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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친일파 민병석 후손에 억대 부당이득 반환 소송
"국가에 귀속된 고양시 땅 매매대금 돌려줘야"
 
노컷뉴스 기사입력 :  2009/01/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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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27 14:21:51 ]
cbs사회부 이재웅 기자이재웅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물려받은 재산을 제3자에게 팔아넘겨 얻은 이익을 반환하라는 소송이 제기됐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국가는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민병석의 후손 민모 씨를 상대로 1억 6천200만 원을 돌려달라는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는 소장에서 "박 씨가 친일재산임을 알고 토지를 샀음을 인정할 자료가 없어 이를 국가에 귀속시킬 수는 없지만, 민 씨의 경우 특별법에 따라 국가가 취득한 땅을 법적 근거 없이 팔아넘겨 부당이득을 취했으므로 민 씨가 매매 대금을 국가에 돌려줘야 한다"고 밝혔다.

민 씨는 친일파 민병석 등으로부터 물려받은 경기 고양시 일대 밭 892㎡를 지난 2006년 9월 박모 씨에게 팔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행위로 얻어진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킬 수 있도록 규정한 특별법에 따라 2007년 11월 이 땅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이에 박 씨가 "친일재산이라는 것을 모르고 정당한 대가를 주고 산 땅"이라며 이를 취소하라고 소송을 내자, 1심은 박 씨의 손을 들어줬고 위원회는 항소심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에 비약 상고했니다.

대법원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관련이 없는 선의의 제3자에게 재산 취득에 따른 위험을 전가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의 최소화'라는 헌법 원리에 맞지 않고 거래의 안전을 해칠 우려가 크다"고 판결한 바 있다.


leejw@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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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흉급 친일매국노 민병석: 편집부

민병석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민병석(閔丙奭, 1858년~1940년)은 조선 말기의 정치인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제 통치에 적극 협조했다. 이완용은 그의 처내종으로 사돈간이 되며,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충청남도 회덕군 출생으로 1879년(고종 16년)에 식년시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명성황후의 지원 아래 집권한 여흥 민씨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이후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위기 상황에서 명성황후를 호위하여 총애를 받게 되었고, 1883년 승지가 되었다.
1884년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과 도승지를 겸하는 요직에 임명되었고, 갑신정변 때는 일본으로 달아난 김옥균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명성황후와 정적인 흥선대원군의 대결을 이용하려는 각국의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잠시 피해 있다가, 1888년 예조참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또다시 고위직에 머물렀다. 1889년부터 5년간 평안도에서 평안감사를 지내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고 조병세의 탄핵을 받을 만큼 악정을 펼쳤다.
여흥 민씨 세력이 대부분 초기에는 반일파에 속하여, 민병석도 처음부터 일본과 가깝지는 않았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청나라와 내통하여 일본을 몰아내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된 바 있고, 삼국간섭 이후 풀려났다가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집권했을 때는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과의 친분으로 내각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완용과 함께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전향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궁내부 특진관, 헌병대 사령관, 각부의 대신, 시종원경 등의 고위직을 지냈으며, 대한천일은행을 비롯하여 직조회사와 농업회사 경영에 참여하는 등 산업계와 금융계에서도 활동하였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초빙 작업을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1909년 자신과 가까웠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자 장례식에 박제빈 등과 함께 조문 사절로 다녀왔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경술국적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 협력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에는 이왕직 장관이 되어 의민태자이방자의 정략결혼에 깊이 개입하였다.[1] 1912년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2]
192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5회 중임하였고, 친일 애국금체회의 발기인이었고, 그의 아내 심경섭(沈卿燮)은 그 간사였다.[2]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3][4]
1940년 8월 정 2위 훈 1등으로 사망했다.

[편집]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자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민홍기와 함께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다른 아들인 민복기도 법조 부문 친일 행위자로 포함되어 있다.
2007년 5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민병석 소유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5]했고, 11월 22일 제3차 재산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민병석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6] 민병석의 후손들은 민병석의 재산은 친일 행위의 댓가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며 불복 소송을 제기했다.[7]

[편집] 가족 관계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민병석 : 조선인 대지주로 손꼽힌 민씨 척족의 대표 (서영희)〉,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편집] 주석

  1.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145. isbn 9788986072037.
  2.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80쪽. isbn 8971990368.
  3. 성강현.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4년 3월 18일 작성. 2008년 4월 16일 확인.
  4. 성강현.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4년 3월 18일 작성. 2008년 4월 16일 확인.
  5. 이민정. “재산 환수되는 친일파 9인은 누구? - 권중현·이완용 등 을사오적 중 일부 포함”, 《오마이뉴스》, 2007년 5월 2일 작성. 2008년 5월 22일 확인.
  6. 임은진 기자. “왕족 이해승 등 친일파 재산 410억 국가귀속 - 이해승ㆍ이지용ㆍ유정수ㆍ고희경ㆍ민영휘ㆍ민병석ㆍ송병준ㆍ한창수 등”, 《연합뉴스》, 2007년 11월 22일 작성. 2007년 11월 22일 확인.
  7. 김태종 기자. “친일파 후손, 재산환수 불복 소송”, 《연합뉴스》, 2007년 11월 27일 작성. 2007년 11월 27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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