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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우리가 부활시킨 袁世凱
"역대 의원들이 만난 中인사 중 최고위급" 자랑하는 민주당
 
조선일보 기사입력 :  2017/01/0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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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우리가 부활시킨 袁世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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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의 또 다른 '티벳'될 수 있다!
 
위기의 시대임을 숨기거나 통찰할줄 모르는자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입력 : 2017.01.05 03:13

김진명 정치부 기자
김진명 정치부 기자

 
 

중국 외교부의 천하이(陳海) 아주국 부국장이 우리 외교부의 만류에도 지난달 말 방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별명이 떠올랐다. '아, 진세개(陳世凱)!'

천 부국장이 주한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2012~2014년 그는 서울 외교가에서 '진세개'로 통했다. 1882~ 1894년 조선에 머물며 국정을 간섭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빗댄 별명이었다. 당시 그는 공사참사관이었지만 실제보다 급(級)이 높은 척하며, 자신보다 훨씬 급 높은 국내 인사들과 교제했다. 한국에서 그는 부대사나 대리대사로 통했다. 우리 외교부가 "공사참사관이란 공식 직함으로 활동하라"고 요청한 적도 있지만 수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대사, 대리대사의 위치에서 천 부국장은 정·재계에 두루 인맥을 쌓았다. 국회의원 누구누구와 호형호제(呼兄呼弟)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한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서는 사드에 반대하는 중국 외교의 실무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4박 5일의 방한에서 천 부국장과 만난 것으로 알려진 정치인만도 김무성 개혁보수신당 의원,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박지원 전 국민의당 원내대표 등 여럿이다. 김무성 의원은 TV조선에 "(천 부국장이) 사드 배치 결정을 연기해 달라고 해서 나무랐다"고 말했다. 이인영 민주당 의원은 "늘 중국에서 하던 (사드)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중국에 사업장을 둔 기업인들을 만나서는 아마 한발 더 나갔던 것 같다. 한 대기업 관계자가 정부에 "(사드 배치와 관련해) 위협적 언사를 들었다"고 알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준 소식통은 "(천 부국장의) 협박 내용은 말할 수 없다"며 "협박 내용이 밖으로 알려지면 어느 기업이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는지 드러나 그 기업이 중국에서 더 큰 보복을 당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 외교부 아주국에는 부국장이 4명 있다. 그중 한 명에 불과한 천 부국장은 우리 외교부 과장보다 조금 급이 높은 정도다. 그가 서울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장관급)을 지낸 김장수 주중 한국 대사는 베이징에서 무엇을 했을까. 김 대사가 푸대접을 받고 있으며, 장관은커녕 그보다 급이 낮은 인사조차 접촉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우리가 전직 장관들을 중국에 대사로 보내는 동안 중국은 줄곧 부국장급·국장급 인사들을 주한 대사로 보냈다. 북한에는 차관급 인사를 대사로 보내도 한국에는 그럴 의지가 없어 보였다. 천 부국장의 이번 방한으로 그 이유가 드러났다. 과장급을보내도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줄줄이 만나주기 때문이다.

송영길 의원 등 민주당 의원 7명이 4일 또 중국에 갔다. 그들이 왕이 외교부장과 푸잉 전인대 외사위 주임을 만나고 쿵쉬안유 부장조리가 대접하는 만찬을 먹는 동안 우리 정부의 권위는 그만큼 더 깎일 것이다. 계속해서 위안스카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한국의 원칙도 없는 대중(對中) 저자세 외교다.
 
 
공식라인 피하던 中 왕이, 野의원은 나서서 환대 정우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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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의원들이 만난 中인사 중 최고위급" 자랑하는 민주당
     

    입력 : 2017.01.05 03:04

    [野의원 만난 왕이, 김장수 駐中대사는 한번도 면담 안해]

    - 中, 공식채널은 철저히 무시
    北담당 대외연락부장 면담도 요청한지 2년 되도록 응답 없어
    "中관료들, 어쩌다 회의 나와도 경제제재 항의하면 모르는 시늉"

    - 中 목표는 '野 지원해 사드 번복'
    장관 면담 이어 차관보 만찬까지… '최순실 사태'후 中정부차원 대접
    "한국내 자중지란 유도하는 전술"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4일 소속 의원 7명이 중국을 방문해 왕이(王毅) 외교부장(장관) 등을 만나는 것에 대해 "역대 국회의원들이 만난 중국 인사 중 가장 고위급 인사를 만나는 것"이라며 "중국이 우리나라 문화 산업의 중국 진출을 막거나 관광객을 제한하는 것에 항의하고 이를 풀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교 관계자들은 "지금 중국 정부가 우리 외교부는 무시하면서 민주당을 환대하는 것은 국내 갈등을 조장해 사드 배치를 철회시키려는 전략"이라며 "의원 외교는 필요하지만, 중국의 의도에 말려들면 결국 '한국은 우리 뜻대로 흔들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하고 있다.

    ◇사드 번복 가능성 높아질수록 야당 환대

    중국 정부는 이날 방중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왕이 부장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고, 쿵쉬안유(孔鉉佑) 부장조리(차관보급)가 만찬을 대접하도록 했다. 작년 7월 우리 정부가 사드 배치 결정을 발표한 후 중국을 찾은 의원단 중 가장 후한 대접을 받았다. 작년 8월 민주당 초선 의원 6명이 방중했을 때는 고위직과의 면담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베이징대·칭화대와 판구연구소 등의 관변 학자들이 이들을 상대했다. 그러나 '최순실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이어지고 정권이 교체될 경우 실제 사드 철회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이자 중국의 대응도 달라졌다. 작년 12월 초 국회 외교통일위원인 이인영 의원 등 민주당 의원 4명이 중국에 갔을 때는 류전민(劉振民) 부부장(차관)이 면담에 나섰다. 학계와 의원단의 면담도 외교부 산하기관인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직접 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야당 의원들을 맞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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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 외교회담땐 쌀쌀맞던 왕이, 野의원들엔 함박웃음 - 한·중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4일 중국을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베이징 외교부 청사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면담한 뒤 기념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왼쪽에서 둘째부터 박찬대·유은혜·유동수·송영길 의원, 왕이 부장, 박정·신동근·정재호 의원, 박선원 전 청와대 비서관. 맨 왼쪽 여성은 통역. /베이징=공동취재단

  • 이런 변화에 대해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국내 정세에 대한 판단을 달리하면서 이간책으로 한국 내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유도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사드 배치에 부정적인 한국 야권을 적극 지원해 한국 정부를 공동의 적(敵)으로 몬 뒤, 궁극적으로 사드 배치 결정을 뒤집으려 한다는 얘기다. 특히 이번 국면에선 관광 제재 등 '경제'를 매개로 '안보'를 흔드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소식통은 "중국은 중·일 관계가 최악이었던 2013~2014년에는 한국의 역사 감정을 자극해 반일(反日) 공동전선을 형성하려 하는 등 외교에서 이간지계를 적극 활용해왔다"고 했다.

    정부 공식 라인에는 무시·고립 전략

    반면 중국 정부는 공식 카운터파트인 한국 정부는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양국 정부 간의 공식 채널을 사실상 '식물 상태'로 만들었다. 김장수 주중(駐中) 대사는 2015년 3월 부임 때부터 '사드 설득 임무를 받고 왔다'는 인식 때문에 중국 정부의 견제를 받았고, 공식 사드 배치 결정 이후에는 거의 모든 면담 신청이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사가 왕이 부장을 만난 것은 작년 6월 황교안 국무총리의 방중 때 배석한 게 유일하다. 북한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대외연락부장의 경우 대사 부임 직후 면담을 신청했지만 만 2년이 다 되도록 응답이 없다고 한다. 관광 문제를 담당하는 국가여유국장(장관급) 면담도 두 달 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 주중 한국 대사의 정부·학계 관계자 면담 횟수는 155회였지만, 작년에는 48회로 뚝 떨어졌다.

    외교부 본부도 중국과 제대로 된 접촉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특별사무대표가 주로 상대로 나서지만, 이미 은퇴할 나이가 지난 우 대표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정부 소식통은 "어쩌다 한·중 협의가 성사돼서 한한령(限韓令),여행 제한 등의 경제 제재에 항의해도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전혀 모르는 시늉을 한다"며 "정부를 철저히 무시하며 경제 제재를 가해서 우리 여론을 사드 철회 쪽으로 끌고 가려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달 말 방한해 정·재계 인사들에게 사드 여론전을 펼치고 간 천하이(陳海) 중국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에게도 "한·중 수교 25주년(2017년) 준비를 위해 만나자"는 제안을 했지만, 천 부국장은 이를 무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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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스카이


    원세개, 袁世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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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1859년
    사망일 1916년

    청나라 말기의 대군벌.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입국해 내정에 관여했으며,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을 창설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혁명동맹회를 이끄는 쑨원과의 약조에 따라 선통제를 폐위시킴으로써 청 왕조를 멸망시킨 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황제가 되려고 한 야심가


    청나라 말, 중화민국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는 북양군벌이 되는 북양군을 창설하고 사병화함으로써 훗날 중국 군벌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국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 조선에 주재하면서 내정에 간섭했고, 귀국한 후에는 중국 군대를 신식화했다. 총독, 내각총리대신, 후작까지 오르며 요직을 차지하는 동안 그는 음모와 배신을 거듭하여 권력을 유지했고, 결국 쑨원의 중화민국 정부와 연합하여 선통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러나 이후 스스로 황제에 오르려고 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고립되었다.
    위안스카이

    허난 성(河南省, 하남성) 샹청(項城)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위안스카이는 어린 시절 학문에는 뜻이 없어 1876년과 1879년 향시에서 거듭 낙방했다. 그러나 군인이 되어 경군통령 우장칭(吳長慶)의 휘하에서 군사적 재능을 펴기 시작했다.
    그에게 가장 처음 주어진 기회는 1882년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이었다. 상관이던 우장칭이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자 위안스카이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임오군란에 직접 참여하여 반란을 진압했으며,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약했고, 이로써 ‘동지’라는 직책에 올랐다. 여기에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고종을 구출하는 등의 활약을 하며 이듬해 이홍장으로부터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되었다. 이른바 청나라의 대조선 정책을 도맡은 것이다. 그는 자신을 조선 총독이라 생각하고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다. 또한 조선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왕보다 상석에 앉고, 궁궐 내에서 말과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 청나라를 견제하려던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음모까지 꾸미는 등 오만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조선에서 책략을 거듭하던 그가 귀국한 것은 1894년 6월 21일,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위험한 기류가 흐르자 일본의 청나라 침공에 중간 전투지가 될 조선에서 재빨리 피신한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을 친 그에게 또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청 정부가 새롭게 군대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안스카이는 휘하에 있던 북양군을 서양식 군대로 육성했다. 북양군은 원래 이홍장이 자신의 안휘 부대를 현대화하여 북양군과 북양함대로 재조직한 것인데, 이홍장 사후 위안스카이가 맡으면서 더욱 현대적으로 성장시켰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은 이후 군벌로 성장해 중국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

    그사이 위안스카이는 1898년 무술변법에서 개혁파를 배반하여 서태후의 신임을 얻었고,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면서 열강의 신임까지 얻었다. 또한 1901년에는 이홍장의 뒤를 이어 직례총독과 북양대신이 되었다. 이렇게 그의 위세가 높아지자 이홍장은 청나라 귀족들의 시기를 한 몸에 받았고, 1908년 선통제가 즉위하고 아버지 순친왕이 섭정이 되면서 그는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위안스카이는 다시 군사적 전권을 장악했다. 난징(南京, 남경)의 중화민국 정부와 청 정부 사이에서 조율하던 그는 청 정부를 배신하고 쑨원의 중화민국 정부와 연합하여 선통제를 스스로 퇴위하게 했다. 이후 그는 쑨원을 대신하여 중화민국 임시 총통 자리에 오르고 수도를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옮겼다.
    쑹자오런

    위안스카이는 이제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국민당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1913년 3월에는 국민당 임시 대리인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했다. 이로 인해 혁명이 일어났으나 위안스카이는 이를 제압하고 1913년 10월 정식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했다.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독재 체제를 확립한 그는 이듬해 5월 중화민국임시약법까지 폐지하고 봉건적 의미의 대총통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황제 제도를 부활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고,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일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을 끌어들여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같은 해인 1915년 1월 급기야 일본은 위안스카이에게 중국 내의 이권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사항을 담은 대중국 21개조 요구안을 제시한다. 이 요구안은 모두 5호 21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호. 산둥 지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이익을 일본 정부에 넘겨준다.
    제2호.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 지역에 대해 일본이 우선권을 가진다.
    제3호. 중국은 일본과 한야평공사를 설립하며, 광산 채굴에 있어 일본의 허가를 받는다.
    제4호. 중국 연해의 도서와 항만은 타국에게 양도할 수 없다.
    제5호. 중국 군사와 재정 부분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중국 경찰과 군대에도 일본인을 고용하고 일본이 무기를 공급한다.

    21개조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중국 내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으나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지원이 필요했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일본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로써 막대한 권리가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중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일본과 위안스카이에 대한 반대 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그는 같은 해 12월 11일 참정원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의 등극을 감행했고, 이듬해 1월에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개원한다고 선언했다.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식

    그의 이와 같은 행보는 중국 국민은 물론 지지 세력이었던 북양 군벌까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서구 열강 역시 지원을 중단했다. 국내외적으로 고립된 위안스카이는 결국 1916년 3월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6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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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문숙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펼쳐보기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공부하였다. 중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 삼성전기, LG전자 등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 및 중국어 회화, 문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엮은 책에는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이 있다.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홍정숙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출판기획자이자 역사 전문작가로 활동하며, 최근에는 동·서양 고전 및 역사 인물에 대한 역사서를 집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엮은 책에는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이 있다.

    출처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홍문숙, 홍정숙 | cp명청아출판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역사시대의 시작인 주 왕조가 세워진 이후부터 2011년 현재까지 중국사의 전환점을 만든 100명의 인물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통해 3천 년간의 중국 역사..펼쳐보기역사시대의 시작인 주 왕조가 세워진 이후부터 2011년 현재까지 중국사의 전환점을 만든 100명의 인물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통해 3천 년간의 중국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진시황제, 제갈공명, 칭기즈 칸, 마오쩌둥 등 시대를 대표하는 황제, 정치가, 역사가, 문학가, 예술가 등을 총망라 했으며,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포함하여 중국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상식을 갖출 수 있도록 안내한다. 역사시대의 시작인 주 왕조가 세워진 이후부터 2011년 현재까지 중국사의 전환점을 만든 100명의 인물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통해 3천 년간의 중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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