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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세월을 산 고려무장 김방경
 
야후블로그 기사입력 :  2009/04/0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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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인물열전
영욕의 세월을 산 고려무장 김방경
2009/03/02 오후 9:35 | 한국사인물열전

영욕의 세월을 산 고려무장 김방경 (金方慶 1212∼1300 )


무장으로서의 길



 김방경은 안동(安東) 김씨이며 경순왕의 10대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문의 배경으로 인해 16세에 무시험으로 관직에 오르긴 하였지만,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뛰어난 덕망을 고루갖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무장으로서 길을 걷게 된 것은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 兵馬判官)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였지만, 부임초부터 거대한 전쟁의 폭풍에 정면으로 맞서야만 되었다. 바로 세계최강 몽골군의 침공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김방경은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하는등 장기 농성체제를 갖추며 수차례에 걸친 원제국의 침략에도 끄떡없이 방어해 냈다.



 하지만 고려 24대 원종이 왕위에 오른1259년 고려와 몽골의 화의조약이 성립되면서, 그의 입지는 조금 어중간하게 되어 버렸다.

  원종이 즉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최씨 무인정권을 제거하고 권좌를 차지한 김준일당에 의해 정권이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김준은 원종이 몽골에 볼모로 가 있던 시절, 원종의 동생이었던 안경공을 왕위에 올리려고 시도할 절도로, 원종과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김방경은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무장으로서의 길을 지켰다. 1263년(고려 원종 4)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上將軍)으로 오르기까지 하였다. 또  김준 일당과의 마찰로 인해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기도 하였지만, 왜구격퇴의 공이 참작되어 서북면병마사로 복직되었다.
 그리고  잠시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때 몽골은 쿠빌라이가 황제로 등극하여 원제국을 선포한 상태였다.
 쿠빌라이칸은 고려가 무력에 의한 굴복이나 투항이 아니라, 협상에 의한 항복이었다는 점에서  원종이 볼모로 잡혀있을때도 왕의 예로 대하였으며 고려의 독립도 보장해 주었다. 김방경역시 인물됨과 뛰어난 학식으로 인해 쿠빌라이칸의 깊은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그가 고려를 비운사이, 고려에서는 반란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고려조정은 여전히 강화도에 있었는데, 개성으로 환도하여 왕권을 되찾으려는 원종과 대몽항쟁을 구실로 권좌를 유지하려는 김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이에  원종은 1269년 임연(林衍)으로 하여금 김준을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오히려 임연은 김준을 제거한 후 안경공(安慶公)을 왕위에 옹립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이 원종의 태자 왕심에 의해 원제국에 알려지자, 쿠빌라이칸은 김방경으로 하여금 맹격도(孟格圖)의 군사 2천명과 합세해 진압하려 하였다. 비록 원종복위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우리민족사로 볼 때는 원제국의 앞잡이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황이 여이치 않을 것으로 판단한 임연이 원종을 5개월만에 복위시킴으로써, 민족의 배신자로 전락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임연은 1270년 등창으로 인해 병사하고 말았으며, 그 일당역시 원종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 이렇게 환도 반대파를 모두 제거한 원종은,  개성으로의 환도를 단행함으로써 1230년부터 시작된 몽고와의 전쟁을 종결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원종의 개경환도에 대해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권좌를 위해서도 탐욕을 위해서도 아닌 민족의 자존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일어선 삼별초(三別抄)였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지만, 최씨 무신정권몰락 이후에도 대몽항쟁에 언제나 선두를 지켰던 군사조직이었다.
 언제나 고려를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싸워왔던 그들은, 하루아침에 원제국의 군사조직에 편입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270년 배중손(裵仲孫) 의 지휘아래 승화후(承化侯)를 왕으로 옹립하고 근거지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 반원민족항쟁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삼별초 진압에 대한 추토사(追討使)직을 김방경이 맡게 된 것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추토사직을 맡게된 김방경은 무척이나 난감하였다. 그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구국의 이념으로 함께 싸웠던 전우들이 아니었던가?  김방경은 삼별초 진압에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원제국의 지휘관 아해는 수만의 군사로 거듭 공격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해전에서 보기좋게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1271년이 되자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아해대신 부임한 지휘관은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1244∼1291)였다.

그렇다면 홍다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의 조부와 그의 아비 복원(福源)은 1231년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해 오자 싸우지도 않고 성을 들어 몽골군에 항복했다. 특히 복원은 그 후 서경의 낭장으로 복무하면서 고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부군의 토벌을 받고 몽골로 쫓겨간 일이 있을정도로 뼈속까지 매국반역자였다.

 또 몽골왕실에 밀착하여 고위직에 올라 몽골이 고려를 칠 때마다 앞잡이가 되어 갖은 횡포를 다 부렸으며, 몽골에 인질로 가 있던 고려의 왕족 안경공(安慶公)을 모함하다가 몽게칸이 보낸 군사들에게 맞아 죽어 일생을 맞쳤다. 안경공의 부인이 몽골의 황족으로서 그녀가 몽게칸에게 복원의 흉계를 직소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허무하게 죽었으면 그 아들 홍다구라도 정신을 차릴만 하건만, 몽게칸이 죽고 쿠빌라이칸이 즉위하자 재빠르게「억울함」을 호소, 아비의 직책을 계승했다. 철저한 아첨근성과 고려에 대한 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은 그는 고려군민총관(高麗軍民總管)이 되어, 이후 고려를 끝없이 억압하였으며 김방경과도 악연을 이어갔다. 

  매국변절자의 지휘아래 있어야 했던 김방경, 더구나 그가 쳐야 할 상대는 한때 뜻을 함께하고 고난을 나누었던 전우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김방경은 고려가 삼별초 진압에 지나치게 방관적이라는 문책을 언제까지 무마할 수 없었다. 홍다구 정도의 인물이라면, 세치혀를 놀려 삼별초와 고려조정이 힘을합쳐 원제국에 대해 반란을 획책하려 한다는 참언을 하는 것은 대수롭지도 않을 것이다.

 김방경은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반원정책이 원종의 뜻이었다면 그대로 따르겠지만, 원종은 원제국의 힘을 이용하여 무인세력을 종식시키고 또 원만한 우호관계속에서 피폐해진 이땅과 백성들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지금의 고려전력으로는 원제국의 가공할 전투력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되었다.
 원제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북송인 수백만명을 고려로 끝없이 밀어넣는 인해전술도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란 말이 있지만, 김방경으로서도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원종의 충실한 신하였기 때문에 삼별초와 연합하여 고려조정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김방경은 삼별초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일단 김방경이 나서자, 삼별초 군도 곧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1271년(원종 12)에는 원제국과 합세해서 진도에 총공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진도는 함락되었으며 배중손은 전사하였고, 승화후는 홍다구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고려가 아직 대몽항쟁을 하고 있을당시 위도라는 곳에서 농성전을 해본 경험이 있었던 김방경은, 섬에서 농성하는 장단점과 공략법 그리고 방어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별초는 이 같은 타격속에서도 놀랍도록 다시 부할하였다.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병력만을 이끌고 제주도(濟州島)를 점령하였는데, 1년여 만에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대로 가다간 국가가 분열되고, 이것을 빌미로 원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이 더욱 극심해 질 것이 분명하였다. 특히 원종 14년(1273) 1월에 삼별초는  합포(현재 마산)를 공략하여 전함 32척을 소각하고 몽고병사 10여 명을 척살하는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원제국도 1만명의 원군을 증파하여 김방경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고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제주도 본진으로 총공격을 나섰다.
 한편 삼별초는 연이은 승전으로 인해 다소 경비체제를 소흘히 한데다가, 3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오는 1만명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이후 김통정은 1273년 4월에 전사하였고, 잔여병력 1천 3백 명도 포로로 잡혔다. 이렇게 삼별초의 항쟁은 3년만에 끝났고,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김방경은  시중(侍中)이라는 최고직책에 까지 올랐다. 

 시중이라면  내무장관정도의 높은 직책이지만, 그 같은 명예가 과연 그가 감수해야될 불명예를 가려 줄 수 있을까? 진정한 무장으로서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어야 하는 것일까? 자결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자결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가 자결이라는 방법으로 삼별초와의 충돌을 피한다고 하여도, 홍다구 같은 인물에게 전권이 돌아간다면 고려조정은 상상을 초월한 굴욕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요구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고려의 충신으로서 또 한사람의 군인이자 무장으로서, 결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가야할 길은 오히려 분명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원제국에 끝내 항복한 고려왕조가 그에게 드리운 무겁고도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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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리플 후감상요
09/04/09 (목) 오전 3:03   [simkto]
학교때는 등한시 했던 국사가 나이 드니 이제사 재미가 붙는군요. 감사합니다.
09/04/09 (목) 오전 4:27   [dukenaeyang]
김방겸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었다. 병을 핑계로라도...
결국 홍다구와 별반 다를바 없는 매국노에 불과한 인물일뿐, 제주도 바닷가 풀에덮힌 성벽 밑에 잠들어 있는 삼별초의 영웅들과 비교조차 하지 마라! 매국노는 영원히 매국노일뿐...
09/04/09 (목) 오전 6:01   [mch4256]
김방겸인지 별로 배울게 없는 영웅과는 거리가 먼 시대의 변절자로 밖에 볼수 없는 너무나 평범한 한 인간이다.
09/04/09 (목) 오전 7:45   [makibili]
탐라 오우뢍캐를, 평정하신. 김 방경장군님 만세 만세!만만세!!!
09/04/09 (목) 오전 9:10   [rhkdwntkfkd]
명문이다.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보기드문 절창이다. 냉정한 해석이고 절제된 문장이나 읽는 나는 감상에 사로잡히니 웬일일까?
09/04/09 (목) 오전 9:57   [은선도]
허접한 쓰레기같은 논리..딱 뉴똘들 논리구만..매국노들 핑계거리~
09/04/09 (목) 오전 10:11   [nasakorea]
고려사에 이런 인물도 있었군요...
09/04/09 (목) 오전 10:15   [minsu_yun]
김방경은 삼별초에 합세하엿어야 햇다,
09/04/09 (목) 오전 11:32   [투가리]
헉.박명수가 왜 저기..
09/04/09 (목) 오후 12:51   [dlfdjtjwk2000]
고려때 남경은 어디인가요 ?
서경이 지금 평양이라면 개경을 기준으로 북동쪽인데
왜 서경이라 칭 하였을꼬...?
진도/제주도가 지금 남한의 진도가 정말 맞는감요 ?
탐라는 왜 뜬금없이 제주도라 칭 하였을꼬?
濟州道의 濟字와 산동반도의 濟지역과는 친연성이 없는감요?
- 역사학계의 의견을 들어서 해설해 주시면 무한히 감사하겄습니다
09/04/09 (목) 오후 1:49   [synnseagul]
홍다구와 김방경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 감사합니다.
09/04/09 (목) 오후 3:13   [황태]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는 해석이네요. 중국의 송나라조차 멸망시킨 세계최강국이자 북방의 패주가 마음만 먹었다면 고려는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죠. 아마 고려황실이 자주독립만을 주장하였다면 백성들과 국토는 수십년간의 전쟁에 휩싸이고 결국 몰살을 당했을 수도 있거든요. 군통수권자의 결정에 따를수밖에 없는 군인의 길, 군인의 눈물은.... 얼빠진 자존심같은 일시적 감정으로 도저히 알수가 없는겁니다. 위대한 김방경장군이라고 칭해야 마땅한거죠.
09/04/09 (목) 오후 4:34   [이쁘네]
고려는 몽공에 빨리 항복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면 당시의 고려인들에게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몽고는 인구가 얼마 안되지만 동유럽과 지중해까지 지배하는 상황이라서 고려가 몽고에 일찍 합병되었다면 고려인들은 고려뿐 아니라 중국과 다른지역에도 상층부에서 많이 활동을 하여 사실상 고려가 몽고와 같이 원제국을 지배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09/04/09 (목) 오후 5:55   [hrk0312]
고려는 몽공에 빨리 항복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면 당시의 고려인들에게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몽고는 인구가 얼마 안되지만 동유럽과 지중해까지 지배하는 상황이라서 고려가 몽고에 일찍 합병되었다면 고려인들은 고려뿐 아니라 중국과 다른지역에도 상층부에서 많이 활동을 하여 사실상 고려가 몽고와 같이 원제국을 지배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09/04/09 (목) 오후 5:58   [hrk0312]
오랫동안 무신정권이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강화도에서 백성들은 어떻게 되던 대몽항쟁을 한다고 백성들을 수탈하여 당시 백성들중에는 몽고군보다 고려조정이 더 무섭다고 하였다고 합니다,몽고는 항복하면 보복을 않지만 대항하고 피해를 입히면 무자비하게 보복을 하였습니다,
09/04/09 (목) 오후 5:59   [hrk0312]
그런데도 일부 무식한 천민 촌들의 백성들은 고려의 천민에서 벗어나려고 공을 세우려고 몽고와 싸워 피참학게 죽기도 하였습니다.이길 수 없는 대몽항쟁으로 몽고의 보복으로 경주의 봉황사 9층 탑도 소실되고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일본의 교또 같이 천년이 넘는 목조 9층탑이 있었다면 관광 자원으로도 큰 역활을 하였을 텐데,,원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고려출신 기황후의 자녀입니다,
09/04/09 (목) 오후 6:01   [hrk0312]
고려를 지금의 진해만의 중심 마산을 중심으로 남해안 완도 제주도로 이어지는 수군 중심으로 삼고 바다를 잘 아는 고려인들 출신으로 일본을 정벌 하였다면 쉽게 일본을 정복하고 그것은 정동행성이 있었던 마산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조선 만주까지 한나라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09/04/09 (목) 오후 6:01   [hrk0312]
너무 큰 나라는 반듯이 다시 분활 되기 마련이라서,, 일본도 조선과 만주만 점령하고 중국본토는 오히려 협조하여 서양 세력을 몰아 내는데 협조하면서 힘에서 우위에 잇는 미국 영국과는 미소 작전으로 분쟁을 피해갔더라면 지금 쯤은 동몽고와 만주 한국 일본은 한나라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와 세계의 중심 도시는 진해만이 되었을 것이고,,
09/04/09 (목) 오후 6:02   [hrk0312]
서 태평양의 넓은 해역은 통합된 우리나라의 바다가 되고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 되고 러시아 혁명을 잘 이용하여 우랄산맥 동쪽의 시베리아와 몽골까지 한나라가 될수도 있었을 것이다.
09/04/09 (목) 오후 6:38   [hrk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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