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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은 조봉암을 복권시키는 큰 파격을 단행해 봄이 어떤가?
조봉암 복권의 양날칼
 
독립당 기사입력 :  2008/12/1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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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독립당이라는 필명의 네티즌이 쓴 아래의 글 내용에 대해 민신발행인은 비록100%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논지를 대체적으로 동의,지지하는 바이며, 특히 좌우 양진영에의해 철저히 기피당하고 있는 비운의 민족지사이자 탁월한 좌파정객이며, 항일투사인  竹山 조봉암선생의 행적과참뜻을 대체적으로 올바르게 조명하고 있다는점을 높이평가, 민족신문의 정식머리기사로 전재키로 했다는것을 공지하는 바이다.
 
 
 
▲  대한민국 초대 농림장관으로 발탁되어 6.25직전 농지개혁을 단행함으로서 남로당의 선동에 의한 赤化를 막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이승만대통령에 도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등  괘씸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봉암선생(왼쪽)의 재판정에서의 생전모습:민족신문 편집부


조봉암 복권의 양날칼
필명 : 독립당 날짜 : 08.12.13


조봉암 복권의 양날칼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서 조봉암을 복권시킬 수는 있을까? 양명산 등 일부 인사의 잠입은 있었지만 조봉암이 진짜 북한과의 관련성은 없음이 확실하다. 조봉암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복권이 제외된 유일한 사람이다.
친북 종북하지 않았던 조봉암은 지금도 좌파내부에서 별반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좌파 일각에서는 그를 가리켜 배신자라고까지 부르며 악평을 한다. 왜 그럴까?
공산주의자들은 별로 조봉암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듯하다. 59년에 조봉암이 사형되자 북한은 조봉암을 이용할 목적으로 그를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가묘를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조봉암은 공산주의에 대한 혹독한 비난을 퍼붓고 전향한 사람이라, 지금도 남한내 공산주의 빨갱이 원로들 중에는 조봉암을 배신자라며 욕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많이 있다.

46년의 전향선언, 지금도 공산주의 원로, 남로당원 출신자들은 지금도 조봉암을 배신자라며 지금도 이를 갈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호의적으로 말하더라도 조봉암을 큰 사람이지만 배신자나 변절자로 평가하는 정도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조봉암은 항상 관심 밖이었다. 그만큼 조봉암은 좌파 내부에서도 이렇게 평가가 인색하다.

왜 조봉암에 대한 평가가 인색할까? 그는 46년 5월 공산주의자들, 김일성, 김원봉, 박헌영, 여운형 등의 편협성을 질타하고 전향선언을 해 버렸다. 이전까지는 공산주의자였고 여운형으로부터 건국동맹 인천지부 위원장,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시지구 위원장, 민족주의민주전선 인천지구 위원장 등의 직책을 받을 정도로 신뢰가 깊었지만 이 이후로 조봉암은 좌익세력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조봉암은 이성적하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것도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친북주사파들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조봉암은 그렇게 김구를 폭력적이라며 비판하였다 하고 김규식과는 앙숙이었으며 여운형과도 적대관계였다고 한다. 진보 좌파이면서 친북 주사파적 통일논리를 분쇄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친북주사파는 조봉암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조봉암의 상징성을 봐야 될 것이다. 그는 친북세력의 친북논리를 부정하는 역할, 즉 좌파 진보도 한국 건국에 참여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인물이다. 그것 때문에 지금껏 민주노동당 같은 당에서 조봉암 복권이라는 소리를 못하는 것 아닌가?

친북세력과 좌파세력을 분리해야 한다. 즉, 김대중, 노무현 등 북한 김씨 독재정권과 골수 주체사상을 숭배하는 세력과 대한민국의 야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온건 세력은 갈라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등 주사파 친북세력은 반역세력이니 쳐내야 한다.

친북좌익은 올바른 용어가 아니다. 그들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숭배하는 세력이지 좌파가 아니다. 친북 세력은 좌파가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한 반역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조봉암의 복권은 친북 반역세력을 중심으로 뭉친 좌파세력에게 마음 고쳐먹을 기회를 제공할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조봉암을 복권시키는 큰 파격을 단행해 봄이 어떤가? 어차피 신익희나 조봉암이나, 조병옥이나 조봉암이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도전자고 훼방꾼에 불과하다. 신익희나 조병옥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어떤 집단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보상받을 때에 굳이 조봉암만 외면당한 것을 본다면 어저면 친북 주사파 세력은 어쩌면 조봉암의 부활을 내심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조봉암을 복권시킴으로서 신익희나 조병옥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집단을 견제할 수 있다.

한나라당과 우파정권이 크게 마음먹고 조봉암을 복권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한다면 친북주사파와 친북주사파들과 억지로 동거하는 좌파들 내부에서도 큰 파장이 발생할 것이다. 슨상과 노무현을 숭배하는 자들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자들이다. 그들은 남한의 붕괴를 바라는 자들이지 진짜 좌파는 아닐 테다.

조봉암의 복권으로 이런 슨상, 노무현 같은 주사파들과 진짜 좌파를 분리할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수 있다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친북 정권인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조봉암의 복권을 주저했을 정도이다. 조봉암의 복권은 의미가 크다. 조봉암의 복권으로 친북세력의 친북논리를 파괴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조봉암은 친북주사파와는 차원이 다른 대한민국체제에 적응한 좌파의 시초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에서 조봉암복권을 주저했던 것이다. 김일성이나 박헌영, 김원봉, 여운형과는 차원이 다르다. 친북종김정권 김대중, 노무현이나 김대중, 노무현의 아류는 백번 집권해도 조봉암을 복권시킬수는 없을 것이다.
큰맘 먹고 조봉암 복권을 시도해보자. 좌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파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위해서이다. 아무튼 조봉암 복권은 친북반역세력을 여러 가지로 견제할 수 있는 파급효과를 창출한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한나라당 정권에서 조봉암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를 해 본다면 의미가 깊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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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복권은 가능한가?
필명 : 독립당(펌) 날짜 : 09.01.27 조회 : 6
조봉암 복권은 가능한가?

김대중 노무현 두 친북용공정권 10년동안 여운형, 박헌영, 김원봉 등 수많은 좌익인사들이 미화되거나 영웅시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10년동안 한번도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 있다. 죽산 조봉암이다. 조봉암은 지금도 좌익세력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김대중, 노무현 두 용공정권에서 조봉암이 복권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조봉암은 생애 초년에 공산주의자였으나 나중에 전향했다. 조봉암은 처음 고등학교때 ymca 학당에 다니며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일본 유학중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는가 하면 조선공산당 창설의 주역으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가 46년 박헌영의 편협한 배타적 노선에 반감과 혐오감을 품고 46년 공개비판을 발표하고 전향했다.

그뒤 48년 5.10 제헌의원 총선거에 인천갑구에 출마해 당선되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2대 국회 부의장 등에 내정되기도 했다. 그뒤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이번에는 2위로 낙선했다. 그런데 58년 조봉암과 진보당이 용공혐의로 당은 해산당하고 관련자들은 줄줄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이 재판장에 서게 된 원인은 평화통일을 말했다는 것과 조봉암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양명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을 오가는 암상인 양명산에게 자금을 받은 일로 북한의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재판을 받고 최초 무기형이었다가 사형으로 형이 바뀌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김대중, 노무현의 연방제 통일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북한을 이롭게 하거나 북한과 연방제 형태를 하자는 내용은 없었다. 조봉암이 양명산에게 정치자금을 받은 것도 정치인이 별개의 활동을 할수 없는 여건을 고려한다면 정치자금은 문제될 수 없으며 1차 공판에서 북한의 자금을 받았다고 진술한 양명산은 뒤에 고문에 못이겨서 발표했다고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설령 양명산이 정말 북한의 정치자금을 받아서 조봉암에게 전달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조봉암에게 직접적인 죄가 될수는 없는 문제다.

조봉암은 46년 남로당 박헌영의 노선을 공개비판한 뒤에 전향했다. 그리고 당시에도 유행하던 종북주의, 친북 친김일성주의에 반대했다. 공산주의를 버렸고 친북노선에 반대했던 인사니만큼 김대중, 노무현 두 친북 용공정권에서 조봉암을 복권시킬수 없었던 것이다.

조봉암이 죽은 것은 대선 도전이 원인일 것이다. 대선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조봉암은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른 사건들은 과거사 파헤치기를 좋아하면서도 친북세력은 조봉암 사건을 파헤치고 조봉암을 복권시키는 일은 항상 주저한다.

친북주의자들은 다른 인사들 여운형, 박헌영, 김원봉의 복권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조봉암은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이건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반공주의로 전향한데 대한 원한과 보복이다.


조봉암의 복권은 한나라당의 몫이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이나 친북 용공정권, 공산주의 집단은 절대 조봉암을 복권시킬 수 없다. 조봉암의 평화통일 주장은 뒤에 나타난 박정희나 전두환, 노태우 등의 평화통일 주장과 맥락이 같으며 김대중, 노무현 같은 용공 연방제와는 전혀 맞지가 않는다. 게다가 지금도 조봉암을 배신자나 변절자라며 치를 떨고 있는 남로당원, 공산주의자들이 상당수 있는 마당에 친북세력에게 조봉암의 복권을 의뢰할 수는 없는 문제다. 조봉암의 복권을 시도해야 되겠다.

만에 하나라도 민주당이나 민노당이 집권한들 김대중, 노무현이나 그 잔당들은 절대 조봉암을 올바로 복권시킬 수 없다. 조봉암이 친북세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봉암이 사형되자 그것을 클로즈업 시키려고 북한에서 인위적으로 애국열사릉에 가묘까지 만들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한이 정통성,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지 북한이 조봉암을 높이 평가한다고는 볼수 없다.
망국적 친북 주사파가 아닌 세력을 저 주체사상 신봉파, 김대중, 노무현, 민노당 등 친북 용공세력과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그 역할은 한나라당이 해야 한다. 조봉암의 복권은 한나라당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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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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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강화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예전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으나 전향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호는 죽산(竹山)이다. 그래서 죽산 조봉암이라고도 부른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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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활동


[편집] 독립운동

강화공립보통학교와 경성ymca중학을 졸업하고 3·1 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소속 직원으로도 활동했다.[출처 필요] 그뒤 임시정부의 파벌싸움에 염증을 느껴 도일, 일본 주오 대학 전문부를 수료하였다. 모스크바 동방 공산대학 2년 수료하고,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1]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일파인 화요회의 회원이었다. 1930년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신의주의 감옥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2]

[편집] 광복 후

광복 후 공산주의활동을 벌이다가 박헌영과 갈등, 1946년,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어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지만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한 조봉암은 당시 배신하였다고 하여 북쪽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3]

[편집]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

1948년 5.10 총선거선거에서 강원명이 조봉암을 도와달라며 이범석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하였다. 역시 이범석의 총리 인준시 무소속 의원들이 협조를 부탁하자 조봉암은 군국주의자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4]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여 농지개혁법을 입안하였으며,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재선되었고,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5]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6]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참조.
이승만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등록조차 하지 못하였으나,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23.8%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선전하였다. 1956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참조.

[편집] 선거 패배와 사형

1956년 11월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였으나,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진보당 주요 간부들과 함께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조봉암과 가까웠으며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7] 장택상은 해방후 좌파탄압에 힘을 쏟던 사람이다. 조봉암이 사형되자 장택상은 개탄하였다.[8]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사형되었다. 사형집행 당시 죽산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사형전 성직자가 사형수를 위해 해주는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편집] 평가

조봉암의 죽음은 당시에도 억울하게 생각하는 견해가 있었다.[9] 1958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죽산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았다는 진술을 했다”고 보도하였고 1959년 7월 31일에 집행된 교수형 상황에 대해선 “양명산은 처형 직전 조선인민만세의 발악 언사를 하였지만 그에 비해 죽산(조봉암)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전했다. 간첩으로 판명된 양명산과의 사적인 관계 때문에 자신에게 씌워진 거짓 누명을 죽산은 시대적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10]
조봉암 재평가는 시작 단계에 있다.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인정하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

[편집] 가족




[편집] 참고자료

《대한민국 의정총람》, 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년

[편집] 주석

  1. http://www.rokps.or.kr/profile_result_ok.asp?num=76
  2.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1/08/200801080500001/200801080500001_3.html
  3.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1/08/200801080500001/200801080500001_4.html
  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67쪽
  5. http://www.rokps.or.kr/profile_result_ok.asp?num=76
  6. 한국에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한겨레 21 2007년 8월16일 제673호
  7.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1/08/200801080500001/200801080500001_3.html
  8.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1/08/200801080500001/200801080500001_4.html
  9.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1/08/200801080500001/200801080500001_4.html
  10.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1/08/200801080500001/200801080500001_4.html

[편집]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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