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만 꼽는다면 단연 샤를마뉴(742~814)다. 분열된 유럽을 통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서기 800년 샤를마뉴의 황제 즉위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2일 리스본 조약 비준동의안이 아일랜드 국민투표를 통과함으로써 정치통합이 가속화된 유럽연합(eu)도 따지고 보면 샤를마뉴의 유럽 통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됐다. 그는 1165년에 시성(諡聖)됐고, ‘성 샤를마뉴의 날’은 프랑스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일로 자리 잡고 있다.
엄청난 정력과 만족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을 가진 샤를마뉴는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민의 교육 수준을 높이려 했고 단호한 의지로 학문을 부흥시키고자 했다. 중세 초기 서양은 지독한 문맹 사회였지만 샤를마뉴의 열정에 힘입어 그의 생전에 학문이 부활했다.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제국 영토 전역에서 샤를마뉴보다 더 열정적인 학생은 없었다. 자신이 주도한 개혁을 지속시키고 또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당대의 가장 명석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불러 모았다. 샤를마뉴의 궁정 학교는 국내외에서 초빙된 탁월한 학자들로 인해 바야흐로 명문 아카데미가 됐다. 자기 계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의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여가 시간에 글쓰기를 익히기 위해 침상 베개 밑에 늘 서판(書板)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열심이었음에도 끝내 글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문맹자였던 것이다.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가 얼마 전 아이스하키 팀 감독이자 해설가인 자크 드메르(65)를 상원의원으로 지명했다. 놀랍게도 그는 문맹자였다. tv 해설을 하면서 자료를 읽는 체 ‘연기’를 했고, 심지어 부인에게도 문맹을 감췄다. 그는 2005년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을 스스로 공개해 캐나다 사회를 놀라게 했다. 어린 시절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 때문에 도저히 글을 익히고 책을 볼 시간이 없어 학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맹을 고백한 후 알파벳 공부를 시작해 신문 읽기와 초보적 글쓰기도 가능해졌다. 그는 문맹 퇴치에 힘을 보태는 의정활동을 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학벌 공화국’인 우리 사회에도 이런 식의 인재등용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리의 인간관·교육관에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샤를마뉴 대제
칼 마르텔 왕의 손자.
수많은 전투로 서유럽 최강의 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
운명의 창을 갖고 47번에 걸친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우연히 이 창을 떨어트린 직후 사망했다고 함.
서기 900년 초 `운명의 창`은 독일 작센(saxon)왕가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됨.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이를 지니고 있던 하인리히 1세(919~936)는
작센 왕가의 재배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그의 아들 오토 대제(ad 955~963)에게 창을 물려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