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정치/선거경제/복지미디어전쟁국제정치.경제민족/통일사회/사법군사/안보문화/스포츠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교육/과학   고대사/근현대사   고향소식/해외동포   포토/해외토픽   자유게시판  
편집  2021.04.23 [10:30]
고대사/근현대사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고려말 홍건적과의 싸움 전말
 
양승국 기사입력 :  2008/05/15 [15:34]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고려말 홍건적과의 싸움 전말/양승국


  다음은 중국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고려말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한 주요 세력이 북상하여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왕은 도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하고 개경은 홍건적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국사시간에 배워 알고 있는 일이나 그 실상은 단순히 도적떼의 침입이 아니라 원나라를 전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운 홍건적의 주력군으로써 그들의 군세를 볼 때 그들과 치른 전쟁은 한국역사상  대규모 전쟁 중의 하나였었습니다. 
 
▲     © 홍건적
수세에 몰린 원나라의 요청에 의해 구원군을 2차에 걸쳐 보내 토벌전에 참가했다가 20만에 달하는 홍건군을 궤멸시킴으로 해서 고려의 지도층은 홍건적이 세운 명나라에 대해 자신감을 갖을 수 있었고, 그 자신감의 표현이 요동정벌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라가 바친 요동반도를 탈환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 이성계가 자행한 위화도 회군입니다. 따라서 구데타로 집권한 이성계 일파는 고려의 역사를 왜곡과 은폐로 기술했습니다.   
 
중국인들이 쓴 사서에는 한국이 중국대륙에 식민지를 경영했다는 기록이 무수히 나타나있는데 한국의 국사학자들은 그것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황당한 기록이다. 어떻게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 입장에서 중국대륙에 식민지를 경영할 수 있겠느냐 손사레를 치기에 바쁩니다. 이 기사도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
 


원말 거대한 물결처럼 일어난 농민전쟁은 수많은 중국의 열혈남아로 하여금 투쟁의 장으로 이끌어냈다. 그 중 세 방면으로 북벌을 행한 홍건군은 원왕조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삼로의 홍건군은 천리를 긴 여정을 전전하며 그 성세가 호대하게 되었다. 그 중 일대는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쪽의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조주(曹州)를 경유하여 고려의 도성 개경에 이르렀다. 조주는 지금은 산동성 하택(荷澤)이다. 홍건군은 2000여 키로를 행군하여 고려로 들어간 것이다.



원나라 말기의 중국사회는 계층 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첨예하게 부딪치게 되었다. 서기 1351년 ( 원순제(元順帝) 지정(至正) 11년) 5월 유복통(劉福通)이 영주(潁州)에서 두 팔로 가슴을 두드리며 한 번 외치며 기의(起義)의 깃발을 올리니 강회지간(江淮之間)의 호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기의군은 머리에 모두 홍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군(紅巾軍)’이라고 칭했다. 그 다음 해 기의군은 일거에 항주를 공격, 점령하여 원나라의 조운(漕運)을 끊고 다시 고우(高郵)에서 원나라의 승상 탈탈이 이끌던 40만의 대군과 싸워 궤멸시켰다. 이 일을 두고 ‘동남의 당에는 홍건으로 모두 덮였구나!’라고 했다.





서기 1355년(원순제 지정 15년 소명왕 용봉 원년), 박주(亳州)를 점령한 유복통(劉福通)은 한림아(韓林兒)를 추대하여 소명왕으로 옹립고 국호를 송(宋), 연호를 용봉(龍鳳)이라 했다. 이후 2년간 홍건군은 차례로 5차에 걸려 야선(也先)의 철목이부(鐵木爾部) 군 30만에 달하는 원군을 타격하여 궤멸시켰다. 서기 1357년 6월 대송의 승상 유복통은 삼로의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감행하여 그 전위부대는 곧바로 대도에 이르렀다. 홍건군은 그 군기에 '虎賁三千(호분삼천) 直抵幽燕之地(직저유연지지), 龍飛九五(용비구오), 重開大宋之天(중개대송지지)라는 구호를 써서 내 걸었다. 용맹한 3천의 전사가 곧바로 유(幽)와 연(燕)의 땅으로 달려온 것은 주역의 건괘(乾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가 말하는 것처럼 용이 비상하여 원나라에 망한 송나라의 천하를 다시 연다는 뜻이다.





관선생(關先生)과 파두반(破頭潘)가 이끈 홍건의 중로군은 산동의 조주(曹州)에서 출발하여 대도를 포위했다. 대군이 행군 중 이르렀던 성은 모두 함락되었다. 요주(遼州), 대동(大同), 상도(上都)가 차례로 함락되어 원나라 지도부를 진동시켰다. 서기 1359년 정월 대도를 포위하고 있던 홍건군의 일부가 북상하여 요양(遼陽)을 함락시켰다. 사서에 ‘ 관선생과 파두반이 전녕로(全寧路)로 진격하여 로왕(王)의 왕궁을 불태우고 요양에 주둔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원나라의 재상 자리에 새로 오른 하태평(賀太平)은 그 아들 야선홀도(也先忽都)를 황제에게 천거하여 기용하도록 했다. 야선홀도는 첨사(詹事)가 되어 원나라 군대를 통괄하는 대장군의 직위에 올라 홍건군에 의해 점령된 요양을 탈환하려고 했다. 이에 관선생과 파두반군이 전마를 수습하고 전투준비를 하자 야선홀도가 두려워하여 요양으로 진격하는 것을 멈춤으로써 결국은 원나라의 토벌군은 무너져 철수하고 말았다. 그해 2월 홍건군이 요양행성(遼陽行省)을 설치하고 관선생은 모거경(毛居敬) 등을 행성의 평장사에 임명했다. 이때 원나라 순제(順帝)는 홍건군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고려에 명을 내려 탐라에 궁전을 건설하도록 한 다음 고려로 들어가려고 했다.



순제의 행궁을 저지하고 원나라에 대한 고려의 군사원조를 끊어 요양행성의 방어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대도(大都)에 대한 공세를 강화시키기 위해 홍건군은 고려 정벌을 결의했다.



당시 고려와 원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면, 원제국은 건국시기에 27년 동안 7차에 걸친 공격 끝에 비로소 고려를 복종시켜 원나라의 위성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두 나라의 밀접한 관계는 당과 신라의 국가 대 국가의 특수관계보다 더 깊게 되었다. 원세조 때 고려의 충열왕이 세조의 딸인 제국(齊國)의 장공주(長公主)를 맞아들여 비로 삼음으로 해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고 충열왕은 다시 령을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몽고복을 착용하게 하고 두발을 몽고식의 변발을 하도록 했다. 이후로 두 나라는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대대로 혼인으로 연결되어 부마국의 지위를 지속했다. 그리고 고려 세자는 토로화(吐魯花) 즉 인질이 되어 대도에 머물면서 고려 본국의 왕위를 이었으며 수시로 대도에 들려 황제에게 조현을 드려야 했다.





고려 세자는 대도에 머물 때는 원나라 정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왕공과 귀족에서 황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원나라 지배계층은 고려 여자를 부인으로 삼았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여인은 순제의 황후 기황후다. (고려의 환관 박불화(朴不花)의 힘이 컸다.) 이런 것들은 고려와 원 두 나라의 관계가 다른 나라의 것들과는 매우 특수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나라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고려를 관리했다. 고려의 왕세자를 숭서성의 좌승상으로 삼고 몽고인을 중서성평장사(中書省平章事)로 임명하여 제주도를 포함한 고려의 각지에 다루하치[達魯花赤]를 파견하여 고려의 내정에 간섭했다. 이것을 보면 당시 고려는 어느 정도까지는 독립성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원나라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1354년(고려 공민왕3년), 고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홍건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보냈다. 사서에 “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평강부원군 채하중(蔡河中)이 당시 원의 승상 타타르[脫脫]의 말을 전하기를 ‘ 남쪽의 적당을 토벌하라는 황제의 명이 있으니 고려왕은 마땅히 정예한 군사를 보내 도와야할 것이오’.라고 전했다. 이때 원나라의 정권은 쇠퇴하기 시작해서 하남에서는 요사스러운 도적 한산동(韓山童) 등이 북을 울려 도적떼를 모으기 시작했고 영주(潁州)에서는 요사스러운 인물 유복통(劉福通)이 기병하여 관선생(關先生), 사유인(沙劉仁), 왕사성(王士誠) 등의 무리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산동 등의 땅에서 할거하여 그 세력이 중원을 흔들어 도적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천하대란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에 고려의 공민왕은 2만 3천의 군사를 수로로 출병시켜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같은 해 8월 원의 승상 타타르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장사성을 토벌할 때 고려에 군사를 구하자 고려의 공민왕은 유적(柳翟), 이권(李權) 등을 장수로 삼아 2만 3천의 병력을 주어 강남의 홍건을 토벌하기 위해 원정을 보냈으나 11월 고우에서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이권 등 6명의 장수들이 전사했다. 고우에서 크게 패한 원군은 유적이 이끌던 고려군과 함께 황하와 회수 일대의 홍건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홍건군이 고려에 원정한 원인이 그것에 있었다.



홍건군은 선후 2차에 걸쳐 고려를 공격했다. 서기 1359년 고려 공민왕 8년 12월 모거경(毛据敬)이 이끄는 홍건군 4만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홍건군은 파죽지세로 의주(義州), 인주(麟州)를 함락시키고 계속 남하했다. 고려의 공민왕은 이암(李岩)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에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에, 김득배(金得培)를 도지휘사(都指揮使), 이춘부(李春富)를 서경윤(西京尹)으로 삼아 홍건군을 물리치도록 했다. 고려군은 청천강 북안에 포진을 하고 철주(鐵州)에서 회전에 들어갔다. 싸움에서 패한 홍건군은 의주(義州)와 정주(靜州)로 후퇴했다. 그러나 다시 홍건군은 선주(宣州)에서 고려군을 격파했다. 정주(定州)를 함락한 홍건군은 남하하여 서경(西京)을 떨어뜨렸다. 이로써 홍건군은 서경을 함락시킴으로써 원정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홍건군이 서경에 주둔하여 더 이상의 군사행동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홍건군에 대한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





얼마 간의 시간을 얻은 고려는 다음 해 정월 전 국력을 기울려 군사들을 징병하여 서경을 포위 공격했다. 고려와 홍건 양군은 몇 일 간 격전을 치러 양군 모두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때는 마침 혹한이라 홍건군 중에 동상에 걸린 자가 속출했음으로 할 수 없이 서경을 포기하고 용강(龍岡)과 함종(咸從)으로 퇴각했다. 2월 이방실이 이끄는 고려군은 함종에서 회전에 들어가 홍건군을 크게 격파했다. 홍건군 원수 심자(沈刺)와 황자선(黃自善)은 고려군의 포로가 되고 약 2만 여 명의 군사가 전사했다. 압록강을 건너 달아난 홍건군의 패잔병을 천여 명이 안 되었다. 홍건군이 비록 패배했지만 아주 고려에 대한 공격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고 장차 보다 큰 규모의 공격이 있을 것을 암시했다.









서기 1361년 공민왕 10년 10월 홍건군의 관선생과 파두반, 사유이 등이 거느리는 20만의 홍건군이 고려를 재침했다. 홍건의 대군은 신속하게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점령했다. 고려는 안우(安佑)를 상원수로, 김득배를 도병마사(都兵馬使), 이방실을 도지휘사로 임명하여 홍건군을 막도록 했다.





홍건군은 파죽지세로 무주(撫州), 박주(博州), 개주(价州), 태주(泰州), 연주(延州) 등을 함락시키고 고려군을 패퇴시켰다. 고려군은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작전을 펼처 순주(順州), 은주(殷州), 성주(成州)의 백성들과 양식 등을 자비령 쪽으로 모두 철수시켰다. 11월 고려와 홍군 양군은 안주에서 크게 싸운 결과 고려군이 대패하고 상장군 이음(李蔭)과 조천주(趙天柱) 등이 전사하고 지휘사 김경천(金景譂)은 항복했다. 싸움에 승리한 홍건군은 “ 홍건군 110만이 동쪽으로 진군 중에 있으니 빨리 항복하라!” 라는 내용의 격문을 써서 고려 각지로 보냈다. 안주에서의 싸움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고려군의 방어선은 붕궤되었다.





승승장구한 홍건군은 자비령을 돌파하자 고려군의 주장(主將) 안우와 김득배는 전장에서 이탈하여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이때 공민왕은 개경의 성문을 크게 열고 안동으로 달아나고 몇 일 후에 개경은 홍건군에게 의해 점령되어 궁궐이 불탔다. 이와 동시에 많은 고려의 백성들이 홍건에 참여했는데 그 수가 10여 만에 달했다. 다음 해 정월 고려의 총병관 정세운이 20만의 고려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개경 동쪽 교외의 천수사(天壽寺) 일대에 진채 세우고 주둔했다.











정세운은 안우, 이방실, 최영에게 각각 명하여 성의 동, 남, 서 3면에서 홍건군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당시 큰눈에 바람이 세차게 불자 홍건군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막사 안에서 머무르며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고려만호 이성계가 2천의 동북계 정예병들을 이끌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자 홍건군 지휘부에 대란이 일어났다. 고려의 본대가 그 뒤를 따라 공격하여 개경 성안으로 진격하지 홍건군의 지휘부는 붕궤되고 말았다. 관선생, 사유이 이하 10만의 홍건군이 전사하고 파두반과 남은 잔여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요양으로 들어갔다. 그해 4월 요양으로 들어간 홍건군은 원군에 의해 섬멸되고 파두반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홍건군의 2차에 걸친 고려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장장 2천여 키로미터의 거리를 진군한 중로군이 실패한 원인은 송(宋)의 주력과 연계에 실패하여 고립되었으며, 근거지 없이 사방으로 전전하며 유격작전을 행했으나 보급이 용이하게 이루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건군의 1차 고려 원정에 있어서는 홍건군은 원정 전 10개 월 전에 사자를 고려에 보내 통지를 함으로 해서 고려가 사전에 준비를 갖출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용맹한 고려군을 농민들로 구성된 홍건군이 이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족신문
 
 
주간베스트
  개인정보취급방침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Copyright ⓒ 2007 인터넷 민족신문. All rights reserved.
Contac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