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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여우 '롬멜'...조작된 허상과 실상
 
편집부 기사입력 :  2008/04/2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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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마우리체 필립 레미 'mythos rommel'..'박원영 옮김'
 
편집부
롬멜(mythos rommel). 그는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사의 한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다. 지난주 목요일 머리를 깎기위해 들른 블루클럽에서 우연히 책 한권을 집어들게 되었다.
 
이 책이 바로 'mythos rommel'이다. 롬멜의 전기인것. 책은 마우리체 필림 레이가 지었고 박원영이 옮겼다. 출판사는 '생각의 나무' 지난 2003년 12월 초판 4쇄본 이었다.
 
머리를 자르면서 책에 빠져들었고, 급기야는 양해를 구하고 책을 빌려달라고 말한 후, 집으로 가져와 단숨에 읽었다. 롬멜 그는 과연 누구일까.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이 그의 전 모습일까 해서다.
 
작가는 롬멜의 어릴적 시절부터 그의 내면을 파고 들어갔다. 책은 결코 롬멜을 영웅으로 만들고자하는 의도도 또한 그를 폄훼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한 인간으로서  독일 3제국 선전상 괴링에 의해 전쟁영웅으로 만들어진 그 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기사의 이미지는 책을 스캔해 얻은 이미지다.
 
 
▲  그의 일생이 황금기를 맞던 북아프리카전선에서 롬멜   © 생각의 나무

롬멜의 출생과 출세

그는 1891년 11월 15일 브렌츠와 맞닿은 하이덴하임에서 교사였던, 아버지 에르빈 롬멜과 루츠가문 출신의 어머니 헬레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롬멜은 1910년 3월 바인가르텐에서 뷔템베르크 왕실 제6 보병 연대 국왕 빌헤름 1세 제124보병사단에 사관후보생으로 군문에 발을 디뎠다.
 
롬멜은 1차 세계대전 중에 마스(mass) 강변과 베르됭(verdun)주의 서쪽 지역, 아르곤(argonne)지방과 보게센(vogesen)산맥, 루마니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두번에 걸쳐 심한 부상을 당했고 중위로 진급하면서 1급과 2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   1910년 형제자매들과 함께. 평범한 사관후보생 시절  © 생각의 나무

1차 세계대전후 그는 드레스덴의 보병학교 감독관으로 부임해 생도들을 교육을 맡기도 했다. 그가 히틀러를 처음 만난것은 1933년 그가 고슬라 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해서다.
 
고슬라 저격대로 불렸던 17보병연대 제3대대의 지휘관으로 재임중 '룀-쿠데타'이후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롬멜은 1939년 첫째주 총통행렬의 선두에서 장갑차를 타고 폴란드를 누비고 다니면서 16명의 장교와 274명의 군사들과 함께 군부대를 방문하는 히틀러의 신변을 보호했다.
 
롬멜은 1939년 8월1일 서열을 무시하고 소장으로 진급했다. 장군이 된것. 당시 그의 나이 48세였다.
 
▲   1934년 9월 30일 고슬라를 방문해 군대를 사열하는 히틀러. 왼쪽에 있는 사람이 롬멜이다.  © 생각의 나무

1941년 2월 6일 히틀러는 그에게 베를린의 제국의회 사무실에서 독일 추축군의 통수권을 주어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의 행진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사막의 신화가 시작된것. 그는 6일 후 트리폴리의 공항에서 최초로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롬멜의 추축군은 '아프리카군단'이라는 정식명칭을 얻었다.
 
▲  1941년 4월 토부룩 격렬한 전투를 지켜보며 © 생각의 나무


롬멜의 인간적 고뇌  
 
저자는 책 곳곳에 롬멜이 겪고 있는 고뇌를 솔직히 기술해 놓았다. 롬멜이 쓴 회고록과 전선 보고서 그리고 그의 부인인 루시에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말이다.
 
롬멜은 아프리카전선에 투입된 후 그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 하지만 곧 이어 몽고메리장군등에 의한 미-영 군사들에게 쓰디쓴 잔을 마시게 된다.
 
부족한 군수지원과 본부 사령부와 통하고 있는 암호해독기를 통해 사령부와 오가는 전문을 해석하고 있는 연합군 수뇌부와의 싸움에서 계속해서 밀렸기 때문이다.
 
롬멜은 토부룩 전선에서 불가항력을 인정하고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히틀러의 명령으로 질서있는 후퇴를 할 수 없었다. 그의 구상이 무너진 후 소련에서의 패퇴와 함께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패퇴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2차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의 연전연승이 저지된 것이다.

▲  1942년 11월 퇴각 하면서. 전쟁이 어떻게 끝날것인가? ⓒ 생각의 나무

 
이 과정에서 롬멜은 그의 부인에게 그가 생각하는 일희일비를 전한다. 전선에서 승리를 계속하고 있을때는 한 남자로서의 자랑을 늘어놓고, 절망적 패퇴를 거듭할때는 나약한 모습으로 처량함을 호소했다.
 
1942년 11월 14일 히틀러에 의해 후퇴가 저지당하고 그의 군대가 궤멸에 다다랐을때 그는 그의 부인 루시에에게 근심어린 마음으로 "우리가 북아프리카를 잃는 다면 전쟁은 어떻게 흘러갈것 같소? 이런 끔찍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소"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히틀러의 사진사인 발터프렌츠가 찍은 초상 ⓒ 생각의 나무

 
히틀러 암살작전-'여우사냥'과 롬멜의 부상
 
롬멜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히틀러 암살 쿠데타 기도에 대해 작가는 비교적 소상하게 그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책의 1/3를 차지하면서 그가 과연 국가사회주의자인가를 집중해 조명한 것. 작가는 이 같은 과정을 거친 후 롬멜을 히틀러의 제3제국주의에 맹종했던 '국가사회주의자'라기 보다는 '한명의 군인'이었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롬멜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후 계속해서 히틀러에게 이 전쟁의 종식을 위한 고언을 올렸다. 그는 저항세력이 주도하는 히틀러 암살까지는 바라지 않았다는 것.

▲ 마이젤(meisel)장군과 함께 1944년 4월 노르망디 해안.

 
▲  19944년 대서양 방벽에 독일군이 해안가에 설치해 놓은 각종 장애물들 ⓒ 생각의 나무


▲   각종 장애물들 © 생각의 나무

 
▲  1944년 6월 7일 오마하 해변 ⓒ 생각의 나무

쿠데타를 주도했던 울리히 그라프 슈베린 폰 슈바넨펠트(ulrich graf schwerin von schwanenfeld)는 롬멜이 그들의 운동에 '가담한다'고 판단 했지만, 롬멜은 저항세력의 마지막 암살기도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히틀러의 암살까지는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  1944년 6월 26일 라로셰-기옹. 불루멘트리트, 슈파이델, 롬멜, 룬트슈테트(왼쪽에서 오른쪽)


또한 롬멜은 이들 저항세력이 그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털어 놓으며 전쟁종식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히틀러를 암살하고 그를 국가원수에 추대한다는 계획을 말했다. 그는 이 같은 구체적인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베를린 수뇌부에까지 알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부분 5.16군사혁명에서 장도영 장군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지 몰라도 이부분에서 작가는 롬멜이 자살하기 직전 사망자 숫자와 그 이후 6개월 남짓 총통이 자살로 전쟁이 종식을 고하기 까지 시간동안 사망자가 더 많았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롬멜은 전쟁의 조기종식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  1944년 7월 롬멜과 그의 친필사인 ⓒ생각의 나무


▲  1944년 7월 17일 저공공격을 받은 롬멜의 군용차. 이때  롬멜이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2차세계대전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당시 롬멜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기 위해 히틀러를 설득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 ⓒ 생각의 나무

롬멜이 1944년 7월 20일 있었던 히틀러 암살기도 작전에 묵시적 동의를 했다는 사실은 여러통로를 통해 베를린 사령부에 전달되었고, 마침내 그는 히틀러에 의해 자살 명령을 받았다.
 
1944년 10월 14일 롬멜이 권총으로 자살할 당시에 대해 작가는 그의 심리묘사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날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온 부르크도르프는 롬멜에게 두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  1944년 19월 뤼빙엔 대학병원 롬멜의 마지막 사진이다 ⓒ 생각의 나무

 
▲  롬멜의 장례식. 그는 자살했지만 당시 베를린은 그가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였다. 1944년 10월 18일 울룸


▲   1944년 10월 18일 울룸. 추도사를 읽는 룬트슈테트

하나는 자살이었고, 다른 하나는 특별재판이었다. 그는 권총자살을 택했다. 그의 최후의 모습에 대해 "차 뒷좌석에 롬멜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죽어서 의식을 잃은채 주저앉아 흐느껴 우는듯한 모습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거나 신음하는 듯한 모습이 아닌, 그저 흐느껴 우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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