어떨까?

그런 궁금함을 해소해주는 논문이 최근 한국고고학회 학술회의에서 공개됐다. ‘통일고고학을 위한 연구현황과 과제 진단’을 주제로 23일 서울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북한학계 고조선 및 낙랑 고고학의 최근 연구동향’이란 발표문을 통해 북한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현주소를 잘 정리해 보여주었다.

북한 학계는 ‘고조선평양설’을 확고한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북한의 리주현·한은숙이 엮은 <조선고고학총서 1 총론>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북한 고고학계는 대동강 유역 일대에서 발굴된 노예순장 무덤, 고대 성곽들, 대규모 부락 유적, 1만4천여기의 고인돌과 돌관무덤 등을 근거로 “대동강 류역이 바로 고조선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동강 류역에서 기원하여 고대 문명을 빛내인 고대 문화를 ‘대동강문화’로 명명, 1998년 10월2일 ‘대동강문화’의 학술발표회를 실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요컨대 고조선의 중심은 처음부터 평양이었고, 나중에 후기 고조선을 거쳐 기존의 낙랑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90년대 이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 북한 학계의 정설은 고조선평양설이 아니라 그 반대인 ‘고조선요동설’이었다. 해방 이후 도유호(1905~1982) 등 일군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도읍지와 한군현 낙랑이 순차적으로 평양에 실재했었다는 ‘왕검성·낙랑군 평양설’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오랜 논쟁 끝에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고고학적 발굴·연구 성과라서 모두 날조된 것이라며 이 학설을 폐기했다. 또 70년대 이후엔 평양 지역에서 발견된 한대 병행기 유적과 출토 유물이 중국 중원 지역의 유물과는 다르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고조선요동설의 방증으로 삼았다.

그러다 단군릉을 발굴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93년 1월8일)를 시발점으로 고조선요동설은 단번에 폐기된다. “단군릉을 기원전 3000년기로 인정하며, 이와 동시에 거의 모든 고고 자료들을 초기 고조선과 관련시켜 설명하기 시작한다.” 정 교수는 그 배경을 절체절명의 체제 위기였던 ‘고난의 행군’에서 찾았다. 북한 정권의 정통성 강조와 애국 의식 고취를 위한 ‘북한판 국뽕’은 단군릉 발굴을 기점으로 ‘고조선평양설’ 재정립에 이어 ‘대동강문화론’(1998년)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98년은 북한 정권수립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북한 학자 류병흥이 1995년 발표한 논고 ‘단군 및 고조선 시기의 유적유물 발굴 성과에 대하여’는 북한 고고학계가 걸어갈 길을 앞장서 제시했다. 그는 “단군릉이 평양 주위에 위치한다는 점”이야말로 고조선평양설의 고고학적 증거라고 언명했다. 이어 고인돌, 토성, 회색토기, 비파형 동검과 동모 등도 모두 고조선의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가령 강동군 순창리 석관묘에서 발굴된 금동귀걸이가 기원전 25~23세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언’만 있을 뿐 ‘증거’는 없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서창성’, ‘마고성’, ‘룡산리성’ 등 새로 발견된 토성 조사보고가 이어졌는데, 그 ‘의도’는 2013년 최승택이 그간 조사된 서북조선 일대 토성 자료를 집대성한 논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성곽이 반드시 출현하며, 그것이 (고대 국가의) 정치·경제의 중심이고 나아가 지역 거점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설이다”라고 언급한 대목에서다. 고조선평양설을 뒷받침할 근거로 토성을 동원했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견돼 낙랑·대방군과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토성도 그 상한을 모조리 청동기 시대까지 올려, 고조선의 것으로 ‘정리’했다. 그뿐 아니라 성철 같은 학자는 ‘화분형 토기’를 고조선 고유의 것으로 설명(2005년)하고 있으나, 이 역시 일방적인 선언에 가깝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그럼에도 북한 학계에선 “(과거) ‘고조선·한4군 요동설’이 일반론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보여준 격렬한 토론과 연구자간 논쟁”이 사라졌고, 단지 “고조선평양설을 입증할 나름의 근거 발굴에만 몰두할 뿐”이라고 한다.

정 교수는 발표문 말미에서 “낙랑군평양설을 부정하는 북한 학계의 주장을 여과 없이 신용하여 국내 학계의 고조선평양설을 공격하거나, 낙랑군평양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을 식민사학자로 매도하는 일부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며 이른바 ‘유사역사학자’들 일부를 겨냥하기도 했다.

이어 토론에 나선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고조선평양설을 채택하고서도 낙랑군평양설은 부정할 수밖에 없는 북한 학계의 현실을 딜레마로 설명했다. 고조선평양설을 채택하면 낙랑군의 위치 또한 평양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 민족성지인 평양이 한 제국이라는 외세의 지배를 받은 것이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평양 일대에 고조선의 후국 또는 낙랑국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북한 학계가 펴고 있다는 것이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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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전나팔, 역사 (1) 고조선과 단군릉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는 ‘사실로서의 역사’를 주장했다. 특히 1824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 1494~1514(Geschicthe der romaenischen und germanschen Voelker von 1494 bis 1514)』의 서문에 적힌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Wie es eigentlich gewesen)을 다루고자 했다.”는 글귀는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는 현대 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그는 역사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랑케가 주장했던 실증주의 사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주체사상을 확립한 이후부터 역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문을 체제 선전 및 선동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랑케가 그토록 경계하던 모습이다.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는 구시대적 방식의 연구방법이 현재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 연구에서 북한이 추구하는 바는 북한 정치체제의 정당성과 정통성이다. 북한 역사학계는 북한이 한민족의 정통 정부라고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에 본 기사에서는 여러 회에 걸쳐 고조선과 단군릉, 고려 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고조선의 중심지
고조선은 남북한 모두 인정하는 한민족 최초의 국가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북부와 만주 일대에 존재했고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국가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중심지 및 영역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민족의 뿌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시작되었던 구한말부터 현재까지도,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고, 기자의 학문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떠한 학설이 정답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다. 이에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학설들을 소개하며 글을 시작해보겠다.
흔히 고조선의 세력범위, 혹은 문화범위를 추측하게 해주는 유물은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가 있으며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존의 사서 및 평양지역에 남은 다수의 설화 등을 근거로 평양에 고조선의 수도가 존재했다는 평양 중심설이 주를 이루었다.

해방 이후에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 북방식 고인돌 등의 주 출토지역을 통해 고조선의 영역을 추측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유물들은 문화적 영역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영역을 비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이에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의 문화범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남아있는 문헌 기록 중 『위략』에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기원전 4세기 중국의 전국시대 연나라와 대립하던 기록이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 乃止。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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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은 다음과 같다.

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하지만)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을 설득하게 하여, 연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에 조선이 약해졌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조선이 전국 7웅이라 불리는 연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점, 만주지역에 존재했다는 점, 대부 같은 관직을 따로 두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이 기록과 함께 등장했던 학설이 중심지 이동설이다. 비파형 동검 등 유물의 출토 범위가 한반도 서북부와 만주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반면 세형동검은 청천강 이남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이는 연나라의 장수 진개의 공격으로 서방 영토를 잃은 고조선이 크게 후퇴하여 기존의 중심지인 요령에서 벗어나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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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 어떻게 주장하고 있을까. 북한에서는 1960년대 이후 사료에 대한 연구나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에 존재했다는 재요령설을 주장했다. 물론 북한에서도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재요령설 뿐만 아니라 평양 중심설, 이동설 모두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1993년 단군릉이 등장하면서, 북한 학계는 확고한 평양 중심설로 선회한다. 과연 단군릉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평양 중심설이 북한의 공식적 입장이 된 것인지, 이제부터 알아보자.


단군릉의 개건

북한이 주장하는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위치한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이다. 다만 이 단군릉은 김일성의 지시로 개건된 것이다. 단군릉의 존재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순종실록』 권 3, 순종 2년 1월 31일 기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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詔曰: "東方首出之聖, 廟貌有侐。 崇靈殿, 遣平安南道觀察使致祭。 聞衣履之藏, 在江東地, 至今指點謂檀君陵, 而無沒不治, 殊欠崇奉之禮。 其自今封植守護之節, 磨鍊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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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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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을 내려 발표하길, 동방에서 처음으로 성인이 나타났는데 묘의 모습이 고요하다. 숭령전에 평안남도 관찰사를 보내 제를 지내게 하라. 듣자하니 의복과 신발이 강동 땅에 있고 지금 그것을 가리켜 단군릉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관리되지 않고 거두어지지 않았다하니, 높이 받드는 예가 없다. 이제 관리하고 지키는 절차를 만들어 거행하라.



단군릉 자체는 평양 강동에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한국통사』,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사』에도 등장하며, 1932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단군릉 수축기성회 발기 기사가 실려, 북한에서 개건한 1993년 이전에도 단군릉에 대한 인식은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역사왜곡이 문제가 되는 것은 1993년 이후이다. 북한은 1993년 9월 28일 「단군의 유골과 유물」 발굴을 발표한 데 이어 10월 2일에는 「단군릉 발굴」 보도를, 그리고 10월 12일에는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단군의 유골과 유물 발굴보고」.「단군릉 발굴보고」.「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의 주요골자는 『단군과 고조선은 실재했으며 고조선의 수도는 평양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선전매체들과 역사학자들은 평양을 『조선민족의 발상지이며 우리민족의 국가형성과 발전의 중심지였다』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등장한 단군의 유골을 잠시 짚고 넘어가자. 북한은 전술한 단군릉 발굴보고를 통해 단군릉 지역에서 두 사람분의 유골 86개가 발견되었는데 감정 결과 남녀 한 쌍의 유골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남자의 유골을 ‘전자상자성공명법’을 통해 2개의 전문기관에서 각각 24회, 30회씩 측정한 결과 그 연대가 정확히 5011년 전의 실존인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자상자성공명법에는 오차가 존재하고 항상 같은 연도를 결코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무려 총합 54회의 결과에서 정확히 5011년이라는 연대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 오히려 조작의 증거라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북한은 이 단군 유골 발견의 발표와 함께 1994년 10월 11일, 기존에 있던 단군릉을 '개건'하게 된다. 화강암으로 된 거대한 피라미드를 축조하게 되는데 18층 건물에 해당하는 70m 높이에 아랫부분은 한 변이 50m, 높이는 22m인 9층의 계단식 무덤으로 1994년 준공된 것을 기념해 총 1994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형이다. 단군릉 뒤쪽에는 무덤 입구가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석실 중앙에 두 개의 나무 관이 놓여져 있다. 여기에는 당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단군과 그 아내의 유골이 아르곤 가스가 채워진 밀폐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다. 빛과 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나무관을 덧씌웠다.

단군릉에 오르기 위해서는 총 289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고, 계단 양쪽에는 선돌을 연상시키는 돌기둥이 좌우 5개씩 세워져 있다. 8명의 신하와 단군의 네 아들을 상징하는 상이 좌우 능을 지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상돌, 분향료가 있고, 릉 네모서리에는 네 마리의 석범(돌 호랑이), 4개의 청동, 검탑과 두 개의 망두석, 석등이 있다.


정치적으로 이용된 단군
단군릉을 개건했지만 이 단군릉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전술했듯 발견된 유골이 실제 단군의 유골인지에 대한 회의적인 이들을 납득시킬 증거를 북한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백남운, 리지린으로 대표되는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한 사학자들은 단군을 지배층이 만들어낸 신화적 인물로 봤으며, 특히 초기 계급사회 지배자의 호칭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지시로 단군릉이 개건되며 북한 학계는 완전히 자신들의 주장을 뒤집기 시작한다. 이른바 주체사상에 의한 민족사의 계승을 주장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민족사를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이에 평양에 도읍을 둔 고조선-고구려-고려-조선-북한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당위성을 확보하며 김씨 세습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역사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다음 기사에서 살펴볼 고려에 대한 북한의 시각과도 연관되어 있다.

북한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장인 장정신은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개건 사업을 전개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1993년 단군릉의 개건이 정치적 목적을 지닌 퍼포먼스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단군릉은 북한의 역사학계가 이미 학자로서 지녀야 할 비판의식과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 5대문명을 주장하며 대동강 문명설을 펼치고 있는 북한의 학계는 더이상 학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선전나팔로서 존재하고 있다.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어 기생하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민족의 시조로서 존재하는 단군에 대한 존중 혹은 이를 통한 화합은 담길 수 있겠으나, 정치 권력을 위한 왜곡은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일본, 혹은 중국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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