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 관리만이라도 국가가 좀 해줬으면 합니다. 이걸 100세가 다된 사람이 해야 합니까?"
17일 오전 서울 남산로에 세워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동상 앞. 100여명이 참석한 '성재 이시영 선생 55주기 추모식'에서 선생의 손자 이종문(70)씨가 답사를 한 후 고개를 떨궜다. 이시영 선생의 묘를 돌보고 있는 둘째 며느리 서차희(99) 여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씨는 "내가 늙으니까 마음이 다급해져 여태껏 추모식에서 한 번도 안 해봤던 말을 했다. 가끔씩 큰비로 할아버님 산소가 무너져 내릴 때마다 가족들의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린다"고 말했다.
이시영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하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된 인물.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해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선생의 후손들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서울 수유동에 있는 선생의 묘를 지키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월간조선 5월호는 '건국 60주년 기획' 보도를 통해 독립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인 서차희 여사가 북한산 국립공원 안의 낡은 집에서 32년째 시아버지의 묘소를 돌보며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사가 거주하는 집은 붉은 기와 위에 검은 이끼가 잔뜩 내려앉고, 대문 옆엔 다 타버린 연탄 수십 장이 쌓여 있었다. 14평 남짓한 집에서 서 여사는 건강이 악화된 셋째아들(65)과 소아마비를 앓는 막내딸(57)과 함께 살고 있었다. 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에게 지급하는 연금 월 80만원으로 빠듯한 살림살이를 잇는다.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이시영 선생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남겨주지 않았다"고 후손들은 전했다. 한때는 서울 중구 일대 2만평 넘는 땅이 선생 가문의 재산이었으나, 선생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그래서 선생이 부통령직을 그만둔 다음날부터 식구들의 끼니 걱정이 시작됐고, 죽으로 밥을 삼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선생의 가족사에서 비극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6·25전쟁 통에 피란을 간 부산에서 선생의 둘째아들 이규열(서 여사의 남편)씨가 병으로 숨을 거뒀고,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손녀딸은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 못하게 됐다. 4개월 뒤인 1953년 4월 17일, 이시영 선생도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와 20년간 스무 번 넘게 이사를 다니며 셋방을 전전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가정에 물질적인 여유와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큰손자(서 여사의 장남)는 4살 때 중국 상하이에서 숨졌고, 둘째손자 이종문씨는 경기고를 졸업했지만 생활고(生活苦)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셋째손자는 가난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나 중병을 안고 10년 전 귀국했다. 큰손녀 역시 경기여고·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현지에서 작은 수퍼마켓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32년 전, 서 여사는 이민우 당시 국회부의장이 내놓은 60만원으로 선생의 묘소로부터 150m 떨어진 곳에 집을 얻었다. 이후로 비가 오면 묘소가 무너질까, 등산객 담뱃불에 행여 묘소가 타버릴까, 아침저녁 노심초사하며 묘소를 지켜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그일조차 하지 못한다. 서 여사와 가족들의 마지막 소원은 국립묘지에 부통령 묘역을 조성해 이장하는 것. 그게 어렵다면 현재 북한산에 있는 묘역만이라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
대표적인 친일파가 운영하는 조선일보가 이시영 선생의 집안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사 몇 개를 취급해 놓고 민족신문이니 애국신문이라고 자처하기 위한 보험성격의 기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 춘추시대 때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 초장왕이 패자가 되는 데 공을 세운 손숙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청렴결백한 손숙오가 죽으니 그 자손들은 물려받은 재산이이 없어 그 아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팔아 생계를 유지한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궁정 배우 우맹이라는 사람이 손숙오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입고 초장왕 앞에 나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충신들의 자손들은 거렁뱅이가 되어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데 탐관오리들의 자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뜻을 풍자하여 부른 노래입니다. 친일파 자식들은 자기 세상을 만나 온갖 부귀를 누리고 다니는데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치며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집안은 3대가 빌어 먹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입니다. 물론 당시의 초나라의 군주는 초장왕이라는 명군이 있어 손숙오의 자손들은 늦게 나마 그 보상을 받았지만 한국에는 언제나 그 날이 올른지 요원하기만 합니다.......지금도 중국에는 우맹의관(優孟衣冠)이라는 제목의 경극은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습니다.....
汚吏歌(오리가)
貪吏不可爲而可爲(탐리불가위이가위) 탐관들은 하면 안 되는 일만을 골라서 행하고
廉吏可爲而不可爲(염리가위이불가위) 청백리는 해야 할일 외는 행하지 않네,
貪吏不可爲者汚且卑(탐리불가위자오차비) 탐관들은 하지 말아야 할 더럽고 비열한 일만 골라서 하고
而可爲者(이가위자) 행하는 짓들이란
子孫乘堅而策肥(자손승견이책비) 자손들을 튼튼한 수레에 태워 살찐 말을 채찍질 하며 다니게 하는 것이다.
廉吏可爲者高且洁(염리가위자고차길) 청백리가 하는 일들은 모두가 고결한 일뿐이니
而不可爲者(이불가위자) 하는일이라고는
子孫衣單而食缺(자손의단식결) 자손들이 의복을 남루하게 하고 밥을 거르게 하는 일 뿐이다.
君子見(군자견) 그대들은 보았지 않았는가?
楚之令尹孫叔敖(초지령윤손숙오) 초나라의 영윤 손숙오가
生前私殖无分毫(생전사식무분호) 생전에 집안을 위해 재산을 한푼도 남겨두지 않더니
一朝身沒家凌替(일조신몰가능체) 하루아침에 그가 죽으니 집안이 망하여
子孫丐食栖蓬蒿(자손개식서봉고) 그 자손은 걸식하며 들판에서 자는 것을!
勸君勿學孫叔敖(근군물할손숙오)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절대 손숙오를 본받지 말지어다
君王不念前功勞(군왕불념전공로) 군왕은 옛 신하의 공로를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ip:210.223.86.26
김기백
08/04/21 [02:1]
이시영선생이야 말로 투철한 독립투사이자 선비정신에도 투철한 고결한 인격자시지요... 이시영선생은 이승만 박사보다도 6살이나 연장자(1869년생)로서 구한말에 이미 평남관찰사(요즘의 도지사)라는 고위관직 지낸분으로 구한말에 이미 고위관직을 지낸분으로 광복이후 초대부통령까지 지낸 어른은 성재선생이 유일합니다.
뿐만아니라, 성재 이시영선생집안은 우리가 소년시절부터 잘알고 있는 저 유명한 오성 이항복대감의 직계자손으로서 조선왕조 5백년동안 수십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 일뿐만 아니라, 이시영선생의 6형제가 전부 일심동체로 결의하여 대대로 내려온 수만석재산을 몽땅 처분하여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분들도 바로 이회영.이시영..6형제분들이었고 만약이시영선생 6형제를 빼버리고는 초기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사가 빈껍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이시영선생집안은 항일독립운동사의 혁혁한 공로집안이고 원훈가문입니다. 모처럼 정말좋은 자료를 올려주신 양영감에게 참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