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선거경제/복지미디어전쟁국제정치.경제민족/통일사회/사법군사/안보문화/스포츠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교육/과학   고대사/근현대사   고향소식/해외동포   포토/해외토픽   해외동포모임방   자유게시판   남북민족문제토론방   사법피해자모임방   사랑방  
편집  2017.10.18 [05:04]
고대사/근현대사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사"
[발언론 전문] "청나라 시절, 한국의 만주영토 침탈" 공식사과도
 
뷰스앤뉴스 기사입력 :  2009/02/15 [01:28]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사"
[발언론 전문] "청나라 시절, 한국의 만주영토 침탈" 공식사과도
네티즌 격노 "'제2의 이완용' 잡아내라"
2006-09-08 15:38:58 기사프린트 기사모으기

중국의 <동북공정> 2차 역사침공에 대해 우리 정부는 "아직 중국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니다"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발뺌에 급급하다. 급기야 정부를 감싸던 집권 열린우리당마저 8일 야당들과 함께 정부의 굴종주의 외교를 질타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저우언라이 1963년 발언록'

한심한 것은 2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1차 침공때 한방에 중국정부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주요 문건의 존재를 우리 정부가 까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억 중국인들이 마오쩌둥(毛澤東)보다 더 존경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관련기사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뉴욕 메트뮤지엄 '중국관' 역사날조

나의 최종목표는 , 대한민국주도하에 남북한모두를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건져내는것!
 

말로만의 聯美和中 , 과연 가능할까?
 
더 늦기 전에 평양을 통일한국의 수도로 확정 선언해야!
김정일정권의 붕괴가 곧 통일이라는 발상은 어리석고도 위험한 착각!
독도 문제와 중국의 고구려사 침탈문제및 북핵문제를 하나의 문제로 인식할줄 알아야-
바이칼에선 동명성왕을 고구려칸이라고 부른다
북한, 중국의 또 다른 '티벳'될 수 있다!
위기의 시대임을 숨기거나 통찰할줄 모르는자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띠움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감히 저우언라이를 부정할 간 큰 중국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저우언라이 문건>은 더없는 전가보도이나, 우리 외교부는 이 문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듯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개탄을 낳고 있다.

저우언라이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 맞다"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중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체제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결과 중공의 발언권은 지대했다. 당연히 이를 악용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백두산 등 북한영토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 일각의 국수주의 움직임이 있었다.

◀ 생전의 저우언라이 총리. 그는 대국의 역사침공과 쇼비니즘을 경멸한 거인이었다. ⓒ연합뉴스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사과했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우선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영토 침탈에 공식 사과도

저우언라이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을 사과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한 시대의 거목다운 깨끗한 역사인식이자 사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 역사침공을 벌이고 있는 현 중국 지도부는 저우언라이의 표현을 빌면 졸렬한 '쇼비니스트'에 불과하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제발 우리 정부가 더이상 '굴종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를 바라며, <저우언라이 문건' 전문을 싣는다.

◀ 저우언라이 발언록. ⓒ연합뉴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28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환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제2시기는 혁명의 시기이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가 우리를 침략해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고, 일본은 또다시 동북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이 시기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은 혁명적 동지관계를 구축했다. 이 단계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풍부하다.

큰 단계로 구분해 보면, 10월혁명 이전은 우리나라 구민주주의혁명의 시기였다. 조선 또한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이 때는 갑오전쟁에서 10월혁명까지 20여년의 시기였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은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10월혁명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두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탄생했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던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각 지역 어디나 있었지만 동북지방에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이후 중국혁명의 모든 역사단계에 조선동지가 참가하게 되었다.

최용건(崔庸健)위원장 말에 의하면, 당시 조선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와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고, 이 성공이 조선혁명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10월혁명 초기 조선동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동지들이 중국에 와 군사관련 업무를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방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운남강무당이 있었다. 이후 손중산 선생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조선동지들이 입교하였다. 그 때가 1924-1927년으로 최용건, 양림동지가 당시 교관이었고 많은 동지들이 학생으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대혁명 때 혁명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던 날 밤 광주(广州)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조선동지들이 희생되었다. 최용건 위원장은 그 때를 아직도 기억하는 데, 당시 160여명의 조선동지들이 광주 사하(沙河)와 한하(韓何)의 진지를 결사적으로 지켜내다 거의 대부분이 용감하게 희생되었다. 당시 최용건 동지가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차례 합의를 거쳐 광주의 그 진지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광주열사능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대혁명 실패 이후 즉 1928년 이후 조선동지들은 중국에서 비밀공작에 많이 투여되었는데, 상해, 동북 등지의 노동운동에 참가하거나 농민운동과 학생은동에 뛰어들었다.

확실히 10월혁명 초기에는 조선동지들이 이런 혁명사상을 품고 중국에 왔다. 공개투쟁, 비밀투쟁, 정치투쟁, 무장투쟁을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 중국혁명을 도왔다. 중국혁명투쟁이 승리한 이후, 다시 조선혁명 승리를 추동하였다. 1931년 "9.18"포성 이후 상황이 변했다. 조선은 일본식민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동북 역시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는 비록 동북에 괴뢰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일 뿐이고 실제로는 조선과 동북은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동지가 중국혁명투쟁에 참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공동투쟁이며 연합투쟁으로 이것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지식이다. 당시 김일성동지 영도하의 항일유격전쟁은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연합투쟁이고 공동투쟁이라 인정해야 한다. 동북항일연합군과 같은 경우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일연합군으로 해석해야 되고 사실 역시 이와 같다.

내가 이번에 최용건위원장과 이효순(李孝淳)부위원장 그리고 박외상(朴外相)과 함께 동북 하얼빈, 장춘, 심양 등을 가서 항일혁명의 노전우들과 얘기를 통해 이런 견해를 실증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세가지 노선이 있었는데, 왕명(王明)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의 지도아래 소위 당시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방침은 바로 도시폭동이었다. 그러나 도시에는 역량이 안됐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동시에 농촌무장투쟁도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동북농촌에서 일어난 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조선동지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당시 동북으로 망명한 조선동지들은 농촌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농민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거나 혹은 조선족 거주지역에 살았다. 그래서 농민을 봉기시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가 용이했다. 그리하여 "9.18"에서 항일전쟁 승리 때까지 10여년간 많은 항일부대가 창설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 많은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현재 이 역사단계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항일연합군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연합군이고 기념관은 모두 이 같은 해석에 따른 것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조선동지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이며, 더우기 조선동지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간주하면서 다수가 조선에서 망명해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왜곡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망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혁명대오 중에 나타난 대국쇼비니즘 잔재의 하나이다. 만약 항일전쟁 역사단계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면 동북에 참가했던 항일연합군에 대해 --- 북경에도 있지만--- 연구반을 조직하여 어떤 때는 조선에 가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제의한다. 반대로 조선동지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공동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만 역사적 진실성을 회복하고 전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역사단계 이외도 해방전쟁과 반장개석 투쟁과정에서도 많은 조선족동지를 흡수하여 조선사단을 구성하였는데, 항미원조(抗美援朝) 이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중국의 해방전쟁에 영웅적으로 참가했고, 이후에 또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혁명역사 단계에서 쌍방은 서로를 지지한다. 또한 조선동지가 중국동지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동지가 조선을 지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시간 역시 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의의에서 본다면, 혁명박물관과 군사박물관에 진열된 물건들은 아직도 더 보충되어야 하며 수정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지난번에 최용건위원장을 모시고 동북에 갔을 때, 나는 박물관을 관장하는 동지를 찾아 이미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제3시기는 현재를 말하는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심화단계에 있어 보다 서로를 배우고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상 뿐만 아니라 혁명투쟁중에서 쌍방은 이미 제국주의와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경험했고 양국은 정확히 인식의 일치와 행동의 일치를 경험했다. 더 적확하게는 피로써 맺어진 전우이자 동지적 우의를 맺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여기고 있는데, 중국의 전선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진영의 동방전초기지로 간주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을 당신들의 후방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특히 동북은 당신들의 근거리 후방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와서 참관하거나 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서 참관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다. 다만 지금 목전의 일을 보면, 여러분들이 역시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다. 방금 우리는 예를 들면서 그들(중국과학원 □□夫원장을 가리키며)을 비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들은 20여명이 42일 동안 방문했는데, 그들은 겨우 7명만이 조선에 가서 30여일만 머물렀다. 바로 이런면을 여러분에게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동북국, 동북3성 성위원회가 금년 겨울 참관단을 구성하여 여러분에게 찾아가서 도시공작활동과 농촌활동, 당내 활동, 총노선, 천리마운동, 청산리활동 방법과 대안활동체계를 배울 것을 결정했다.

우리 동북의 동지들이 여러분들에게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동북에 사람을 파견해 연락을 직접 취할 수 있다. 평상시에 이렇게 밀접한 연결이 있어야만 일단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간주하고 여러분들도 우리를 여러분의 후방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야만 장벽이 생기지 않고 협조가 원활하지 못한 결함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당 공작활동이나 도시공작, 농촌활동, 공업교통공작 뿐 아니라 여러분의 분화활동 역시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번에 조선대사관 대사와 이야기를 마쳤는데, 영화공작단을 파견해서 적색선전활동가의 창작경험을 배우고, 농촌에 가서 진정으로 배우고, 이선자(李善子)의 진짜 이름인 이신자(李信子) 방문하고, 청산리에 가서 또한 배우고자 한다. 이런 사본과 영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선인민의 공작을 배우고, 힘들지만 소박한 농촌생활의 작풍과 설득경험 그리고 생산투쟁과 계급투쟁의 경험을 배우고자 한다. 그런후에 연극무대와 은막에 선보이려고 한다. 중국예술가의 소개를 통해 중국인민에게 조선인민의 실제생활과 전투생활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들의 노래와 춤 또한 배울 가치가 있다. 여러분들은 주체사상으로 음습한 기풍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의 춤과 노래는 민족화가 그렇게 강하지 못해 좀 잡다하고 뒤죽박죽인 편이다.

최용건위원장이 동북의 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세차례의 만찬을 준비했는데 장춘에서 가장 실패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는데 조선의 풍격같지가 않았다. 또한 "동방홍(東方紅)"을 들어도 서양풍이 너무 강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홍군 춤"이라는 무도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노인과 젊은이가 등장했다. 이를 민속무용으로 알았으나 사실은 발레였다. 젊은 홍군은 여성이었는데 발을 뾰쪽하게 세우는 춤이었으나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선동지들이 보고나서도 반응이 시원잖았고 우리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진이 원수가 문화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었다.

조선동지가 매우 솔직하게 우리의 어떤 것들은 주체사상이 없이 동쪽에서 하나 끌어들이고 서쪽에서 하나 가져온 것에 불과하며, 침구나 먹거리 또한 옛것, 새로운 것, 중국 것, 외국 것이 구분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도 대외문화위원회도 어떤 동지가 있는데, 가지고 나갈 작품에 주체사상이 없어 밖으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많은 동작이 있기는 하지만 주의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면서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조선양국 문화협정>의정서가 체결됨에 따라 우리는 가무극단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혁명사극으로서 태평천국시대에 상해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로 <소도회(小刀會)>이다. 여기는 당연히 시대풍격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화인데 유럽의 신이 아닌 중국의 신으로 역시 풍격이 있다. 우리의 신의 모습은 하느님과도 다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의 문화예술은 많은 부분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또하나의 문제는 문자에서 발생하는 간극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나는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황장엽(黃長燁)동지가 이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글에는 세 종류의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평양과 서울 그리고 연변이 그것이다.

평양의 표준은 당연히 전형적인 표준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선동지 조선인민이 모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이 이 표준에 따라 말하고 문장을 써야 한다. 평양에도 주음(注音)이 있지만 이미 한자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인용했던 여러 중국성어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인용하는 조선성어는 민족화되었다.

서울의 표준은 여전히 한자이다. 남조선은 여전히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중국성어 인용을 좋아해서 북조선인민이 알아듣지 못한다.

연변의 표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부 말하는 방법조차 바꿨다는 데 있다. 듣기로는 조선말과 일본말이 말하는 방법에서 상당히 가깝다고 한다. 예를 들면 "我吃□"을 "나는 밥을 가지고 먹는다"고 한다. 연변말은 중국말을 받아들여 변화되어 왔다. 어떤 말은 이렇게 중국말처럼 바뀌었다. 두번째는 일본통치시기에 소위 협화어라는 일본인이 썼던 한자가 복잡하게 섞였기 때문에 연변의 말이 깨끗하지 못하다. 세번째는 보다 많은 것은 많은 중국한자성어를 끌어다 쓰다보니 소리음마저도 중국음으로 발음한다. 이렇게 되어 조선동지들조차도 그들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홍기>라는 잡지를 조선말로 출판해서 평양에 가지고 가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특히 경제용어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문자 이 문제를 해결해 말하는 것을 알아듣게 해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늘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을 제대로 통역했는지 하는 것이다. 역시 여러 동지를 평양에 파견에 심도있게 배우도록 해야겠다. (대외문화위원회 증영(曾瑛)동지를 가리키며)당신들이 연출하는 가무극의 자막은 반드시 평양의 표준적인 사람을 찾아 번역토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제3시기의 관건은 말하고 쓰는데 있다. 배워서 통하지 않으면 손해다. 그래서 먼저 번역대오를 정비해야 한다. 조선동지와 내왕하려면 반드시 평양표준을 따라야 한다.

여러분은 이번에 자연과학을 참관했는데 대략 적잖은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자연과학 자체는 계급성이 없다. 다만 우리들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와, 여러분을 접대하는 일 그리고 유람과정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대국쇼비니즘 잔재가 남아있는지 여부를 살피도록 해 주었다. 생활, 문화오락에 주체가 조금 없이 표현된 점이나 말이 평양표준에 맞지 않는 것 등은 아마도 다음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대국쇼비니즘이 없기를 바라지만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는 이를 면하기 어려움도 있다. 여러분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태견 기자    


회원댓글(0) 비회원댓글(0) 필자의다른기사 의견보내기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침공 파문 에 관한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뷰스 only 에 관한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
 
 
 
 
 
주은래,저우언라이,周恩來 지란지교

2007/01/26 16:08



복사 http://blog.naver.com/myhnam/20033244702




[출처] 주은래,저우언라이,周恩來|작성자 토네이도

 

 

 

 

▲ 주은래 전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에피소드

 

그는 한 나라에서 결코 낮은 관직이 아님에도 저우언라이가 늘 강조하던

말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큰일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서와 수행원들에게 언제나 일의 세부적인 면까지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한다고 당부했으며,

'대충' '아마도', '그럴 수도 있다' 따위의 말을 가장 듣기 싫어했다.

 

한번은 베이징호텔에서 외빈 초청 만찬이 있었는데,

준비상황을 보고받던 그가 이렇게 물었다.

 

"오늘 저녁 딤섬에 어떤 소가 들어가는가?"

"아마 해산물이 들어갈 것입니다." 수행원이 대답했다.

곧 저우언라이의 호통이 이어졌다.

 

"아마 들어갈 것 같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렇다는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외빈들 중에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어서

문제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을 질 건가?"

 

저우언라이가 외국 손님과의 만찬에 앞서 자주 주방을 찾았던

이유는 준비상황을 알아보려는 것 말고도 또 있었다.

 

보통은 주방까지 행차해서 하는 첫마디가

"어이, 주방장 국수 한 그릇 말아주게" 였다.

 

처음에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를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금 있으면 정성껏 준비한 맛나는 연회 음식을 드실 텐데 갑자기

왠 국수를 달라고 하실까?' 그래서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총리 각하, 식전에 국수를 왜 찾으십니까?"

"귀한 손님을 불러놓고 내가 배고프면 어떡하나.

그러면 먹는 데만 급급하게 될 것 아닌가?”

 

자신은 먼저 국수로 간단하게 요기하고 실제 연회에 나가서는 대충

먹는 시늉만 하면서 손님이 식사를 잘하는지 정성껏 챙기려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에피소드

 

그는 한 나라에서 결코 낮은 관직이 아님에도 저우언라이가 늘 강조하던

말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큰일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서와 수행원들에게 언제나 일의 세부적인 면까지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한다고 당부했으며,

'대충' '아마도', '그럴 수도 있다' 따위의 말을 가장 듣기 싫어했다.

 

한번은 베이징호텔에서 외빈 초청 만찬이 있었는데,

준비상황을 보고받던 그가 이렇게 물었다.

 

"오늘 저녁 딤섬에 어떤 소가 들어가는가?"

"아마 해산물이 들어갈 것입니다." 수행원이 대답했다.

곧 저우언라이의 호통이 이어졌다.

 

"아마 들어갈 것 같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렇다는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외빈들 중에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어서

문제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을 질 건가?"

 

저우언라이가 외국 손님과의 만찬에 앞서 자주 주방을 찾았던

이유는 준비상황을 알아보려는 것 말고도 또 있었다.

 

보통은 주방까지 행차해서 하는 첫마디가

"어이, 주방장 국수 한 그릇 말아주게" 였다.

 

처음에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를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조금 있으면 정성껏 준비한 맛나는 연회 음식을 드실 텐데 갑자기

왠 국수를 달라고 하실까?' 그래서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총리 각하, 식전에 국수를 왜 찾으십니까?"

"귀한 손님을 불러놓고 내가 배고프면 어떡하나.

그러면 먹는 데만 급급하게 될 것 아닌가?”

 

자신은 먼저 국수로 간단하게 요기하고 실제 연회에 나가서는 대충

먹는 시늉만 하면서 손님이 식사를 잘하는지 정성껏 챙기려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가 아직도 중국 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까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세심함 때문이다.

 

미국의 닉슨대통령도 "저우언라이는 아무리 큰 일이라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격언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무 한 그릇 한 그릇을 직접 가꾸면서도

숲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줄 알았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방문 세번 째 날, 베이징에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그날 저녁 일정은 탁구경기 관람이었다.

 

탁구경기 도중에 저우언라이가 슬쩍 자리에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갔다.

닉슨이 얼마 후 돌아온 저우언라이 에게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더니,

 

저우언라이는 다음 날 일정인 만리장성 유람을 위해 가는 길에

쌓인 눈을 미리 치워놓도록 지시하고 왔다고 대답했다.

 

 

중국 속담에 '바다가 광활한 수 있는 것은 하천의 물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산이 높을 수 있는 것은 한 삽의 흙이라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다.

 

누구보다 디테일을 중시했던 저우언라이의

당부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충고로 다가온다.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작은 일은 시골마을의 이장 들이 하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람은,

큰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일조차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또 '관직이 높으면 일하기가 더 수월했다. 지시만 내리면 옆에서

보좌하는 사람들이 뭐든지 다 해주니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설사 높은 관직에 올라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뿐더러 오래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좋은 습관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

습관은 모자이크처럼 일상생활의 작은 부분들이 하나하나 쌓여 형성된다.

 

'선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악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명심보감의 구절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더 깊게 보자면,

습관은 인생의 근본이 되는 기초로서, 그 수준이 인간의 발전을 좌우한다.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도 모두 완벽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치기는 아주 쉽다. 작고 사소한 부분을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디테일을 중시하고 작은 일을 세심하게 처리하는 습관을 길러라.

성공은 바로 매일매일의 노력이 쌓여 계속 발전해나가는 과정이며

그 어떤 요행도 통하지 않는다.


 
메이어트 인터내셔널의 회장인 빌 메리어트는

디테일의 중요성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실패는 디테일에서 나오고 성공은 시스템에서 결정된다."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작은 일을 하는 데 쏟아 붓는다.

그런데도 그 작은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작은 일을 무시하고

하늘에서 거창한 임무가 뚝 떨어져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과시할 수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못한다.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03.05~1976.01.08

 

江蘇省 淮安에서 출생하였다.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天津의 南開 중학에 입학하였으며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등에서 청강하기도 하였다.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 공산당 파리支部를 창설하였다.

1924년 황푸[黃織]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되었고,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上海 봉기를 지도하였다.

1931년 廣西省 군사부장·제1방면군 정치위원으로서 지도하였다.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長征에 참가하였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 26년간(51세~78세까지) 총리를 지냈다.

 

저우언라이 평전-바르바라 바르누앙·위창건 지음|유상철 옮김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는 중국 위인 중에서 특별한 호감을 주는

인물이다. 격렬한 혁명의 와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품위를 잃지

않았던 드문 인물이었다고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이런 저우의 이미지에 “사실은 안 그런 면도 있더라”며 본격적으로 의문을

던진 것은 리즈수이(志綏)의 회고록이다. 22년간 毛澤東 주치의를 지낸

리의 책은 1995년 ‘모택동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이 책에는 저우가 마오 앞에서 강아지처럼 무릎을 꿇고 보고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저우언라이 평전’은 극단을 오가는 저우의 두 이미지 사이

에서 그의 진짜 이미지를 추적하고 있다. 78년 생애를 살면서 저우의

이미지가 가장 크게 흔들린 시기는 문화혁명 시기일 것이다.

“저우는 수많은 고위 군 간부들을 비판하고 숙청하는데 동참했으며 문혁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더 많은 당과 군 간부들을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고발했다.”

성장기와 혁명기, 국가건설, 문화대혁명 등 연대기식 서술을 하고 있는

이 책은 저우가 26년간이나 총리 자리에 있으면서 마오쩌둥 밑에서 생존을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를 조목조목 기술하고 있다.

 

류샤오치(劉少奇) 전 국가주석 부부와 허룽(賀龍) 장군 등 절친한 혁명

동지들의 숙청을 나몰라라 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겨냥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들도 실려있다.

 

무엇보다, 저우가 고위 간부들을 심사하는 자리인 중앙특별안건심사소조의

수장으로 있을 때 이 조직이 수백명의 당간부를 심사, 숙청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책의 결론은 온건하다.

 

당시 주어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 한 저우의 초인적인 노력을 최종적

으로, 온전히 인정한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절대군주 마오의 지시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던 저우는 과연 동지들과 인민들이 학정에 숨져가는

것을 간접적으로 조장하면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목적이 일신의 안위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국가와 인민을 위해서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저우언라이 평전’은 단순한 평전이 아닌 한 인간의 실체

찾기 기록이다. 글 속에 ‘그러나’라는 단어가 무수히 나오는 것도 진실 추적

의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위대한 이인자들 - 데이빗 히넌

 

영광에 집착하지 않는 종교적 모습의 또 다른 2인자가 주은래다.

주은래는 가장 고전적이고 대표적인 2인자의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898년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주은래는 텐진의 명문중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1921년 7월 그는 상해에서 조직된 중국공산당의 유럽조직책이 되었다.

모택동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시절 주은래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구성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조직의 최고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모택동보다 월등히 앞서 나가고 있었다.

 

1935년 대장정 때 주은래는 자신에게는 없는 지도자적 자질이 모택동에게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모택동은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과

그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잡한 주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능력이 있었다. 모택동은 항상 대중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했고, 그와 인민들

사이에는 친밀한 교감이 오갔다.

 

주은래는 모택동을 홍군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최고자리를 내주는 게 기분

좋았을 리 없지만 그런 생각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모택동만이

중국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지도자 자질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민중을 이끌고 혁명을 완수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주은래의 정치적 통찰력과 겸손이 역사의 변화를 이루었다.

융통성 있는 볼셰비키로 불려지는 그는 욕심이 없었기에 당원들 사이에

신임과 존경을 받았다. 주은래는 항상 언제 어떻게 물러나야 할지를

알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편하고 조용히 처신하며 친구를 만드는 데

능숙했던 그는 모든 상황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모택동은 주은래 에게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주은래는 모택동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대체로 그늘에 있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대중이 느끼지 못하게 처신했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1순위를 거부한

유일한 공산주의자였다.

 

중국공산당 내에서 개인적인 파당을 형성하지 않았고, 모택동과 반대되는

파벌을 만들지도 않았다.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요청을 받았지만 주석 직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모택동을 반대하는 내분을 일으켜 중국에 이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포용하는 것이 중국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1949년 10월 수립된 중국 정부의 총리가 된 주은래는 북경 거리의 청결문제

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를 처리하면서도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국제 정치가이자 협상가로서 중국의 산업화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가 미국

뿐임을 깨달은 그는 닉슨 대통령을 초청해서 과감한 역사의 반전을 이룬다.

 

주은래는 하루에 16시간에서 18시간을 일했다. 6번 수술을 받고 위암과

싸우면서도 외국손님과 몇 시간씩 담소를 나누고 60명 이상의 외국원수

및 고위인사들과 만남으로써 중국을 세계에 알렸다.

 

1967년 8월 26일 홍위병의 폭도들이 주은래를 가택 연금시킨 채 이틀 반

동안 못 자게 하고 음식도 주지 않았었다. 모택동은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채 했다. 일부 공산당들은 주은래를 모택동의 가정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결국 모택동은 나중에 주은래를 버렸다.

 
 
 

모택동은 죽어가는 주은래를 방문하지 않았으며, 사망소식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인민들은 주은래의

죽음을 모택동의 그것보다 더 슬퍼했다. 1백만 명의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거리로 몰려 나왔다.

 

중국문제 전문가 딕 윌슨은 주은래를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사랑 받고

뛰어났으며 가장 성공적이고 완벽했던 정치가라고 평했다. 주은래는

존경스럽고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인간적인 지도자였다.

▲  주은래와모택동
 
 
 

저우언라이 속내는…“마오를 주석 추대한 건 나의 과오”

 

“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 실패의 한 장면이다.”(1975년 12월 28일)

 

마오쩌둥(毛澤東)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인자였으면서도

끝까지 마오를 지지해 ‘마오의 평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개인정보취급방침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대표전화 :010-6432-7771
Copyright ⓒ 2007 인터넷 민족신문. All rights reserved.
Contact baek43333@hanmail.ne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