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서울의 한 호텔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81회 생일 축하모임이 열렸다. ys가 틈만 나면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비난해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를 잘 아는 한 참석자도 그날은 놀랐다. ys는 헤드테이블에 앉자마자 dj를 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둘러앉은 이들은 ys의 기에 눌려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 이목희 논설위원
dj 언행의 객관적인 옳고 그름은 별개의 문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색하고 dj를 비판할 이는 ys뿐이다. 이런저런 이들이 dj를 겨냥해 보지만 경량급들의 얘기는 묻혀 버린다. 또 dj 지지자들이 겁이 나 ys처럼 직설 어법을 쓰지 못한다.
정치권에서는 ‘짬밥’이 중요하다. ys·dj 모두 이제는 정계를 은퇴했다. 그러나 40여년간 한국 정계를 주물러온 두 사람의 ‘짬밥’을 따라갈 이가 없고, 앞으로도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 dj의 정치 훈수 한마디에 야권이 요동치고, 정부·여당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대북 정책과 국회 운영을 둘러싸고 현 집권층과 계속 각을 세우고 있다. 그제는 용산 참사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이렇듯 dj가 사사건건 나서는데 숙적 ys가 가만있을 리 없다.
ys의 상도동계, dj의 동교동계가 흩어지긴 했지만 그 끝자락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여야간의 극한 대립의 근원을 살피면 ys·dj의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한다. 여권내의 친mb파와 친박파의 대립 역시 정도의 차는 있으나 양인간 갈등이 격세유전처럼 바닥에 깔려 있다. 인맥을 넘어 더 중요한 것은 정치행태다. 국회에서 폭력과 날치기가 횡행하는 헌정사적 책임 소재를 찾으면 ys·dj에게로 향한다. 정치인들이 누구에게서 극렬 투쟁의 방법을 배웠겠는가.
ys·dj가 드리운 그늘의 큰 희생자는 그들 이후의 대통령들이다. ‘짬밥’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했다. 대통령이 가진 제도적인 힘에도 불구, 마음 깊은 곳의 경외심을 이끌어 내기엔 정치 경력이 너무 일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여의도 정치권을 멀리하려는 것 역시 그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ys·dj를 어떻게 할 것인가. 2005년 양인을 화해시키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동서지역 화합, 민주화세력 재결합 등 구호가 거창했다. 정의화 의원, 한화갑 전 의원 등이 앞장섰다. 결과는 실패였다. 두 사람간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고, 화해하기에는 노인들의 고집이 너무 셌다. 최근 들어 몇몇 인사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ys·dj간 화해를 재추진해 보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dj가 왼쪽으로 갈수록 ys는 오른쪽으로 간다.
바라는 바는 ys·dj의 고백성사다. 양인이 후배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호소문을 발표했으면 좋겠다. ‘영원한 총재님’은 이제 없다고 강조해 줬으면 좋겠다. 권위는 오랜 정치투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위치에서 나와야 민주사회로 나아간다는 점을 강조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공동호소문이 불가능하다면 그냥 손이라도 맞잡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줬으면 한다. ys·dj도 화해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화합하지 못할 일이 있느냐는 메시지라도 보낼 수 있다. 모레는 민족의 명절 설날. ys·dj가 찾아온 정치권 인사들 앞에서 상대를 헐뜯지나 않았으면 한다. 덕담이 오가다 보면 조금씩 해빙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