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두산 동쪽 기슭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에 세워놓은‘13호 국경비’(점선 안). 오른쪽에 북한 쪽을 바라보고 있는 북한군 병사와 북한 초소가 보인다. 이곳에는 국경비 푯말 외에는 국경임을 알수 있는 울타리나 철조망이 없다. / 조선일보 db
압록강사람들은 보통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이라 생각한다. 막연하게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동서로 흘러내린 물이 두만강과 압록강이 된다'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대축적 지도를 보면 두 강의 발원지는 천지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압록강―천지―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조·중(朝中)국경은 백두산 부근에서 어떻게 그어져 있는 것일까?
현재의 국경선은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체결된 조약에 의한 것이다. 김일성(金日成)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서명한 '조·중 국경조약'(중국에서는 변계(邊界)조약)이다.
북한과
중국은 현지 조사를 거쳐 1964년 3월 20일
베이징(北京)에서 박성철(朴成哲)과 천이(陳毅)가 '조·중 국경에 관한 의정서'에 서명해 국경을 확정했다. 이 조약과 의정서의 내용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가 최근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의정서는 압록강 상류에서 천지, 천지에서 두만강 상류에 이르는 지역을 대부분 자로 댄 듯 직선으로 금을 그어 영토를 분할했다. 이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1호'부터 '21호'까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국경비 28개(1·20·21호 3개, 2호 2개)를 세웠다. 국경비는 높이 155㎝와 129㎝의 두 종류다.
본지가 2004년 중국 쪽으로부터 '13호 국경비' 일대 현장을 취재해 보니 국경비로부터 20m 정도 떨어진 초소에서 총을 멘 북한군이 들락거리며 경비를 서고 있었고 그 앞 동서 방향으로는 북한군과 중국군이 공동으로 순찰하는 폭 10여m 정도의 흙길(국경선)이 있었다. 만약 국경비를 못 보고 그냥 초소를 지나쳤더라면 아찔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백두산 천지
'1호 국경비'가 있는 곳은 압록강 상류와 2152m 고지 동쪽의 지류가 만나는 지점으로 동경 125도 5분, 북위 41도 56분이다. 여기서 지류를 따라 3.05㎞ 북서 방향으로 올라간 곳에 '2호'가 있고 여기서부터 직선으로 북서 방향에 '3호'와 '4호'가 있다.
'4호'와 '5호' 사이의 국경은 등고선을 따라간다. '5호'는 천지의 남서쪽, '6호'는 북서쪽에 있는데 이 두 국경비를 잇는 국경선은 천지를 가로지른다. '6호'부터 '20호'까지는 동쪽 방향으로 거의 직선으로 그어졌으며 '7호' '8호' '14호' '18호'에서만 약간 꺾어진다. '20호'와 '21호' 사이는 두만강의 지류인 홍토수(紅土水)를 국경으로 한다.〈지도 참조〉
이 국경비들이 이은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 공백지대의 국경선의 총 길이는 45.09㎞로, 압록강 상류에서 '5호'까지가 8.31㎞, '6호'에서 두만강 상류까지가 31.47㎞, '5호'와 '6호' 사이 천지를 관통하는 국경은 5.3㎞다.
이 같은 국경을 만든 1962년의 조약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우선 "중국의 압력으로 백두산과 천지의 일부를 떼어 줬을 뿐 아니라, 간도 땅을 중국에 넘겨준 1909년 청·일간의 간도협약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반면 "간도협약에서 석을수(石乙水)를 기준으로 정한 국경보다 훨씬 북쪽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북한 쪽에 유리했다"는 시각도 있다.
지금까지 후자는 주로 중국측의 견해였으나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힘을 얻고 있다. 이형석 한국땅이름학회장은 조·중 국경조약으로 인해 북한이 이전보다 280㎢의 영토를 더 확보하게 됐다고 계산했다. 백두산 천지 역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찾은 것'이라는 얘기다. 최근 논문 '백두산·압록강·두만강 국경 연구'를 발표한 서길수 서경대 교수도 "조약 직후 백두산의 중국 변방군이 북쪽으로 철수했다는 현지 증언이 있다"며 북한측에 유리했다고 보고 있다.
중국이 북한에 양보한 것이라면 왜 그랬던 것일까? 당시 중·소 분쟁의 와중에서 친중 노선을 따르고 있던 북한을 배려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1984년 서울을 방문한 북한 적십자회 간부가 "중국에 백두산 절반을 할양한 것은 전적으로 김일성 주석의 용단이었다"고 발언하는 등 북한이 양보한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2006년 황장엽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증언이다. "1958년 김일성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을 때 백두산이 중국 땅으로 표시된 지도를 보고 화가 나서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김일성이 '백두산은 예로부터 우리 땅'이라고 항의하니 저우언라이는 '천지 절반을 갈라 나눠 갖자'고 제의해 국경조약이 이뤄졌다.
두만강
결국 양쪽 모두 백두산 전체를 '자기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할'을 '양보'로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약이 체결된 지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북한·중국이 모두 조약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양쪽 모두에게 불리한 부분이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박선영
포스텍 교수는 최근 1964년의 의정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찾아냈다. '9호'와 '10호' 사이, 9호 동쪽 1229m 지점에 국경을 관통하는 강이 있는데, 이 강의 이름을 '토문강(土門江)'이라고 명기한 것이다.
의정서에 흑석구(黑石溝)라고도 쓴 이 강은 본지 확인 결과 현재 중국측 지도에 묵석구(墨石溝)로 표기돼 있으며 백두산 부근에서 발원해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오도백하(五道白河)와 합류한다. 1712년(숙종 38) 백두산 정계비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으로 삼은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가 아니라 두만강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주장을 스스로 뒤집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과
중국은 압록강·두만강의 수많은 섬들을 어떻게 나눴을까? 서길수 교수는 "북·중 국경의 451개 섬 중에서 북한 섬은 264개, 중국 섬은 187개"라고 분석했다. 섬의 전체 면적으로 보면 북한 소유가 85.5% (87.73㎢), 중국 소유가 14.5%(14.93㎢)였다.
섬의 대부분이 북한으로 귀속됐기 때문에 중국 길림성 국경 부근에선 "김일성이 저우언라이에게 '섬들을 모두 가져가는 대신 옛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集安)을 우리에게 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저우언라이가 섬들을 다 줘 버렸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서 교수는 "국경조약 2조 1항에 '조약 체결 전에 이미 한쪽의 공민(公民)이 살고 있거나 농사를 짓고 있는 섬과 모래섬은 그 국가의 영토가 된다'는 조항을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조약이 ▲양국 모두 공인하지 않고 있는 비밀 조약이며 ▲통일 이후 북한 정권이 비합법적 정부로 인정될 경우 승계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법적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1909년의 간도협약은 을사늑약으로 부당하게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우리 땅 북쪽의 국경과 영토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나 다름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