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올림픽 출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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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금메달에서부터 올림픽 3관왕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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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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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
2008/08/03 [0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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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올림픽 출전사
- 슬픈 금메달에서부터 올림픽 3관왕까지- 제29회 베이징 올림픽이 어느덧 닷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언론과 방송은 올림픽에 대한 갖가지 보도로 이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고조시켜 가는 중이기도 한데요.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열리게 되는 올림픽. 이미 20년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른 경험이 있는 우리로선 올림픽을 앞두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있는 중국과 베이징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바로 20년전 우리를 보는것 같아 새로운 감회에 젖기도 합니다.
흔히 전 세계 화합과 축제의 장으로 표현되곤 하는 올림픽. 그러나 또 한편으론 정치적인 문제로 얼룩진적도 많았고, 날이 갈수록 올림픽이 지나치게 상업화 된다는 비판도 적지 않지요. 올림픽 자체가 전 세계가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큰 행사이다 보니 불가피한 면도 없지않아 있는 듯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현대사에서 올림픽과 참 묘한 인연이 많았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올림픽 출전사를 살펴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파란과 사연 많았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보는것만 같으니까요. 단순한 국제 스포츠 경기 출전사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올림픽 출전사이기도 하기에 한번 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벌어진 날 메인스타디움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20대의 동양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손기정 선수.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식민지 시대 아픔의 상징이었던 그.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뛸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울분을 터트리기라도 하듯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반란을 일으키고. 이 일로 동아일보는 정간을 당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른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을 본 한 외국인은 손기정과 남승룡(동메달 리스트)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 ’이라고요.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해방직후에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 여기서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나라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탄생합니다. 역도에서 동메달을 딴 김성집 선수와 복싱에서 역시 동메달을 딴 한수안 선수. 대한민국 최초의 메달리스트로 기록되게 된 김성집 선수는 은퇴후 72년 뮌헨 올림픽과 84년 la 올림픽 선수단장을 맡기도 했고, 1976년부터 94년까지 태릉 선수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스포츠계의 대부로 자리잡게 됩니다. 태극기를 달고 최초로 참가한 런던 올림픽에서의 두 개의 동메달. 그것은 작지만 값지고 귀한 의미를 갖는 성과였습니다.
전쟁의 참화속에서 참가한 1952년 헬싱키대회. 여기서도 우리나란 48년처럼 역도와 복싱에서 각각 동메달 하나씩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1956년 제16회 멜버른 대회에선 우리나라 최초의 은메달 리스트가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복싱의 송순천 선수. 당시 국민영웅이 되다시피 했던 송순천 선수는 그 ‘ 올림픽 은메달 ’을 다들 너무나 신기하게 여기며 한번이라도 만져보려 해 애먹었다며 그 당시를 회고하기도 합니다. 56년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은메달 하나와 동메달 하나를 획득하게 됩니다.
4.19가 있었던 해에 열린 1960년 로마 올림픽은 우리나라 올림픽 출전사상 유일한 노메달 대회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올림픽이 꼭 메달을 따는 게 중요한건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올림픽에서 동메달 하나도 따지 못하고 참가에만 의의를 둘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964년엔 아시아에서 최초로 일본에서 올림픽이 열렸었습니다. 그리고 64년 도쿄 올림픽은 우리에게 현대사의 가장 큰 상처인 분단의 아픔을 다시한번 되새기며 전국민이 울어야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64년 도쿄올림픽에 북한 육상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한 신금단 선수. 한편 신금단 선수의 아버지 신문준씨는 1.4후퇴때 북에서 내려와 남한에서 살게 된 실향민으로 뉴스를 통해 딸의 소식을 접한뒤 그녀와의 상봉을 희망하게 됩니다. 냉전시대에 결코 쉬운일일수 없었던 북한의 딸과 남한 아버지의 상봉. 우여곡절 끝에 부녀의 상봉은 이루어지지만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7분. “ 어머니는 살아계시냐 ? ”, “ 네, 잘 있습네다 ”. 두 사람이 그날 나눌수 있었던 유일한 대화입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83년에 신문준씨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도쿄에서의 신금단 부녀 7분간 상봉은 결국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사살. ‘ 피의 올림픽 ’으로 더 유명해진 1972년의 뮌헨 올림픽. 여기서 우리나라는 유도의 오승립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한편 이 대회에서 사격에서 금메달을 딴 북한의 이호준 선수는 기자회견에서 ‘ 수령님 교시대로 원쑤놈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쏘았다 ’고 말해 서방기자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단 그 시절 그 사진을 바라보며 우린 언제나 올림픽 경기장 꼭대기가 휘날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모습을 보게되나 아쉬워 했었죠. 근래에는 우리나라가 올림픽 대회때마다 7-9개 정도의 금메달을 획득하곤 하니. 요즘 10대-20대들은 우리가 그 시절 다른나라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당당하게 시상대에 서는 모습을 얼마나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을지 이해하지 못 할 것입니다. 손기정 선수의 아픔을 기억하며 우린 언제쯤 올림픽 경기장 꼭대기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모습을 보게되나 안타까와하고 애석해하던 그 시절을요.
그렇게 손기정 선수의 아픔이 있었기에 더더욱 갈망하고 애태웠던 올림픽 금메달. 바로 그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나왔습니다. 레슬링의 양정모선수. 너무나 슬퍼보이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시상 장면과 대조되는 두 손을 번쩍 치켜 올리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양정모 선수의 모습. 그것을 어린시절 여러차례 자료화면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거둔 성적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 여자배구가 구기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획득한 대회이기도 합니다.
tv 자료화면이나 옛날 신문기사가 아닌 제 머리에 또렷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올림픽은 제가 초등학교 6학년때 열렸던 84년 la 올림픽입니다. 서울올림픽을 4년 앞두고 열리는 올림픽이라 특히 방송사는 올림픽 생중계 예행연습삼아 대대적인 중계를 했었고. 따라서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도 높았던 때로 기억납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미국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며 불참을 선언했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방 20여개국이 불참한 반쪽 올림픽이 되었습니다. 한편 소련과 동구권은 이에대한 보복조치로 la 올림픽에 줄줄이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로선 올림픽이 2회연속 반쪽대회가 되는 모습을 보며 과연 4년후의 서울올림픽이 성공할수 있을지 불안과 우려를 가질수밖에 없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서울올림픽 취소론까지 나왔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론 동구권의 불참으로 몇몇 구기종목은 불참국가 대신 참가권을 획득하는 행운을 갖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론 서구 강호와 대결해서 최하위가 뻔한 종목들까지 출전시킬 필요가 있는가하며 참가회의론이 나오기도 했었고요. 여하튼 사연많고 탈많았던 84년 la 올림픽. 하지만 우리나라는 당시까진 역대 최대의 성적이며 대량 금메달의 첫 신호탄을 쏘아올린 대회이기도 합니다. 1984년 la 올림픽 우리나라 성적은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 양궁에선 서향순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 여성 금메달 리스트가 되기도 했고, 여자농구와 여자핸드볼은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은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아마 80년대에 사춘기와 성장기를 보낸 세대들에겐 가장 남다른 감회로 기억되고 있는것이 서울올림픽이었을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 올림픽 세뇌교육 ’을 받다시피 하며 자란 세대니까요. 그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표현처럼 ‘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고 가슴 뿌듯한 일 ’이었던 서울올림픽. 일제 식민지 시절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오르는 손기정 선수의 아픔에 눈물 흘리던 나라, 분단국가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전 세계가 둘러 나뉘어 있던 그 시절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그 위험한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는것. 그것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88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이제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수있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음을 알리는 신고식이었습니다.
한편 서울올림픽에선 양궁에서 김수녕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2관왕이 되었고, 여자핸드볼은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아쉬운 은메달을 소재로 얼마전 ‘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 ’이란 영화가 나오기도 했는데. 1988년 여자핸드볼에서 단체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당시의 한국 여자핸드볼 선수단에게도 그 순간은 분명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이었을 것입니다. 88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금 12, 은 10, 동 11로 세계 4위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1992년은 우리나라에게 잊지 못 할 또 하나의 감격스러운 금메달을 안겨준 대회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장기를 단채 금메달을 획득했던 1936년의 마라톤. 바로 그 마라톤에서 56년만에 황영조 선수가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우승을 하게 됩니다. 사격,역도,배드민턴등 보다 많은 종목에서 우리나라 스포츠의 기량이 향상되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 바르셀로나 대회. 여기서 우리나라는 금 12, 은 5, 동 12로 7위를 기록합니다.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우리나란 금 7, 은 15, 동 5, 새천년의 첫 올림픽이었던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선 금 8, 은 10, 동 10 으로 88년이나 92년에 비하면 조금 주춤한 성적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4년전인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선 금 9, 은 12, 동 9로 총 30개의 메달을 획득했었죠. 아테네 대회는 서울올림픽때 획득했던 총 메달수 33개(금 12,은 10, 동 11)이래 최대의 성적을 기록한 대회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엔 두명의 올림픽 3관왕 그리고 7명의 올림픽 2관왕이 있습니다. 하계올림픽은 여자양궁이 88년 서울올림픽 이래 늘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했고, 따라서 지금까지 여자양궁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을 한 다섯명의 선수가 있습니다. 88년의 김수녕, 92년의 조윤정, 96년의 김경욱, 2000년의 윤미진, 2004년의 박성현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동계올림픽의 경우 1992년 김기훈 선수가 쇼트트랙에서 우리나라 동계올림픽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기록하며 동시에 2관왕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동계올림픽 우리나라 메달박스가 된 쇼트트랙에서 전이경 선수가 94년과 98년에 역시 두 개의 금메달을 따내 2관왕 2연패를 기록했지요. 한편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선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3관왕이 탄생했습니다. 남자 쇼트트랙의 안현수, 여자 쇼트트랙의 진선유가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메달리스트중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따낸 선수는 하계올림픽은 여자양궁 88년 개인,단체전 그리고 92년 단체전과 2000년 단체전에서 모두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김수녕 선수. 그리고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2관왕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전이경 선수입니다. 한편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각 방송사 해설위원을 맡은분들이나 선수단 임원을 맡은 분들중엔 과거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들이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84년 la 올림픽때 유도에서 금메달을 따낸 안병근 선수의 경우 이번 베이징 올림픽 유도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선수들이 안감독에게 붙인 별명이 ‘ 골룸 ’이라고 하네요. 제 기억에 24년전의 안병근 선수는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는데 이제 나이 50이 다 된 지금은 어쩌다 골룸이란 별명을 다 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88년 서울 올림픽 여자탁구 금메달 리스트인 현정화 선수도 역시 이번에 대표팀 코치를 맡았습니다. 한편 88년 복싱 금메달의 김광선, 양궁 금메달 리스트 이은경,김경욱,김수녕 태권도의 장지원등 많은 어제의 올림픽 영웅들이 우리나라 올림픽 유망종목 중계 해설을 맡는 모습을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어제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가 오늘은 대표선수단 감독이나 또는 올림픽 중계 해설을 맡는 모습이 이젠 우리나라도 어느덧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 같네요. 동메달 하나만 따도 국민영웅이 되었던 50-60년전, 손기정 선수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며 외국 선수들이 올림픽 시상식에 오르는 모습을 부러워 하던 시절.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것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입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 메달 유망주들을 살펴보니 수영의 박태환 선수는 89년생, 역도의 장미란 선수는 83년생, 여자양궁에 출전하는 윤옥희 선수가 85년생, 주현정 선수는 82년생이더군요. 언젠가 한겨레신문에서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산업화와 민주화가 모두 이루어진 뒤에 철든 ‘ 태극기 세대 ’란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 올림픽 메달 유망주에 해당되는 선수들 상당수가 그 태극기 세대에 포함이 됩니다.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아픔을 되새기던 6,70년대엔 올림픽 그 자체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되돌아보게 하는 상징 그 자체였고, 서울올림픽을 기다리던 80년대엔 올림픽 그 자체가 희망이고 꿈이었습니다. 그 서울올림픽을 치른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났군요. 말이 20년이지 20년이 어디 보통 세월입니까 ? 종종 농담처럼 하는말로 첫사랑만 성공했으면 그 정도 나이차가 나는 자녀가 있을수 있는 그런 세월 아닙니까. 가령 예를들어 요즘 아이돌 스타로 뜨고 있는 원더걸스나 소녀시대 멤버들은 모두 88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 서울올림픽을 자료화면으로만 볼 수 있는 세대 ’죠. 우리땐 서울올림픽이 그 말만 들어도 설레었었는데, 요즘 10대,20대들에겐 서울올림픽이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을지 그것도 새삼 궁금해집니다.
지난 시절 때로는 식민지와 분단시대의 아픔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기도 했고, 때로는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룩한 그 자랑스러움과 함께하기도 했던 올림픽입니다. 앞으로의 올림픽은 또 후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될까요 ? 앞으로의 올림픽은 이제 더 이상 울분과 상처로 기억되는 올림픽도 아니고, 금메달 하나에 애태워하는 그런 올림픽도 아닌 진정 세계인과 함께 화합과 평화의 뜻을 나누는 그런 올림픽이 되기를 바라며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한국 선수단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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