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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했다면
‘정정불안·쿠데타·빈곤’ 제3세계 정치 악순환 재현됐을 가능성 커
 
한겨레21 기사입력 :  2010/02/1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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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했다면 [2010.02.19 제798호]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군부 쿠데타 지원 계획까지 세웠다가 무산…
‘정정불안·쿠데타·빈곤’ 제3세계 정치 악순환 재현됐을 가능성 커
»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흔히 대표적 친미 정치인이며 미국과 밀착한 결과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크게 볼 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승만과 미국의 관계가 늘 순탄하지는 않았다. 순탄하기는커녕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이승만에게 진절머리가 난 미국이 은밀히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검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은 왜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고, 또한 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까?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세 가지 전략 목표 아래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한다. 둘째, 한반도에 강력한 친미 반공 정권을 세운다. 셋째, 한반도 문제에 되도록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미국과 애증의 관계였던 이승만

이 세 가지 목표에는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아직 그 제국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고, 동북아시아는 그 이전까지 미국의 주요 관심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처럼 상호 모순된 목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이런 모순을 안고 미국은 남북 분단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에 임했다. 만약 두 번째 목표를 강조한 맥아더나 매카시 같은 사람들의 주장이 우세했다면 중국과의 전면전이 벌어졌을지 모르고, 세 번째 입장이 확고한 브래들리나 아이젠하워의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면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첫 번째 목표, 즉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목표가 두루 공감을 얻으면서 미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하되 확전은 피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 미국이 볼 때 남한의 지도자 이승만의 행동은 갈수록 당혹스러웠다. 국회 내에 확실한 지지 세력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쟁 책임과 거창 양민 학살 문제 등으로 반대 여론에 직면한 이승만이 전시라는 특수 상황을 이용해 독재체제를 확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대로 가다가는 다음 선거에서 이승만은 실각할 것이 확실했다. 더구나 국회는 한술 더 떠 권력구조를 아예 내각책임제로 뜯어고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1952년 4월17일 개헌안 제출). 이에 이승만은 한 달 뒤인 5월14일 국민 직선제 개헌안으로 맞불을 놓았다. 5월25일에는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공비가 출몰한다는 이유로 부산, 경남, 전남·북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국회의원 50여 명을 체포해 그중 11명을 ‘공산당 간첩 혐의’로 구속했던 것이다.

» 이승만(오른쪽 사진 왼쪽) 대통령은 대표적 친미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늘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심지어 1950년대 초 수차례 이승만 제거 작전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왼쪽 사진 맨 왼쪽)다. 한겨레 자료

이승만의 독재자 행보, 미국 불만의 원인

이 사태는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몰고 왔다. 미국이 난처해졌다. 민주정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 결과 독재정부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주게 된다면 국내외에서 비판이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이후 냉전이 심화됐을 때는 “친미이기만 하다면 독재라도 상관없다”는 입장이 굳어지지만, 당시까지는 미국에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촉진한다는 이미지가 중요했다. 또한 이승만은 미군정 시절부터 ‘사고뭉치’(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의 표현)로 백악관에 악명이 자자했다. 마침내 미국은 부산 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 제거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문서에 따르면, 처음 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미국의 협조를 타진해온 쪽은 이종찬 참모총장을 비롯한 한국 군부세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월 말 그들은 미국이 묵인해준다면 자신들이 제2병참사령부 병력을 동원해 이승만과 핵심 각료들을 체포하고,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한 뒤 원대 복귀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쿠데타 자체는 크게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한국 군부가 전면에 나서는 문제를 놓고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또한 군부에서는 이승만을 죽이는 게 불가피하다고 보았지만, 미국 쪽은 너무 지나치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한 달쯤 뒤 이승만이 국회를 해산하려 들고 야당에서는 이승만 암살을 시도하는 등 정치 상황이 더욱 험악해지자 미국이 쿠데타 계획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6월 말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작성해 백악관에 넘긴 쿠데타 계획은 “적당한 구실로 이승만을 부산 밖으로 유인한다. 유엔군이 이승만의 핵심 각료들을 체포한다. 이승만이 국정 정상화에 동의하지 않는 한 유엔군이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계획은 계획으로 그쳤다.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미대사관, 유엔군사령부, 미8군 등이 제각기 계획에 참여하면서 목소리가 통일되지 않은 이유가 컸다. 가령 무초 대사는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앉히는 방안을 주장한 반면, 애치슨 국무장관은 조병옥을 선호했다. 국무부는 한국 군부에 주도적 역할을 맡기려 했고, 유엔군사령부는 이에 반대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이승만은 장택상 총리가 내놓은 ‘발췌개헌안’을 놓고 국회를 열었다. 이승만이 추구해온 직선제에 야당 쪽 개헌안 내용을 약간 덧붙인 발췌개헌안이 상정되자 미국은 “이대로 사태가 진정되는 게 최선이 아닌가”라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야당 인사들에게는 “개헌에 협조하라”며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7월4일 발췌개헌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이승만의 첫 번째 위기였다.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미국은 다시 한번 이승만 제거를 검토했다. 이번에는 이승만의 독재가 아니라 휴전협정 거부가 문제였다. 1953년 미국은 한국전쟁에 지쳐 있었다. ‘한국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은 얼른 전쟁을 마무리짓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이승만이 완강히 반대했다. 그는 ‘북진통일’을 거듭 주장하며 “유엔군이 응하지 않으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이승만 체포 뒤 유엔군 군정 선언도 검토

물론 당시 한국군의 전력을 볼 때 단독 북진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승만이 필사적으로 휴전에 반대했던 까닭은 미국이 아무런 대안도 없이 빠져나갈 경우 또 다른 전쟁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국민 앞에서 통일과 승전을 목놓아 외침으로써 국민적 지도자로서 인기몰이를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1952년보다 더욱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미국의 ‘한반도 3대 정책목표’ 가운데 ‘한반도 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부분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이승만을 제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1953년 4월24일 클라크 사령관이 “이승만 제거를 다시 추진해야 한다”는 보고를 워싱턴에 보낸 이후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이 입안됐다.
» 이승만 정권 말기 반독재를 향한 시민들의 요구는 4·19 혁명을 통해 나타났다. 한겨레 자료

‘항상 준비 상태의 계획’이라는 뜻의 에버레디 계획은 △한국군이 휴전에 반발해 유엔군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독자 행동에 들어가거나 △심지어 유엔군에 적대 행위를 할 세 가지 경우에 대비한 군사적 대응 방안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이승만 등 한국 정치인을 체포하고 유엔군이 군정을 선언하는 내용이 포함됐고, “비상 대기군은 서울과 서울~대전 간 철로를, 미1군단은 의정부를, 미9군단은 춘천을, 미10군단은 원주를 각각 점령한다”는 병력 배치 계획도 세워졌다. 그러나 에버레디 계획은 말 그대로 ‘준비 상태’에만 계속 머문 채, 상황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수정만 거듭하다가 폐기됐다.
 
1950년대 초 미국은 이처럼 한국의 대통령을 제거하고 새 정권을 수립할 의지가 있었고, 힘도 있었다. 한국 내 협력자도 있었다. 그런데 쿠데타 계획이 몇 차례나 검토되고서도 끝내 실행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사공이 너무 많은 까닭도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누구보다 계획에 깊이 관여했던 클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화되기 힘든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아주 완강했으며 한국 국민의 적극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4·19 건너뛰고 5·16 일어난 셈

이승만 이후를 책임질 지도자도 마땅치 않았다. 미국이 염두에 뒀던 차기 지도자 후보에는 장면과 조병옥이 있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 이은도 물망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1946년 5월 “미국이 이승만 대신 이은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려 한다”는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실려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장면과 조병옥은 리더십과 미국과의 친밀성이 의문시되었고, 무엇보다 이승만에 비해 국민적 지지도가 약했다. 이은의 경우는 국민적 지지와 동시에 반발도 상당했다(일본인 부인을 두었다는 등의 이유였다). 그를 권좌에 앉힌다면 대통령으로 할지, 입헌군주로 할지, 대한민국과 옛 황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할지 등의 문제도 복잡했다.
 

미국의 세 가지 목표 가운데 마지막 하나, 즉 ‘한반도에 강력한 친미 반공 정권을 세운다’는 목표에 이승만 제거가 부합하지 않은 것도 이승만으로서는 행운이었다. 한국전쟁을 치르며 세계는 급속히 냉전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에서도 매카시를 비롯한 이승만 지지자들이 속출했다. 이승만보다 다루기 쉬우면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반공 이념을 가진 지도자가 있다면 모르되, 없었던 것이다. 굳이 그런 인물을 찾는다면 민간 정치인보다는 군인 중에서 찾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그때까지 친미 반공을 위해 군사정권을 세울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1950년대 초 미국의 이승만 제거 계획이 실행됐다면 한반도 정세는 어떻게 변했을까?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하나는 1953년 미국이 한반도에서 발을 빼는 데 급급해 한-미 동맹 없이 이승만을 제거했을 경우다. 아마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도 없었을 테고 효순이·미선이 두 소녀가 장갑차에 치여 죽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상황이 베트남전 당시 미국이 베트남에서 물러갈 때와 거의 흡사하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우려대로 얼마 뒤 북한과 중국, 소련이 다시 한번 한반도 적화통일을 시도했을 수 있으며, 남한은 남베트남의 운명을 20년쯤 앞서 겪게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이보다 일찍, 그러니까 1952년께 미국이 쿠데타를 주도하거나 용인했을 경우다. 그것은 4·19를 치르지 않고 5·16이 10년 정도 먼저 일어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어떤 차이를 가져왔을까? 4·19의 원동력에는 반독재 민주주의 의식뿐 아니라 경제 문제 해결에 대한 열망도 있었다. 당시 야당의 정치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에서 보듯, 이승만 정권 말기 미국의 원조가 급속히 줄어드는 한편 경기는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국민의 경제 관련 불만이 극에 달했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단지 반공 이데올로기와 총칼의 힘만으로 정권을 유지하려 하지 않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의 망설임, 불행 중 다행

반면 1952년 이전까지는 국민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경험이 아직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반공’ ‘승전’이라는 명분만으로 권력을 유지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란 이야기다. 물론 그처럼 강압 일변도의 정권이 장기 집권할 가능성은 낮다. 쿠데타·폭동·암살 등이 꼬리를 물었을 것이고, 민정이 회복되었다가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또 다른 군사 쿠데타가 나는 식의 정치 불안이 반복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환경이라면 경제발전이나 중산층 형성의 기회도 좀체 오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아프리카·남미·동남아시아 등에서 익히 볼 수 있던 ‘제3세계 20세기 정치사’의 패턴이다.

어쩌면 이승만 제거 계획은 5·16으로 실현됐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그사이 약 10년의 유예 기간이 있었다. 이 유예 기간을 가져오게 한 미국의 망설임, 그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몇 안 되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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