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의 치 (貞觀之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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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고구려원정을 끝까지 반대했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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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통신자게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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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
2010/01/17 [0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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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貞觀之治) |
역사가 223 | |
“거울은 바른 몸가짐을 비춰주고, 역사의 거울은 흥망성쇠를 가르쳐 주고, 사람의 거울은 자신의 잘잘못을 가르쳐 준다"
이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로보길 바란다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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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貞觀之治)
중국의 황제 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인물로는 당(唐)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太宗:재위기간: 626년 - 649년))을 꼽는다.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수(隋)나라 말기의 혼란과 제후들의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형제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웠다.
서기 626년에 현무문(玄武門)의 난(亂)을 일으켜, 형인 태자(太子) 이건성, 동생인 제왕 이원길을 살해하고 그해 8월에 아버지인 고조의 양위(讓位)를 받아 당의 제 2대 황제로 등극(登極)하였다.
우리나라나 중국의 역사에서 형제나 가족간에 벌어진 정권쟁탈과정에서 형제나 가족을 죽인 경우는 허다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많은 형제들을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고, 세조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형제들과 왕인 조카까지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도 형과 아우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중국의 역사가나 후대의 중국국민들은 당 태종을 크게 비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는 당 태종 이세민이 중국역사상 성군(聖君)의 전형(典型)으로 추앙(推仰)받을 정도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재위기간의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하여, 이세민의 통치이념(統治理念)을 정리한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뚱(毛澤東)이 죽는 순간에도 머리맡에 놓고 읽었을 정도로 통치자들의 행동지침서라 할 정도로 잘 쓰여 진 훌륭한 정치사상서(政治思想書)이다.
당 태종 이세민의 치적(治績)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로 쓴소리(바른 소리)를 잘하는 신하를 중용(重用)하였다.
쓴소리를 많이 한 대표적인 인물이 위징(魏徵)이다.
위징은 이세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한 이세민의 형인 태자(太子) 이건성의 참모였으나, 위징의 올곧은 성품과 충성심, 그리고 풍부한 식견을 인정한 이세민에게 발탁되어 이세민의 사돈(査頓)까지 되었다.
위징은, 이세민의 10가지 단점을 지적하여 이세민이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를 하였으며, 이세민은 이를 병풍으로 만들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세민은 위징의 쓴소리를 참다못해 여러 번 참(斬)하려 하기도 하였으나 잘못을 깨닫고 죽을 때까지 위징을 중용하였다.
위징을 벌주려한 이세민을 각성시킨 인물이 장손황후(長孫皇后)이다. 지시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위징을 엄벌에 처하고자 화를 내는 이세민을 보고 장손황후는 예복으로 갈아입고 큰절을 하면서
“현명한 군주에게만 신하가 감히 직언(直言)을 올릴 수 있는데, 위징이 황제를 반박하는 것은 폐하가 성군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라고 축하를 하였다고 한다.
이세민의 첫 번째 부인인 장손황후(長孫皇后 : 文德順聖皇后)는 이세민의 정사(政事)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나 자기의 친 오빠인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욕망을 간파하고서는 외척(外戚)을 중용(重用)하지 말라는 간언(諫言)까지 한 걸출(傑出)한 여인이었으나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이세민은 부인이기에 앞선 정신적지주(精神的支柱)이자 유능한 참모한사람을 잃게 된다.
위징이 사망하자 이세민은,
“거울은 바른 몸가짐을 비춰주고, 역사의 거울은 흥망성쇠를 가르쳐 주고, 사람의 거울은 자신의 잘잘못을 가르쳐 주는데, 위징이 죽었으니 나에게는 거울이 없다”고 위징을 추모하였다고 역사는 이야기 한다.
자기를 암살하려한 사람을 끝까지 신임하고 중용한 이세민의 용병술이 참으로 놀랍다.
위징 외에도 방현령(房玄齡) 처남(妻男)인 장손무기(長孫無忌) 두여회(杜如晦) 장현소(張玄素) 마주(馬周) 등의 신하로부터 많은 쓴소리를 경청하였다.
둘째로 신분의 한계를 초월한 인재를 등용(登用)하였다.
현무문의 정변으로 이세민이 살해한, 형인 태자(太子) 이건성의 참모, 동생인 이원길의 참모, 수(隋)나라의 신하, 일반 백성 등을 능력에 따라 고루 등용하였다.
천민출신인 마주(馬周)를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임명하였고, 수나라 말기에 패권을 다투던 유무주(劉武周)의 부장(副將)이었던 위지경덕(尉遲敬德)을 중용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셋째로 민본사상(民本思想)을 근간으로 한 정치를 하였다.
법률은 백성을 지키는 수단라고 하여 모든 백성이 법률을 알기 쉽도록 법률의 간소화, 형벌의 완화, 조세와 부역 경감, 균전제(均田制), 조용조법(租庸調法), 부병제(府兵制) 등을 시행하여 먼저 백성의 고충을 이해하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는 많은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을 살해하는 패륜(悖倫)으로 권력을 찬탈(簒奪)한 데 대한 조물주의 분노일까?
당 태종 이세민에게도 과오(過誤)는 있다.
첫째가 고구려원정(高句麗遠征)이다.
수(隋)나라가 망한 첫 번째 이유가 고구려원정의 실패다.
이를 망각하였고 또 방현령(房玄齡)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세민은 고구려원정을 감행한다.
이세민도 고구려원정 때 얻은 병마로 인하여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는다. (고구려 안시성성주인 양만춘장군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게 된 것은 중국의 역사에는 기술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원정 실패 후 귀국하는 길에 탄식(歎息)을 하였다.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고구려원정을 끝까지 반대했을 텐데!!!!!!”
둘째가 태자책봉(太子冊封)의 잘못이다.
다리를 다쳐 불구인 태자 이승건(李承乾)을 제처 두고 다른 왕자들을 편애하여 태자로 하여금 모반(謀反)을 획책하도록 하였고, 장손황후의 우려(憂慮) 대로 이세민의 처남인 장손무기의 섭정(攝政)야욕(野慾)을 숨긴 추천에 따라 친 생질(甥姪 : 장손황후의 막내아들)인 좀 모자라는 듯한 이치(李治)를 다음 태자로 책봉하여 이세민의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끝나고, 자신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의 등극을 초래하여 또 하나의 역사적인 오점(汚點)을 남겼다.
그래도 중국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당 태종 이세민을 성군으로 추앙하는데 별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당 태종 이세민의 치적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첫 번째로 언급한 쓴소리를 많이 하는 신하의 중용이다. 여기에서 민본사상과 인재등용이 파생되었다고 본다.
흔히들 말한다.
현재의 가장 좋은 교과서는 “역사(歷史)”라고.
정관의 치(貞觀之治)에서도 우리는 역사의 교훈(敎訓)을 바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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