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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통령은 절대 純眞해선 안 된다
다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처럼 미국·중국·일본 頂上보다 老獪해야
 
조선일보 기사입력 :  2017/04/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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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한국 대통령은 절대 純眞해선 안 된다

미국은 決斷·去來하고 물러서면 代價 주는 나라
다음 대통령,이승만 대통령처럼 미국·중국·일본 頂上보다 老獪해야

강천석 논설고문
강천석 논설고문
대선 후보 TV 토론의 첫 질문은 예상대로 북핵 문제였다. '미국이 북(北)을 군사적으로 타격하려 하면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하겠느냐'를 물었다. 그러나 후보들 답변에 맥이 풀렸다. "사전에 미·중 정상과 통화하거나 특사를 파견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핫라인을 통해 북(北)에도 도발을 중지하게 할 것"이라는 보충 설명도 들으나마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사실은 질문 자체가 조금 애매하다. 방어적(防禦的) 공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적의 공격이 임박했을 때는 선제 공격, 공격이 코앞에 닥치진 않았지만 화근(禍根)을 미리 도려내야 할 땐 예방 공격을 선택한다. "적의 심장부에 핵 벼락을 내리게 하겠다"며 막말을 내뱉는 북한 언동은 선제 공격을 불러들이는 미련한 짓이다. 지금 북한은 그렇게 미련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교활한 쪽이다. 핵 벼락 운운(云云)하는 협박 앞에 반드시 "만일 적이 공화국 생존을 위협한다면…"이란 단서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줄타기는 위험한 도박이다. 주고받는 신호(信號)의 의미는 보내는 쪽이 그 신호에 무슨 뜻을 담느냐보다 받는 쪽이 신호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 북한은 미국 본토 서부 지역에 도달할 대륙간탄도탄(ICBM) 기술을 이미 획득했거나 아니면 조만간 손에 넣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 같은 불량(不良) 국가의 핵무기는 중국·러시아 핵무기보다 훨씬 위험 지수(指數)가 높다. 미국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55년 만의 핵 위협이다. 선제 공격 요건인 '임박한 위험'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최종 상황 판단은 예측불허의 트럼프 대통령이 한다.

한국 새 대통령이 마주해야 할 첫 불청객(不請客) 역시 북한 핵 위협이다. TV 토론에 나온 대선 후보들은 무엇보다 미국의 북핵 대응 방식이 질적(質的) 변화를 겪고 있다는 인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 대응이 과거와 같은 레일 위를 굴러가고 있다면 중국의 태도가 저렇게 달라졌을 리 없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중국 태도 변화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기에 한국 불안도 따라서 높아진다.

미국이 핵 위협에 선제(先制) 대응한 유일한 전례(前例)가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다. 쿠바 위기 전개 과정에는 미국의 전략적 사고를 가늠할 유력한 힌트가 담겨 있다. 쿠바에 비밀리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소련에 대해 미국이 정면 승부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쿠바에서 소련을 억제하지 못하면 '더 불리한 시점' '더 불리한 위치'에서 소련과 대결하게 된다는 판단이었다. 미국이 우려한 곳은 베를린이었다. 당시 베를린은 수십만 소련군에 포위된 위치였다.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면 위험하더라도 지금 결단하는 게 낫다는 것이 미국 전략이다. 북핵은 미국이 영변 핵시설 폭격을 처음 계획했던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때보다 악화됐다.

둘째 이유는 핵 담판(談判) 같은 중대한 위기에선 위협을 가하는 상대방을 한 배에 타도록 끌어들여 함께 멀미를 하도록 해야만 타개(打開)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쿠바 위기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무기를 수송하는 소련 선박을 미국 해군이 나포(拿捕)할 경우 전쟁이 일어날 확률을 3분의 1로 계산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전쟁 발발 1시간 후 미국 국민 1억명, 소련 국민 1억명이 희생되는 전쟁"(맥나마라 국방장관 의회 증언)이다. 이쪽은 다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국은 물론 미국의 말 폭탄(爆彈)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지 못했다. 미국의 전략 전통에선 다른 출구(出口)를 찾는 것이 뜻밖의 일이 아니다.

다음 한국 대통령은 미국이 거래(去來)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신의(信義)를 생명으로 여기는 의리(義理)의 나라도 아니고 상대방에게 일방적 양보를 강요하는 무지막지한 나라도 아니다. 양보를 얻어내야 할 땐 상대방 체면을 살려주고 퇴로(退路)를 열어줄 줄 아는 나라다. 쿠바 위기 때 소련이 쿠바에서 핵과 미사일을 철거하는 대가(代價)로 터키에 배치됐던 미국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당사자 터키는 미국이 소련에 이 양보 카드를 넘긴 한참 후까지 이런 사실에 깜깜했다.

북한이 물러설 때는 그 대가를 미국한테 받았다고 봐야 한다. 북핵 위기를 넘더라도 한국을 향한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선 통일 전망이 잠시 더멀어질 수 있다.

다음 한국 대통령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절대 순진(純眞)해서는 안 된다. 미국 대통령, 중국 주석, 일본 총리보다 몇 배 노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TV 토론에서 모범 답안만 써내는 대선 후보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적(敵)은 물론이고 동맹국 미국 얼굴도 자주 붉히게 만들던 더 없이 노회(老獪)한 이승만 대통령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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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im
2011.01.29 05: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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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NSC 기밀 문건 발굴 - 대파국에서 대타협으로, “이승만은 친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적이다”
아이젠하워, 국방장관과 CIA국장 앞에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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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1875~1965), 아이젠하워 (1890~1969)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미국의 구두약속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의 대한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그에게 구두약속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판단은 근거가 있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래 태프트-가쓰라 조약과 포츠머스 조약, 임시정부 승인 거부, 제2차 세계대전 시 전시회담, 1945년 일반명령1호와 한반도 분할 제안, 신탁통치 제안, 주한미군 철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강대국 우선주의로 인한 한국의 희생은 막대했다. 이승만은 한·일 강제병합과 1945년의 분단은 미국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몰아세웠다.
 
따라서 한반도 안전을 위해 현찰 없는 어음은 전혀 필요 없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미국의 국내 정치를 너무 잘 알았다. 미국의 구두약속을 믿고 휴전을 수용하였으나, 휴전 이후 조약 체결에 실패하거나 의회 비준이 거부되면 한국은 낭패였다. 더욱이 그는 휴전협정의 체결 이후에는 자신의 카드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승만이 꿰뚫은 변수가 또 있었다. 당시 워싱턴은 일본을 중시하는 친일파가 넘쳐났다. 한국을 중시하는 친한파는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으로 한국이 희생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한·미동맹에 집중한 이유는 반공 못지않은 반일 때문이었다.
 
 미국의 구두약속 이외엔 어떤 구체조치도 없는 가운데 휴전회담은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사태를 되돌릴 수 없었다. 백선엽을 포함한 군 지도부를 소환하여 충성을 확인한 그는 마침내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는 치밀하게 계산된 돌출행동을 결행했다. 6월 17일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현재의 휴전안은 대한민국엔 ‘사형집행영장’이라고 경고한 다음 날 그는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이제 미국은 공산군과 이승만이라는 두 적과 대면해야 했다. 이승만은 이미 대공, 대미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반공포로를 석방한 그날 아이젠하워는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 국장 등 핵심인사가 모두 참여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직접 이승만을 ‘친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적’이라고 언명하였다.

[ 반공포로석방은 치밀하게 계산된 쾌거였습니다 ]

 
그는 또한 직접 쿠데타를 언명했다. 미국 대통령이 반이승만 쿠데타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다시 미국을 전면전에 끌어들이려 할 경우) 나 역시 염려하고 있다. 어떤 국면에서는 아마도 위험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신속한 방법은 쿠데타”라며 “확실히 이러한 행동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물론 우리 스스로가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한국에서 사태를 수행할 만한 자들에게 즉각 확실하게 인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추가했다. 직접 쿠데타를 수행하지는 않되 한국인 주도의 쿠데타에 대해서는 미국이 반이승만-친쿠데타 편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승만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언명과, 한국인에 의한 쿠데타 후원 가능성의 언급, 이것이 당시 한국에서 미국이 직면한 이중 현실이었다. 미군을 따돌리는 일사불란한 반공포로 석방이 보여주듯 한국 군부는 이미 이승만의 확고한 장악하에 있었다. 신익희·조병옥·장면·조봉암 등 정치인들을 검토한 결과도 전혀 신통치 않았다. 신익희는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잠정 대안으로 검토된 바 있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조봉암은 미국에 이승만의 전략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실제로 “모든 점들이 검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명백히 남한에서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언명하고 있다. 미군이 직접 쿠데타를 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한국 군부나 민간의 쿠데타를 후원해야 했으나 점검 결과 가능성이 없었다. 결국 이승만을 제거할 수도, 한국에서 철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휴전협정 조인 이전에 미국은 이승만과의 상호방위조약 협상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힘을 보여준 이승만이 만약 방위조약도 없는 상황에서 작전지휘권에서조차 이탈한다면 휴전협정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미국은 정확히 알았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북한과 남한의 이중 억제장치였던 것이다.
 
 끝내 미국과 마주앉은 이승만은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접 국무부 차관보, 국무장관과 끈질기게 회담하면서 조약 문구와 협력 내용을 하나씩 밀고 당겼다. 이승만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연속된 초강수에 한·미동맹의 최종 구축과정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방위조약은 휴전과 거의 동시에 가조인 되었으나(8월 8일) 1년3개월이 지난 1954년 11월 17일에야 비준서 교환을 통해 정식으로 발효됐다. 약속-가조인-조인-의회 비준-비준서 교환을 거쳐 발효에 이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정은 한국인들에겐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대륙국가로서는 미국으로부터 아시아 최초의 방위조약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를 통해 남한은 주변 3대 강국의 한반도에 대한 장구한 지배 욕망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북한 방어를 넘어 ‘소련 저지’-‘중국 봉쇄’-‘일본 견제’의 4중 장치였다. 한국은 세계 최강 미국을 활용해 주변 3강의 대한 영향력을 견제하는 역사적 전환을 이뤘던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남한의 휴전협정 참여가 초래할 북한 정권 인정, 통일 추구 불능, 한반도 안정의 연쇄효과로 인한 한·미 동맹 약화를 우려해 휴전협정 조인에 참여치 않음으로써 이후 한국 문제에서 남한의 역할이 크게 제약당하는 지형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후대의 과제로 남겨졌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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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18:55:12
이승만 대통령.jpg


정전협정.jpg



1953년 7월 27일 


2년 이상 합의를 보지 못했던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극적으로 타결된다.


마침내 전쟁의 포성은 멎고 한 줌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 치열하게 싸운 국군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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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딱 1년이 지난 7월 26일


미국 공식 방문 길에 오른 대한민국 대통령을 태운 미 공군기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내셔널공항에 도착했다.


닉슨 부통령이 마중나오고 환영식이 치뤄진다. 닉슨의 환영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승만이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과시해주었다!"


이어 15분 동안 즉흥 연설로 우방국인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맹렬히 비판한다.


"우리는 기어이 우리들의 계획을 달성하고야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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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전쟁 상황의 한반도에서 한국과 미국 정상 간의 만남이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백악관에서 양국의 2차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어 이승만의 방미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미국은 정상회담에 관한 성명서 초안을 회담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부랴부랴 준비해온다.


이 일은 국제관례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아시아정책은 일본에 편중되어 있었는데 성명서의 내용이 한국의 심기를 건드릴까 염려되어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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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일본관은 뚜렷했다. 


원칙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일본에 편중된 전후 미국의 아시아정책을 종종 지적해왔었다.


그런데 고치고 고친 정상회담 1시간 전에 낸 공동성명서 초안엔 일본에 대한 뜻밖의 언급이 서술되어 있었다.


이는 이승만과 2천만 한국인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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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수행원을 소집하여 말한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작전을 드디어 펴는 모양인데 이런 형편이라면 다시 미국의 대통령을 만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분노한 대통령의 모습에 수행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백악관으로 출발할 시간이 되었으나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약속시간인 10시 보다 6~7분 늦은 시각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도리어 자연스럽고 태연하기까지 했다.






이승만 아이젠하워.jpg



회의장에 앉자마자 두 정상 사이에 또 시비가 벌어졌다. 아이젠하워가 말했다.


"어제 귀국의 헌병사령관인 원용덕 장군이 휴전협정에 따라 나와 있는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체코와 폴란드 대표를 내쫓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승만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받아친다.


"그들은 스파이입니다. 우리 군사기밀을 정탐하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걱정스런 것은 이들이 미군이 제공한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8군 시설까지 정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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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는 깜짝 놀랐다. 옆에 앉은 주한 사령관에게 사실이냐 물어보고 대답이 돌아왔다.


"헬리콥터를 빌려준 적은 있습니다만.."


아이젠하워는 잠시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었다.


거듭된 미국 측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반일 입장은 확고하기만 했다. 결국 마지막에 이승만이 딱 잘라 말한다.


"내가 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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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부분은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고 정상을 제외한 양측 대표들이 군사원조와 경제원조에 대한 협의를 논한다.


양국 위원회는 미국이 군사원조 4억 2천만 달러, 경제원조 2억 8천만 달러 등 도합 7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는데 합의한다. 


이것은 나중에 1억 달러가 추가되어 8억 달러가 되었고 다음해부터 원조가 실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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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방미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미국 의회에서의 연설이었다.


상·하 양원이 모두 집결한 회의가 열렸으며 이승만은 그곳에서 연설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연설문을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 받지 않고 혼자 작성한다.


7월 28일 오후 4시 30분 미국 의사당에는 1시간 전부터 차량 행렬이 물밀 듯 이어진다.


상·하원 의원, 정부 3부 요인, 대법원 판사 전원, 워싱턴 주재 외교단 전원, 3군 수뇌부 전원 등이 집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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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놀런드 상원의원의 안내로 입장하자 일제히 모든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를 보낸다.


조셉 마틴 하원의장이 참석자들에게 일제히 말한다.


"미국 국민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불굴의 자유전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이승만을 연단으로 이끌고 이승만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먼저 미국 국민과 아이젠하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영문연설.jpg



"나는 미국인의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자식을, 남편을, 그리고 형제를 우리가 암담한 처지에 놓여있을 때 보내주신데 감사합니다. 한미 양국 군인들의 영혼이 한국 계곡과 산중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혼을 애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대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처음으로 쏟아졌다.


이승만은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한 뒤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해서는 '한국 육군의 아버지' 라고 치켜세운다.


그런 다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국 의회 연설.JPG



"수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으나 현명치 못한 휴전으로 한국전선은 포화를 멈추고 일시적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적은 이 기회에 무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제네바 정치회의도 성과 없이 끝난 만큼 이제 휴전종결을 선언할 시기가 왔습니다. 공산군의 비행기는 우리나라 국회까지 오는데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서울보다 워싱턴에 더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크렘린의 최후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의 박수가 터져나오고 이승만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해졌다.




"그렇다면 미국과 우방들은 지금 수소폭탄을 만들고 있는 소련의 공장들에 폭탄을 투하해야겠습니까? 아니면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세당한 소처럼 우두커니 서있어야겠습니까? 세계 자유인들이 생존하는 길은 평화가 없을 때 부러운 눈치로 평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력균형을 세차게 흔들어 공산 측이 우리를 섬멸시킬 무기를 감히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적 여유는 얼마 없습니다. 수년 내에 소련은 미국을 정복할 방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행동을 개시할 때이며 장소는 한국전선입니다. 한국은 20개 사단을 갖고 있으며 20개 사단을 더 편성할 인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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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승만의 전기를 쓴 로버트 올리버의 계산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날 모두 33번의 박수를 받는다.


약 40분 간의 연설이 끝나고 이승만은 참석자들의 기립박수 속에 퇴장한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가 연설이 자극적이고 전쟁을 권장한다고 비판을 한다.


이승만은 조국 통일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숙원이 될 것을 우려하였고 북진통일이란 위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원대한 정책을 미국에 제안한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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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뉴욕시는 '영웅행진(ticker-tape parade)' 이란 카퍼레이드를 벌인다.


뉴욕시는 역사에 영웅적인 공헌을 남긴 인사들에 대해서만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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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와그너 뉴욕 시장과 함께 오픈카를 타고 1백만 시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하도 인파가 몰려 길 양쪽에는 목책을 쳤고 50층 이상의 마천루에서는 쉴새 없이 5색 색종이가 뿌려졌다.






모자 답례.jpg



이날 오후 이승만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밤에는 3대 텔레비전 방송이 중계하는 가운데 연설을 했다.


"일부 미국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전쟁광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군이 단독으로 전쟁을 한다는게 가능이나 할 법한 일입니까? 우리 군대가 막강하다 할지라도 그 군대를 움직이는 기름이 3일분 밖에 없습니다."


또 한 번 박수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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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8월 5일 미국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먼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한다.


트루먼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해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집 현관에서 이승만을 맞이한 트루먼은 이렇게 말한다.


"귀하를 이곳에서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우리에게 군대를 파견해준 귀하의 위대한 결정에 대해 직접 끊임없는 사의를 표할 기회를 갖게 되어 저 역시 너무 기쁩니다."


이승만은 트루먼의 군대파견으로 공산군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방미외교후.JPG



이승만은 성공적인 방미 외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운동장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우리는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며, 전 국민은 합심해서 조국 통일 성업 완수에 총 매진합시다!"






한성감옥.JPG



1898년 조선왕조시대


독립협회에 참가했던 이승만은 고종을 퇴위시키려는 쿠데타에 가담했단 음모로 한성감옥에 수감된다.


그가 늙어서 까지 손을 파르르 떨며 입에 갖다대는 습관은 투옥 시절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5년 7개월의 투옥 기간을 겪던 중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자 조선 정부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요구하기 위해 영어를 능통했던 이승만을 석방하여 밀사로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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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조선 정부의 밀사가 되어 인천에서 배를 타 목포와 부산을 거치고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 관리들에게 붙잡힐 까봐 마음을 졸였다. 돈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일본으로 가는 배 표와 선교사의 소개장뿐이었다.


일본에서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로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거쳐 드디어 워싱턴에 도착했다.


33일간의 여정이었다. 최초로 미국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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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미국은 1905년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병합을 용인한 상태.


이승만이 그 사실을 전혀 알 리가 없었다. 루스벨트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라고 형식적인 대답만 했을 뿐.


그런 루스벨트의 친절에 감동하고 몹시 흥분해서 숙박료로 20달러를 낸다.


그러나 거스름 돈을 챙기지 않아 호텔 직원이 기차역 까지 쫓아와 돈을 줄 해프닝이 일어날 정도로


순진했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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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뒤 다시 미국 땅을 밟았을 때는 모두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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