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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황제 앞에서 거사 미루다
"이토가 순종을 배제하고 대구 찾았다면 거사는 달라졌을 것"
 
데일리안 기사입력 :  2010/03/2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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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황제 앞에서 거사 미루다
<2010년 기획특집 - 황제, 길을 걷다③>총성없는 거사를 치르다
"이토가 순종을 배제하고 대구 찾았다면 거사는 달라졌을 것"
최용식 기자 (2010.01.23 08: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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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길을 걷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융희(隆熙), 우리에게는 순종이라는 조선 27대 임금으로 더 친숙한 이름이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09년 1월 7일 도성을 떠나 일제가 만든 경부선 철도를 이용해 대구를 찾았다. 황제가 도성을 떠나 첫 발걸음을 내려 놓은 것이다

이후 황제는 부산과 마산 등을 방문한 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번 대구를 찾는다. 황제는 지금의 달성공원을 둘러본 뒤 그해 1월 13일 도성으로 돌아간다.

황제의 남도 순행은 민심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황제는 일제가 철저하게 계산해 놓은 정치적 이익 앞에 이용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황제가 도성을 떠나 걸었던 길은 압제에 의한 무겁고도 힘든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이제 우리는 황제가 걸었던 길을 통해 아픈역사를 되돌아보고 자기반성과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알아가는 이유다.

데일리안 대구경북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황제가 처음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던 길을 조명하는 ‘황제, 길을 걷다’라는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민족의 원흉이자 아시아 평화를 교란한 핵심 인물로 지목 받았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체포돼 이듬해 3월 26일 순국한다.

그러나 안중근은 하얼빈이 아니라 대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일본에 붙잡힌 뒤 진행된 일본 검찰신문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순종이 처음 방문한 대구, 그리고 도성을 떠나 처음 걸었던 길은 조선 독립군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대한의군 참모총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었던 안중근이 있었다.

다음은 1909년 10월 30일 하얼빈 일본제국 총영사관에서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와 서기 기시다 아이분 등이 참석해 통역촉탁 소노키 스에요시의 통역으로 안중근의사를 신문한 원문 중 일부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안중근은 일본검찰신문에서 하얼빈이 아닌 순종 남행의 첫 방문지인 대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안중근과 일한관계사, 원서방

[검찰관] 피고는 전부터 이토 공을 한국 또는 동양의 적으로 생각하고, 죽이려고 결심하고 저격한 것인가.
[안응칠] 그렇다. 나는 삼 년 전부터 이토를 죽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일본을 신뢰하고 있었는데, 점점 한국이 이토에 의해 불행해져서 내마음은 변했고, 결국 이토를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이천만 동포 모두가 같은 마음이다.
[검찰관] 피고는 삼 년 전부터 끊임없이 이토 공을 죽이고자 했는가.
[안응칠] 그렇다. 나는 힘이 없었고, 기회가 오지 않았다.
[검찰관] 올 봄 한국 황제 행차 때 이토 공이 호종했는데, 그때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을 실행할 기회는 없었는가.
[안응칠] 그때 나는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이토를 죽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총기도 준비가 안 됐고, 먼 길일뿐만 아니라 호위병도 많았으며, 또 한국황제께서도 일행에 계셨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검찰 신문조서는 일본 정치학자인 이치가와 마사키가 1979년 출간한 ‘안중근과 일한관계사(安重根と 日韓關係史)’에 나오는 내용으로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 이기웅 이사장이 번역해 출간한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이 검찰신문에서 일본 검찰은 ‘황제 행차’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 시기를 ‘올 봄’, 즉 1909년의 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에 따르면 순종은 1월과 2월에 순행한 기록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일본 검찰 측이 황제의 순행일자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계획을 3년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 일본검찰신문에서 밝히고 있으며, 일본검찰이 황제 행차를 언급하자 거사를 진행하려고 생각했다는 답을 하게 된다.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 이기웅 이사장은 “이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안중근은 1908년 말에서 1909년 초기에 갑산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순종의 남행을 지켜보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며 “만약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을 배제하고 대구를 찾았다면 안중근의 거사는 달라질수 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검찰신문조서에서 안중근이 ‘황제 행차’ 때 거사를 진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거리가 멀고, 호위병이 많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안중근의 답변은 ‘황제 행차’가 순종의 남행이며, 첫 방문지인 대구를 말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갑산(甲山)에 있었던 안중근에게 대구는 엄청난 거리의 도시다. 서울에서 철도를 이용해 대구까지 걸리는 시간은 무려 8시간, 함경남도 인근에 있는 갑산지역에서 대구를 찾는 일은 쉬운일 아니었을 것이다.

◇ 안중근은 순종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지 않는 것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지켰다. 사진은 안중근의 마지막 면회 장면이다. ⓒ 안중근과 일한관계사, 원서방

더구나 순종의 남행이라는 ‘정치적 이벤트’는 수많은 헌병과 군인을 동원하는 결과를 가져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쉽게 접근할 수도 없었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실패해서는 안될 거사가 실패의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영남불교문화연구소 김재원 소장은 “순종 남행에 이토 히로부미가 호종했다는 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며 “안중근이 일본검찰신문에서 진술한 내용은 순종의 남행 첫 방문지인 대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려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중근이 순종 남행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순종이었다. 황제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저격한다는 것은 임금에 대한 예(禮)가 아니라는 것이 안중근의 생각이었다.

일본검찰신문에서 안중근은 “한국황제께서도 일행에 계셨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던 것이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안중근에게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4부에서는 순종이 대구를 찾으면서 하루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만취한 관리들의 이야기입니다.>[데일리안 대구경북 = 최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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