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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태어난 기쁨
그런저런 허망하고 허전한 기쁨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文香 기사입력 :  2008/04/1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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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
  글쓴이 文香 작성일 2008/04/13 21:31 조회 506 추천 20

조선 중기 때의 학자 이하진(李夏鎭)은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3개 들었는데 「첫째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가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이요. 세 번째가 요절하지 않고 80, 90세까지 산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기쁨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사회적 성공일 수도 있고 예술적 학문적 성취도일 수도 있다

내게도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이 있고, 세상에 태어난 기쁨이 있다. 그것은 다행히 내가 후대인이라는 행운을 얻어 나보다 앞선 사람들의 노작과 걸작을 대하는 기쁨이다. 그것들은 죽을 고비를 넘고 생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집약하고 도출한 것으로서 나는 아무런 댓가없이 읽고 보고 상상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황학루(黃鶴樓)나 등왕각(滕王閣)에서 또는 금강산에서 빼어난 경관을 보거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시로 노래하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오페라 아리아중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흘린 눈물」〕이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그리운 시절은 가고」〕등에서 감정의 격함을 보이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일본국보 1호 廣隆寺 「목조사유반가상」을 보고 神品이라 찬탄들을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풍광이나 예술품이나 명문장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 명문장이 아니고 예술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극한 풍광을 취하기도 하고 예술작품에서 인간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 독서인이기 때문에 천하의 명문이나 시구를 읽는데서 세상에 태어난 기쁨의 으뜸을 맛보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글을  놓치고 살았더라면 인생을 헛살 뻔 했다. 내가 이러한 글을 보지 못했다면 진짜 문맹으로 살 뻔 한 것이다. 내가 이러한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짐승으로 생을 끝낼 뻔 한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줍거나 복권 등의 횡재를 기뻐할 수 있다. 미인과 결혼하고 우수한 자식을 낳는 것도 기쁨일 것이다. 나도 이러한 인연이 싫지는 않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글을 책에서 보고,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글귀를 간신히 본다거나 우연히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좋은 글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세상밖에 별천지가 존재하는 것과 같고, 그리운 사람을 대면하는 것과 같은 기쁨인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 글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중국 한나라의 천재 소년 문사 가의(賈誼)의 진나라가 망한 원인을 밝힌 과진론 (過秦論)의 치열함을  어떻게 알 것이며. 신라 때 月明師의 「제망매가(祭亡妹歌)」에서 골육간의 애틋한 정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고독한 산보자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통해 문장이 귀신도 움직이는 조화도 보았으며 그의 말년이 쓸쓸하게 예약되었음도 보았다. 데모테네스의 「아테네 시민이여 일어나라!」는 명연설문에서는 마케도니아 필립 왕에게 대항하는 그의 애국심이 사심 없음도 읽는 것이다. 제갈공명의 출사표와 이밀의 진정표에서는 나도 충신과 효자의 자질을 내보이기 위해 울어야 했으며. 백낙천의 장한가와 비파행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덧없음을 한한다.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두이노의 비가」에서는 시공을 달리하지만 우연한 두 천재시인의 비장함에서 美學이 무엇인지 보게 되는 것이다. 한퇴지(韓退之)의 馬說에서는 천리마를 빗댄 그의 불우함보다는 나의 불우함에 눈물지으며,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는 나야말로 낙향하는 것이 인간의 길임을 깨닫는다. 아! 아! 허날설헌(許蘭雪軒)의 「곡자(哭子)」에서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같이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들을 통해 비록 100세도 못사는 인간이지만 1000년~2000년으로 삶을 확대시키고, 불우한 시인문객으로써 또는 규중심처의 여인도 되어 시간과 역사를  날줄과 씨줄로 하여 세상을 관(觀)할 수 있으니 나는 복된 자이다. 내 몸은 이 땅에 고정되어 있고 고착되었으나 생각은 제약이 없으니 자유로운 것이다. 내가 즐겨 말하는 신선의 즐거움이며 범부의 즐거움인 것이다.

내 감정이 그 글들에 투사되고 ,그 글들은 내게 이입되어 나는 앉아서 1000 년 전을 보고, 누워서는 1000년 후를 그려보니 육신은 육신이되 육신을 벗어날 수 있고

죽기는 죽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선인들의 글은 내 정신을 키웠으며 지평을 열었으니 나는 악기 되어 글들이 지시하는 대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그것들은 언제나 내 정신을 강타하며 내 심금을 울리니 나는 성인의 「배우고 익히면 때로 기쁘지 아니 한가?」의 그 기쁨과 내 기쁨을 다퉈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쁨은 중추적 기쁨이요. 중심적 기쁨이기 때문에 그런저런 허망하고 허전한 기쁨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사람과 골육이 되고 지기가 되면 기쁨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지만 名文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 그 기쁨은 正의 기쁨인 것이다. 나는 이 글들에서 기교와 정신을 두루 배우니 나는 알게 모르게 제갈공명의 亞流요. 소동파의 部類이다. 사마천의 판박이요. sheyell 와 닮은꼴이다. 맹자의 浩然之氣는 저절로 흡입되며 위징(魏徵)의 意氣는 자연스럽게 터득하였으며 문천상(文天祥)의 正氣는 태어날 때부터 지닌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글들을 읽어보지 못하고 죽었다면 억울할 뻔 했다.

 
지바고
文香님, 부럽습니다.
2008/04/13 22:07:14

한심한
정말 부러운 인생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
2008/04/14 08:20:07

민초
문향님은 도학자인지 유학자인지 아님 역사학자인지 문학자인지?

이도 저도 아님, 도사인지?

사실 개세끼 소새끼가 나와야 되는 짐승들이 우글되는 더러운 정치방을 정화시키는 역적(?) 같은 글입니다.

내일 당장 일을 몰라 지지고 뽁는데, 어찌 문향님은 천년을 이천년을 얘기합니까? ... 음.


2008/04/14 12:40:10

qor
현실은 진흙탕이지만 맑고 아름답게 맺혀지는 연꽃이외다.
2008/04/17 09:16:40

김병관
조물주의 최대의 실수라면 수 백만종의 생명체를 품어안고 절묘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생명의 어머니인 지구를 갉아먹는 인간을 만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008/04/22 01: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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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인(異人)을 인정하는 나라
  글쓴이 文香 작성일 2008/07/30 22:54 조회 483 추천 16

1.

역사를 개관하다보면 때로는 많은 사람이 못하는 것을 어느 한 사람은 할 수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것을 어느 한 사람은 놓치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많은 사람은 부분을 보나 그 어느 사람은 전체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을 선지자 선각자 선구자라 부르기도 하며

이의자(異議者) 항의자(抗議者) 반대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관습이나 전례(前例), 통념에 이의를 달고 반기들 들기도 하며

전혀 생소한 것을 소개하거나 오랫동안 정상에서 벗어난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기도 한다.

인체가 계속적인 신진대사를 해야 원활한 상태를 유지 하듯

나라도 계속적인 신진대사를 해야 유지 발전된다.

고인 물은 썩기 쉬우며, 처음에는 진선진미한 것도 세월이 가면 구악(舊惡)이

되고 신악(新惡)으로 바뀌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고 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시대의 향도(嚮導)노릇을 하며 시대정신을 규정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바로 이 역할을 하려고 시대 앞에 서고,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이 사람들의 의무이다.

이 사람들이란 종교적으로는 계율적인 유대교를 배척한 예수이고, 다신교를

거부한 마호멧이고 만인평등을 내세운 최제우(崔濟愚)이다.

정치적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지향했던 남이(南怡) 조광조(趙光祖) 허균(許均)

김옥균(金玉均) 전봉준(전琫準)이자 황소(黃巢) 이자성(李自成) 홍수전(洪秀全)

주덕(朱德)이다.

사상사에서는 인간인식의 지평을 열어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토마스 모어(more)

갈릴레오(galileo) 로크( j locke) 루소(j j rousseau) 등일 것이다.




2.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어왔고

「앞에도 서지 말고 뒤에도 서지 말고 중간에 서라.」는 말이 아직까지도

득세하는 것은 숱한 사화와 정변 속에서 독특하고 걸출한 사람에 대한

기피경향이자 경원의 대상이 되었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들은 이른바 뉴턴(newton)의 제 1법칙이라 일컫는 「관성의 법칙」에

충실하여 기존 것을 따르고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변화는 현상을 타파하고 익숙한 것과 결별하게 하며 오랫동안 신주처럼 모셔왔던

지식들을 부셔버리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나 기득권적 측면에서

반감을 갖게 하고 저항을 불러온다.

우리가 기존의 인습과 제도를 혁파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위대한 이라는 최상급을

붙이고, 반역자를 써서 모순어법을 쓰는 것은 개혁 개량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대단한 용기와 끈질긴 신념이 필요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역사란 시대 앞에 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금기(禁忌)가 해제되고 성역(聖域)이

벗겨지며,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각자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대접하지도 않는 장구한(?)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웃나라 중국은 정적(政敵)이라도 예외적으로 죽이는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예외적으로 살리며, 왕조에 충성하지 않거나 유교이외의 다른 것을 내세우면

「난신적자(亂臣賊子)」라 하여 가차 없이 도륙(屠戮)한다.




3.

역사에서 가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만일 루터(luther)의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암흑중세는 훨씬 더 지속 되었을 것이고

이율곡(李栗谷)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이 있었더라면 임진왜란의 병화(兵禍)는

덜 했을 것이며,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의 착공을 미루었더라면

대량수송의 대동맥은 꽤 많이 늦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똑똑히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가 메시아(the messish)이며,

이교도(異敎徒)들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예언자(豫言者)이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을 쓰고 죽은 전봉준이 민중의 대변자였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명심하고 환기(喚起)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버리고 내치고 짓밟은 사람 중에 선지자가 있으며

선구자가 있다는 사실을-

잘못하면 우리가 핍박자이며 압제자이며 개혁을 방해하고 기득권만 고집한

수구세력으로 낙인찍히며, 역사의 죄인 시대의 장애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강정구나 조갑제를 인정하고 마광수나 안병훈을 수용하는 것은

그들이 영예를 받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놓친 것을 그들은 보며

우리가 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그들만은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의자는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주며 체제의 경색을 막아주고

시대의 진운(進運)을 타게 하는 것이다.




4.

통론(通論) 통설(通說) 통념(通念)에 이의를 달고 항의를 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불온하거나 불령(不逞)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이종교배를 통하여 더 건강할 수 있으며, 새로운 가지치기나 접목을 통하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으며, 약점을 보강하고 단점을 고치며,

나를 나날이 강성하게 하는 우군(友軍)이자 원군(援軍)인 것이다.

이렇게 하면 체제의 우수성이 드러나고 부단한 자기혁신을 할 수 있으며

저절로 관용하고 포용하는 정신을 깃들게 한다.

이의자는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썩어 많은 소출을 거두는 것과 같고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태산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항의자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일으키기도 하고, 한 국가나 세계의 지형을

바꾸기도 하며, 나라의 구획을 정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도 있고,

격앙하게 하기도 하고, 분노하게 하기도, 하며 탄식하게 할 수 있다.

「어찌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로 내치기만 할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가 에드워드 기번(e gibbon)이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호수(湖水)」가 되어 갖가지 상이한 것들을 받아들이며 분해하고 동화시키며,

 다시 다른 나라로 나눠주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5.

우리는 이의자들이 스스로 변명하게 하고 변호할 수 있게 허락하고

못 마친 것을 완성시킬 수 있는 여지도 남겨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남선(崔南善) 이광수(李光洙)을 위한 변명도 허락하고

인혁당 사건으로 고혼(孤魂)이 된 사람들의 호소도 경청해야 한다.

뿌리를 뽑아버린다거나 싹을 잘라야 한다는 위협성 발언들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들이 침입 받을 때 그것들에 대해 쓰는 것이지

법령의 존재유무나 정책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는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들에게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자는 것이다.

선각자는 모든 것의 단서(端緖)이고 단초(端初)이자 시작이고 비조(鼻祖)가 된다.

이들이 길을 열어놓으면 이 길을 튼튼히 하며 확장하여 이들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보수주의자들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통이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을 이단이라 부르지만

따져보면 승자가 정통이고 패자가 이단이었다.

현실이 정통이었고 미지(未知)의 것, 장차 올 것은 언제나 이단이었다.

그러나 꼬리가 몸통을 흔들며, 주변이 중심이 되며, 나중 배운 자가

먼저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사인 것이다.

어느 사람들 중에는 열에 아홉은 못하지만 하나는 공맹(孔孟)을 능가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조종지법(祖宗之法)이라 하여 마냥 따를 수만은

없는 것이다.




6.

오늘날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고 사유체계를 바꾸자고

아우성하는 시대이다.

어떠한 반동(反動)이 일어나고 어떠한 전단(戰端)이 일어나도

「초(楚)나라 궁에서 쏜 화살은 초나라 사람이 줍는다.」는 말을 떠올려

보다 너그러워져야 한다.

그 옛날 남이를 척살(刺殺)하고 조광조를 사사(賜死)하고 허균을 주살(誅殺)하고

김옥균을 참살(斬殺)하고 전봉준을 효수(梟首)한 것을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재를 알아주거나 대접은 못할망정

그렇게 무참히 죽이지는 말아야 되는 것 아닌가?

또다시 이땅은  뜻있는 사람들을 좌절시키며 그들의 꿈과 이상을 묻어버리는

무덤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은 용렬해서 손해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활발한 의견 개진을 막고 창의성을 꺾으며

기개를 좀 먹으며 사람을 수동적이게 하는 것이 더 큰 악폐인 것이다.

그것은, 이인(異人)을 멀리하는 것은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나라와는 대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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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경
역시 한수 높은 글 안목을 확 트여 주시는 군요. 나의 주변이 인재가 묻히는 무덤이 되지 않게 되기를 나날이 새로워지는 마음가짐으르가져야 겠다는 결의를 하게 됩니다.
2008/07/31 07:49:39

벽진
문향님, 오래 만입니다, 하절에 건강힛며 잘 계셨는지요, 오래만에 대하는 글이라 단숨에 읽고 나니 다시 읽어야 하겠네요,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건필하시어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2008/07/31 16:08:21

文香
다경. 벽진님. 안녕하세요? 무더위와 장맛비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듭니다. 백석의 시 한 줄은 1000억보다 더 가치있다는데,우리도 그런 글을 쓴다는 것은 요원한 것인가요? 기억력은 소진되고 열의는 식는 것이 문제입니다.
2008/07/31 22:01:14

ㅋㅋㅋㅋ
이 글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요? ㅎㅎㅎㅎㅎ 좋은 이야기 입니다.
2008/08/0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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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인을 그리워한다.
  글쓴이 文香 작성일 2008/06/13 23:18 조회 291 추천 17
 
모래알처럼 사람들도 많으며, 기라성 같고 쟁쟁한 사람도 많다. 허나 德이 느껴지는 사람, 아름다운 香내가 나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단군이래로 최고의 물질적 번영을 구가하고 지식과 정보의 발달은 그 끝을 모른다. 매일매일 신문에서는 장 차관급  인사를 비롯해서 名士들의 프로필이 소개되어 언뜻 봐서는 큰 정치인 큰 기업가 큰 관료 큰 성직자 등이 많은 것 같은데, 현실사회에서는 발견하기가 좀처럼 힘이 드니 내가 듣는 것이 적고, 본 것이 적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인의 기준이 바뀌어 큰집에서 살고 큰 차를 타고 큰 회사를 경영하고 많은 수의 국회의원을 거느려야 큰 사람의 시대인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안자(晏子) 가 그의  마부보다 더 겸손하며 -내 시각의 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하기야 이명박 대통령도 대통력 직에 오른 것이 전적으로 시운에 의존한 것이지 덕이나 인자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늘날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운동권에 대한 역풍으로 그 지위를 얻었으며 고위직들은 코드라는 私情人事로 된 것이니 오늘날의 대인은 성가(?)가 자자할수록 그 위치가 확고함을 알게 된다.


건국 이래 우리나라에 그 많은 국회의원 장관이 있어도 추앙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고, 지위가 높고 돈도 많아 당연히 큰 사람일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과는 반대로 오히려 가냘픈 여인이나 몸이 불편하거나 어려운 형편의 사람이 더 생각이 크고 마음이 넉넉함을 보게 되니, 큰사람의 조건이 외양이나 물질이 아닌 뜻의 크기, 마음 씀씀이에 있음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은 꼭 남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남의 우위에 서고 남과의 경쟁을 하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천태만상이라고 지향하는 것은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은 인간의 條件을 개선하고 인간의 限界를 확장하자는 것 일게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성현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견일치를 본 것은 돈, 권력, 명예는 우리가 잠시 탐닉할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것들이 한 때의 만족이나 ,여러 날의 영광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온 몸을 의탁하고 전력으로 찾을 것은 인간을 고상하게 하고 인간을 기품 있게 하는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봐야 고관대작이 그릇이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이웃이 인색하고 소심해도 비난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큰 사람이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많으나  얕은 개울에 지나지 않고, 도처에서 지도자라 운위되는 사람은 있으나 빈 수레에 불과한 것은 공적인 것보다는 사적인 것을 생각하고 염불보다는 잿밥을 생각하고 후대보다는 당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대인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진다. 소인은 유위로써 무엇을 하겠다하여 그것이 오리려 민초들에게는 고통이 되나 ,대인은 무위로써 존재조차 모르니  민초들에게는 불간섭 무참견이라  저절로 창의성을 이루고 스스로 特化라는 형태를 갖춘다.

대인은 태산과 같아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으니 분란은 애교이고. 대인은 호수와 같아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알맞게 나누어  주니 억지가 없다. 대인은 바람과 같고 물과 같으므로  수용과 발산이 부드러우며 감옥에 있어도 자유로울 수 있고 초막에서 잠을 자도 편할 수 있다. 역사상에서 대인이라 하면 우리는 의레 영웅호걸을 떠올려 징기즈칸이나 나폴레옹을 말할 수 있겠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을 만끽하게 하는 자유 평등 노동 정직 관용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중국 여성혁명가 추근(秋瑾)이나 유럽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같은 여성들이야말로 진정 대인의 기상과 풍모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은 짧고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오기 때문에 오늘이 늘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이라고 알고 살아야 한다. 이럴 때 그동안 소원하던 가족들이 정답게 느껴지고, 밋밋하던 산천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으니 대인의 품성이 쌓이는 것이고,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내가 가진 것들은 잠시 위탁된 것이며「아름다운 여인도 黃土로 돌아가는데 그 밖의 분장한 것들에 있어서는-」에서 대인은 역시 文 史 哲을 익힌 사람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편할 것인가에서 대인의 고심이 보이는 것이며, 행여 나로 인하여 누가 마음을 다치며, 내가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데서 대인의 성실함이 나타나며. 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者라 생각하는 데서 대인의 흉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삶이  없어지고 썩어질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허명에 눈길을 팔고 허상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시간도 짧고 기회는 더욱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력이 무진한 자부심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누실명(陋室銘)에서「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고 있으면 명산이고(山不在高 有仙則名).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살고 있으면 신령스럽다(水不在深 有龍則靈).」라고 한 말은 옛날 그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느끼는 울림인 것이다.




어쩌면 대인은 엉클 톰처럼 낯익은 얼굴로 다가오며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수 도 있는 張三李四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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