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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약산 김원봉 장군
약산 김원봉의 잃어버린 70년/손정태
 
손정태 기사입력 :  2009/03/03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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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의 잃어버린 70년(1) 
 
 

머릿말
◎왜 붓을 들어야만 했는가?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은 밀양이 낳은 위대한 항일독립운동가이다. 혼미했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민전(民戰:민주주의민족전선의 약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동년 4월 9일 북으로 들어간 뒤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등을 역임하다가, 1958년 말경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끝으로 숙청되어 버렸기 때문에 약산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해가 금년으로 꼭 50년째가 되었다.

북에서의 약산의 행적은 공식적으로는 밝혀진 정보가 거의 없어서 자세히는 알 수 가 없지만, 어렵게 얻은 북한사람들의 표현을 빌려보면 “김원봉은 조선노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건설계획을 반대하는 엄중한 과오를 범하였기 때문에 법에 의하여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1972년 주중 북한대사관 김영진(金英眞) 2등비서관이 약산과 함께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유자명(柳子明) 선생에게 전한 말)”라고만 전하고 있을 뿐이고 북한에서 숙청될 당시, 죄명은 무엇이며, 처벌을 받았다면 과연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아무것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어서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마침 2008년은 약산이 탄생한지 110주년이 되는 해 이자, 항일독립전쟁의 진정한 영웅이였던 약산이 직접 조직했고,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히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바 있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창립7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가 되었음에도, 중국국민당정부군이나 팔로군 측으로부터 국제우의군(國際友誼軍)이란 평가를 받으며 그들과 더불어 피 흘려 싸웠던 조선의용대의 빛나는 업적이 간과(看過)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약산과 조선의용대의 존재의미 조차 망각(妄覺)속으로 묻혀 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귀중한 독립투쟁사의 일면을 일깨우고자 이글을 적는 것이다.

◎김원봉의 生
김원봉이 태어날 즈음인 구한말 밀양의 시대상항은 조선조 성리학의 조종인 점필재의 저항정신과 임진·정유왜란을 극복한 사명대사(泗溟大師)의 충의정신을 숭상하던 연계소(蓮桂所)를 중심으로 한 낙향 또는 은거한 선비들이 지역여론 형성의 주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이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이곳을 출입하던 선각자들인 단애 윤세복(檀崖 尹世復), 회당 손일민(晦堂 孫逸民), 백민 황상규(白民 黃尙奎), 일봉 김대지(一峰 金大池)선생 등이 일찍부터 간도(間島)지방으로 떠난 선구자들로서 이들에 의해서 일제에 대한 밀양인들의 저항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향리의 선각자로서 밀양에 남아 교육사업을 펼치던 을강 전홍표(乙江 全鴻杓)선생으로부터 배일사상(排日思想)과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은 나라를 지킬 군대가 없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우리의 군대를 키워야 한다”는 상무정신(尙武精神)을 교육받은 소년 김원봉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는 오직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한 무력으로써 만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서 다니던 중앙학교도 중도에 그만두고, 고향을 떠난 선배들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머물고 있던 간도를 찾아서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건너간 김원봉은 우선 천진의 덕화학당(德華學堂)과 남경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주로 외국어를 공부를 했고, 본격적으로 간도로 나아가서는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해서 폭탄제조법과 군사학 등을 배웠다. 1919년 11월 10일에는 길림에서 3.1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간도로 망명해온 동지들을 규합해서 항일투쟁사에서 길이 남은 테러조직인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고 의백(義伯:단장의 다른 호칭)에 취임했다.
 

밀양폭탄사건(密陽爆彈事件)과 조선총독부폭탄사건(朝鮮總督府爆彈事件) 등을 비롯해서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모두 23회에 걸친 의열투쟁(義烈鬪爭)을 펼쳐오던 약산과 의열단은 무정형의 파괴 암살조직에서 탈피하여 형식을 제대로 갖춘 정치조직으로 탈바꿈시켜 독립투쟁을 이끌 간부들을 훈련해 나가야겠다는데 의견을 모으고는 그 준비 단계로 결사적인 항일군대를 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민중을 무장시키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부터 무장해야 하겠다고 결심한 김원봉은 수많은 동지들의 반대와 의열단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에도 연연하지 않고, 일개 사관생도의 신분이였지만 체계적인 신식군사교육도 받을 수 있고 중국에서 활동하려면 결국에는 인맥을 구축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인 손문(孫文), 장개석(蔣介石), 요중개(寥仲愷), 주은래(周恩來)등이 중심을 이룬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에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약산이 의열단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는 물론이고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朝鮮政治軍事幹部革命學校)>를 운영한 것이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도 무장부대를 창설하고자 했던 근본 목적도 결국은 빼앗긴 국토를 도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려면 기필코 자체 무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손정태문화원이사
작가: [ 손정태 ] 래원: [ 밀양신문 ] 발표: [ 2008-6-18 12:13:53 ] 

 
약산 김원봉의 잃어버린 70년(2) 
항일의지에 불타는 조선인들 중앙군관학교로
▶조선인 특별훈련반이 운영되다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朝鮮政治軍事幹部革命學校)>에서 3기에 걸쳐 125명의 항일독립투쟁에 필요한 핵심요원을 양성하고,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일에 주력하고 있던 약산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의 항일전쟁이 단지 그때까지 잃어버린 중국 땅을 탈환하는데 국한되지 않고, 대륙의 일제 침략세력을 없애고, 조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중국인들도 일본이라는 우리와 동일한 적을 두게 되어서 재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항일활동에 있어서도 우리의 입장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한결 편해진 느낌이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중국의 항일정세에 보조를 맞추어 민족통일전선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자 계획하고 있던 중 마침 7월 10일에 국민당정부 하기훈련단이 있는 강서성 여산(廬山)에서 장개석(蔣介石)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이 김구(金九), 김원봉(金元鳳), 유자명(柳子明) 등 조선의 좌우익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회합을 갖고 한·중연합항일전선의 구축과 이를 위한 재정지원을 제의하였다.
세 사람은 이 제안에 즉각 동의하고 모든 한인 독립운동진영은 통합과 단결을 위한 노력을 배가하였다.
 

7월 12일에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당원들에게 중일전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한인비행사 20명을 선발하여 낙양(洛陽)으로 집결시키고, 자신이 교육시켜둔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 출신 청년당원들을 중일전선에 파견했다.
연이어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자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단체들은 가일층 연합하여 <조선민족연맹(朝鮮民族聯盟)>을 결성하였다.
 

이 조선민족연맹의 투쟁강령에서 ‘국외 여러 지역의 민족무장부대와 연합하여 통일적인 민족혁명군을 조직하여 민족혁명투쟁을 실행한다’고 명확히 규정하고는 9월 하순 남경에서 중국국민당중앙당부 군사기관 별동대 대장 강택(康澤)과 협의를 마치고, <조선민족혁명당> 및 <한국광복운동연합회>와도 협의한 뒤, 남경의 화로강(花露崗)에서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청년당원 83명을 모아서 12월 1일 강서성 여산록(廬山麓) 파양호반(播陽湖畔)에 자리잡고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성자분교(成子分校) 특별훈련반에 편입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한인특별반의 학생감독은 왕웅(王雄: 逸曙 金弘壹의 이명), 학생 겸 통역에는 이정호(李貞浩), 김세일(金世日), 번역관은 주세민(周世敏)이 맡았다.
교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2월 12일 남경이 함락되자 교육생들은 호북성 강릉소재 중국육군군관학교 강릉분교(江陵分校)로 피난하여 훈련을 속행했다.
 
 
제1대대 제4중대에 소속된 한인특별반은 조선인 83명과 중국인 21명(계104명)으로 편성하고, 한국인 교관에 김두봉(金枓奉), 윤세주(尹世?), 김홍일(金弘壹), 왕지연(王志延: 한빈의 이명)을, 제1구대장에 상위 이익성, 부구대장에 중위 왕수의, 견습사관은 최갈성, 이세영, 정의부, 이지강 등 4명이 배속됨으로써 한인들만의 독자적인 교육훈련이 가능해 졌던 것이다.
1938년 5월 17일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김원봉은 중앙당 간부들인 왕해공(王海公: 신익희의 이명), 왕현지(王現之: 이영준의 이명), 최석순, 이집중, 이춘암, 김두봉, 이건우(李健宇: 최창익의 이명) 등과 함께 호북성 강릉으로 가서 특별훈련반의 졸업식이 5월 24일로 결정되었음을 알리고 곧 개최될 제3차 임시전당대회에서 학원들의 졸업 후의 공작방침과 당의 통일문제에 대한 학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김원봉은 1938년 5월 19일부터 3일간 강릉에서 민족혁명당 제3차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민족혁명당의 진로문제와 항일투쟁전략에 관한 사항들을 다루었으나 김원봉의 계획과는 거리가 멀고 김원봉의 지도력을 무시하는 듯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되고 말았다.
「첫째: 전체 항일세력과의 연대를 위해 민족혁명당의 투쟁을 동북만주로 확산시켜 무장투쟁한다.
둘째: 국민당정부 소속으로 분산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고 민족혁명당 당군(黨軍)으로서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한다」라고 결의함으로서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이 표면으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동북진출노선이 초보적으로 나마 결정됨으로서 김원봉의 지도력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다.
 

최창익(崔昌益)은 민족혁명당을 계급정당으로 규정함으로써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시도했고 김원봉은 비계급정당이며 협동전선 형태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통합한 단일정당체제로 ‘일제타도’ ‘한국독립’ ‘민주공화국건설’의 이념을 고수했던 반면 최창익은 반대로 각 그룹의 개별성을 고집했다.
 

무장투쟁 지역도 김원봉은 국민당정부 관할구역에서 대일 군사활동을 주장한데 반해 성자분교에서 교육중인 청년당원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최창익은 중국공산당 영향하에 있는 화북과 만주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한 결과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회의를 개최한 학원들도 전체 토의를 거치면서 비밀당원들의 결속으로 만주로의 진출 및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과 연합하여 점진적으로 당의 단결을 강화할 것을 다수의견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김원봉의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나는 결과였던 것이다. 김원봉은 학원들을 만주에 파견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당대회를 이용해서 최창익 등 민족혁명당내 공산주의자들을 제어하려 했던 것이다.
1938년 5월 24일 국민당정부군 특무기관책임자 강택(康澤)과 국민당정부군 제78사장 및 강릉현장(江陵縣長), 그리고 김원봉을 비롯한 민족혁명당 제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졸업식을 거행한 졸업생들은 5월 31일 교관 김홍일(金弘壹:일명 왕웅)의 인솔하에 기선을 타고 호북성 사시(沙市)를 출발하여 악양(岳陽)을 거쳐 중국항전의 중심지인 무한(武漢)으로 이동하였다.

손정태문화원이사
작가: [ 손정태 ] 래원: [ 밀양신문 ] 발표: [ 2008-6-18 13:05:39 ]
 

약산 김원봉의 잃어버린 70년(3) 
항일의지에 불타는 조선인들 중앙군관학교로-2
▶ 무창(武昌) 동호반(東湖畔)의 조선청년들
6월 2일에 한구(漢口)에 도착했고, 6월 3일에는 다시 양자강(楊子江)을 건너 무창(武昌)의 장지동(張之洞:지금의 자양로 234호) 에 있는 대공중학교(大公中學校:현,湖北省總工會)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다.  
 

이 대공중학교는 1911년 손문(孫文)이 일으킨 신해혁명의 발발지로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신해무창기의공정영발란처(辛亥武昌起議工程營發難處)구지> 라고 하는 역사적인 장소인데, 1912년에 세운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이 함락되자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학교 전체가 흥산(興山)으로 이전해 버리고, 학교가 비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현,무창실험소학교(武昌實驗小學校:옛, 兩湖書院 자리)구내에 중앙군관학교 무한분교(中央軍官學校 武漢分校)도 자리하고 있고 장개석을 비롯한 국민당지도부도 역시 동호반(東湖畔)에 위치한 무한대학교(武漢大學校)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별 무리 없이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청년들이 대공중학교에 주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민족전선연맹에서도 민족혁명당 지도부인 김약산 박차정 부부,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 허정숙 부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관 두군혜 부부,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 유칙중 부부 등은 양자강 북쪽 무한항(武漢港) 부근에 있는 일본조계813가(지금의 승리가15호)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특히 엽검영(曄劍英), 동필무(董必武)를 비롯한 후일 팔로군의 지도부가 될 이들도 함께 이 부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창에 도착한 이후 당지도부에서는 주력부대의 동북진출에 관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제 정보문서 《사상휘보(思想彙報)》에 따르면 약산을 비롯한 민족혁명당의 간부들은 자신의 지위 보전에 미련을 품고 당대회의 결정에 바탕을 둔 동북으로의 무장부대 진출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중국국민당과 타협하여 청년당원들을 모두 중국내에서의 사업에 돌리려 했다고 적고 있다.  
 

만약 주력부대가 국민당정부의 관할권을 넘어 동북으로 진출한다면 얼마든지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가 있었겠지만 이 병력에 대한 재정부담을 담보 받을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 약산으로 하여금 동북진출(東北進出) 방침을 우유부단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약산이 결국 동북진출 로선을 포기하고 종전처럼 국민당정부와의 합작을 주장하게 되자 일찍부터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최창익 일파는 마침 이것을 구실로 삼아 공개적인 탈당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청년무장부대가 무창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민족혁명당 내 비밀조직인 <공산주의전위동맹원(共産主義前衛同盟員)>들은 최창익, 김학무, 왕해공 등이 주동이 되고 공산당원 11명, 특별훈련반 출신 학생 35명 등 모두 49명이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구로 건너가 영성신촌에다 근거지를 정한 뒤 <재한구조선청년전시복무단(在漢口 朝鮮靑年戰時服務團)>을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在武漢朝鮮靑年戰時服務團)>으로 개칭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러한 일연의 소요는 약산의 지도력에 대한 도전이였고, 약산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였을 뿐만아니라 그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창익 일파는 탈당후, 말한대로 동북으로의 진출을 행하지도 못했고 여전히 한구에 남아 항일선전활동에만 종사하였다. 약산의 그늘을 떠난 그들은 조직적으로는 독립한 상태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아직 자립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1940년(昭和15년) 3월에 고등법원검사국 사상부에서 비밀문서로 작성된 《사상휘보 (思想彙報)》제22호에 의하면 약산의 당시 동정(動靜)을 이렇게 적고 있다.
「김원봉은 당의 분열방지 및 청년층 획득을 위하여 7월초순 중국군사위원회에 대하여 민족전선연맹의 청년분자들로 조선의용군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여러 전투구역에 배속시키므로써 제일선공작에 진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제안하였으나 군사위원회에서는 조선민족단체 전부의 가맹활동을 전제조건으로 삼아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의 회답을 하였다.그래서 약산은 즉시 전시복무단 및 김구(金九)파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대하여 그 취지를 전달하고 통일당조직에 협력할 것을 선동하였는데 김구파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최창익이 이끌던 전시복무단은 마침 경제문제로 고심중에 있었으므로 즉석에서 이를 찬동하고 9월에 조선청년전위동맹 이라고 개칭하여 약산의 민족전선연맹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이에 좇아 중국군사위원회에서도 조선의용대조직방안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약산이 처음 조선의용군조직방안을 제안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당의 분열을 방지하는 동시에 청년 당원들을 자기 주위에서 단합시키는데 목적을 두었으나 조선의용대 성립과 관련된 제문서를 약산을 비롯한 조선측에서 직접 작성하여 제출한 바는 없었다.  
다만 무한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던 일본혁명지사 아오야마가즈오(靑山和夫)가 작성한 <국제의용군조직계획방안(國際義勇軍組織計劃方案)>이 전부인데, 아오야마는 본명이 흑전선차(黑田善次)인 일본공산당원으로서 무한으로 오기 전에는 베트남에서 활동하였고 무한에 도착한 후에는 국제문제연구소 고문으로 초빙되어 적정연구 및 반전사업에 종사하면서 국민당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자이다. 그 무렵 아오야마는 민족전선연맹과도 이미 연락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무한거류 조선인 상황에 대하여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탄생은 일본혁명지사 아오야마가즈오(靑山和夫)가 조선의용대조직계획방안을 작성해서 국제문제연구소장 왕봉생, 정치부장 진성,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 등 중국측 요인들로부터 얻어낸 결과물인데,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서는 1938년 9월에 들어서서도 의용군조직계획에 관한 승인사항을 비밀에 부치고 공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에 무창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측 청년대원들의 근황을 김학철(金學鐵)의 회고에 따라 정리해 보면, 「최창익을 비롯한 50여명은 한구로 건너가 새단체를 만들고 분열해 나가버렸지만 약산, 백연(金枓奉), 석정(尹世?), 한빈 선생 등 네 분의 지도자를 신뢰하고 존경한 우리들은 분열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한대학 맞은편 동호반(東湖畔)의 고사포 진지 근처로 숙영지를 옮겼다. 당시 무한대학은 장개석의 통수부-<대본영>이 되었으므로 고사포군이 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무한대학 구내 교수사택들에는 장개석 부부를 위시한 국민당정부 요인들이 묶고 있었는데, 중공(中共)대표 주은래와 곽말약(郭末若)도 포함되어 있었다.(중략) 
당시 무한과 중경 사이를 하루 한 번 왕복하는 항공편이 있었는데, 쓰이는 항공기는 비행정(수상 비행기)이었다. 무한대학 바로 옆에 있는 동호계류장에서 떠서 무창쪽 강가에 착수해가지고 타승객들을 태운 다음에 다시 뜨는데, 돌아올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다 승객들을 내려놓고 동호계류장에 들어와 밤을 지내곤 했다. 이 비행정의 조종사 하나가 마침 우리나라 사람이었던 까닭에 우리는 양자강 기슭에서 동호계류장까지 한 10분씩 비행정을 공짜로 얻어 타보고 크게 만족해 콧노래를 부르며 설날 기분이 되기도 했다. 9월초에 동호반의 숙영지를 철거하고 전원 한구로 건너와 구름다리 밖(양자강과 한수(漢水)가 합류하여 강줄기가 Y자로 이루는 지점에 놓여있는 다리를 말함)구 일본인 조계지(현 승리가 15호 부근)에 일본인들이 버리고 떠난 집들을 잡고 들었는데 우리 몇몇에게 차례진 집들이 어쩌나 아담한지 분수에 넘칠 지경이어서 우리는 죄송스런 마음마저 없질 않았다」

손정태밀양문화원이사
작가: [ 손정태 ] 래원: [ 밀양신문 ] 발표: [ 2008-6-18 16:08:39 ] 
 

약산 김원봉의 잃어버린 70년(4) 
조선의용대 탄생하다
▶조선의용대 성립과정(成立課程)
약산은 민족혁명당의 노선을 놓고 ①중국 관내에 계급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어서는 안되며, ②구성원 모두는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강령이 동일하므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이념적 구분을 없애야 하며, ③중국내 공작 및 그 배경이 동일하므로 국민당 지구 내에서 대일 군사작전에 종사해야 하고, ④중국내 각 단체 구성원의 상황이 근사하고 각 단체의 성질과 공작이 동일하기 때문에 결코 계급정당이 될 수 없으니 통일전선정당을 유지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에 반하여 최창익은 민족혁명당은 계급정당이 되어야 하고, 통일전선은 당 밖에서 전선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며,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한 화북과 만주로 나아가 직접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팽팽히 대립을 하다가 최창익을 비롯한 49명의 일파가 집단으로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전위동맹(前衛同盟)> 을 결성하고 약산의 지도력에 도전하게 된다.
약산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속에서도 약산은 무장부대의 건설만은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부터 추구해 왔던 기본 노선인데다가 이미 군관학교 출신자를 100여명 보유하고 있어 인적자원도 어느 정도 확보 되었고, 주변 여건이 조선인 독자무력의 건설을 절실히 요구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무장부대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약산이 조선인 무장부대를 만들면서 김구(金九)가 이끄는 광복단체연합회측에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광복단체연합회측은 이 제안을 거절 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 한대로 최창익이 이끌던 전위동맹측은 경제난으로 독자생존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혁명당에는 재입당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무장부대에 참여할 의사를 표시해 왔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군사위원회가 승인해 준 조선인 부대는 정식 전투부대가 아니고 중국의 항전을 보조하는 부대 정도급의 수준이긴 하였지만 약산의 황포군관학교 은사이자 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인 주은래(周恩來)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1938년 10월 10일 약산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항일전쟁의 수부도시인 무한의 한구지역(漢口地域: 추측컨대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일본조계지로 지금의 승리가 15호 부근으로 보인다)에서 역사적인「조선의용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결성식에는 조선인들뿐 아니라 중국의 군·정 관계요원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이날 군관학교 졸업생이 중심이 된 100여명의 대원들은 배지 하나씩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한문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라는 다섯 글자와 영문으로 ‘korean Volunteer’라는 글자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조선의용대창립 기념사진에 나타나 있는 99명이 대원의 전부는 아니었고, 김학철옹의 회고에 의하면 사진촬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을 합하면 도합 130~140여명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창립기념사진의 배경이 된 건물을 찾기 위해 필자가 한구지역을 방문해서 조사해 보았으나 사진 속 건물의 모습이 규슈의 구마모토(熊本)에 있는 이즈미신사(出水神社)를 닮아서 우리 대원들이 주둔했던 곳이 일본조계지이고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신봉하던 신사를 접수하여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것으로 추측은 할 수 있었지만 그 후에 미공군기의 폭격도 빈번히 있었고 요즈음도 도시재개발을 활발히 전개하며 일제잔재를 대부분 지워내고 있는 중이여서 지금에 와서 그 건물을 찾을 길은 도저히 없었다.(지난해 말 일부 매체를 통하여 호북성총공회 자리가 조선의용대 창립기념사진 촬영지였다는 보도는 제보자의 착오였으므로 한구의 일본조계지내 신사 앞으로 바로잡습니다)
 

다만 부대 창설 후 3일째가 되는 1938년 10월 13일 오후 7시 무한기독청년회(武漢YMCA) 강당에서 성대한 기념연회가 개최되었다는 10월 14일자 신화일보 기사를 쫓아 현지를 답사해 보니 중산대로(中山大路)와 여황피로(黎黃陂路)의 곡각지점에 있던 옛 무한YMCA 주 사무실 건물(여황피로 중산대도 1090호)들은 1944년 11월 4일(음력)부터 시작된 미공군기의 폭격으로 거의 파괴되었고, 이후 새로운 백화점 건물(迪昇名牌世界: Dickion百貨店)이 들어섰으므로 당시의 근거를 찾을 수 가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백화점 건물 뒤편에서 해방이후 지었다는 다른 주거시설들과 함께 조선의용대 창립기념연회가 열렸던 3층으로 된 바로 그때 그 강당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감개가 무량했는지 모른다.
 

붉은 벽돌조 3층으로 지어진 강당은 지금은 주거공간으로 개조되었지만 건물의 1층 중앙 현관부분에서 2층과 3층으로 통하는 계단과 2층과 3층에 냈던 각각 14간의 창문의 모습도 본래대로이고 규모도 옛날에 웅장했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정태밀양문화원이사
작가: [ 손정태 ] 래원: [ 밀양신문 ] 발표: [ 2008-6-18 16: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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