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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2)] 여운형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기사입력 :  2008/05/19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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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3·1절을 맞아 그동안 좌파 또는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에서 제외됐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에게 건국훈장 중 2등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냉전시대에는 ‘사회주의자에게 건국훈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므로 훈장이 주어지지 않았다가 탈냉전의 정서에 맞추어 상훈이 결정된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이 처음은 아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도 1995년 국민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이전에는 혁혁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사회주의 인사의 경우, 1945년 광복 전에 사망한 경우에만 훈장을 추서했는데 2005년 이후에는 광복 이후에 돌아가신 분까지 확장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표창 대상은 아니었다. 일제 때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인사 중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한 분에게만 상훈이 주어졌는데, 정부 수립 시기에도 공산·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적극 활동하거나,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사는 제외됐다. 몽양의 2등급 대통령장 추서에 대해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며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 소련군 관계자들과 만나는 몽양 여운형(오른쪽)


여운형의 정치노선을 어떤 일관된 사상에 입각하여 규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07~1919년은 부르주아적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1920~1932년은 사회주의자로서 애국계몽적 논리를 포섭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33년부터 1943년까지는 역시 부르주아적이며 개량적인 계몽주의가 두드러지는 시기였고, 1944년 이후부터 1947년 암살당하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해방 직후 건국 과정을 논할 때 좌익을 배제하고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945년 11월에 귀국한 우남 이승만도 처음에는 좌익을 무시하지 못했다. 좌익과 우익이 분립된 상황에서 이를 통합하려고 시도한 정치가 중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이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김규식이었다. 여운형은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결성하여 우익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우익 인사 중 민세 안재홍 외에는 참여하지 않아 부분적인 통합에 그쳤다. 그러나 지방의 건준 지부는 좌우통합 진용으로 출발했으며 지역 인민위원회로 전환된 이후에도 좌우통합이 완전히 무너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중앙에서는 이미 1945년 9월부터 우익의 ‘임정(臨政) 봉대론’과 좌익의 ‘인공(人共) 수립론’으로 대립되었지만 지방에서는 1946년 1월 찬·반탁 논쟁 이후부터 좌우 대립 구도가 형성된 지역이 많았다. 물론 지방 소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들어가면 6·25전쟁 때야 비로소 좌우익간의 구별이 확연해진 지역도 있었다. 그것은 우익의 지역적 기반이 그렇게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특히 지역에서도 인기가 있었으며 대중과 영합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광복 직후 힘의 공백기에는 건준이 사실상의 정부로서 기능했으므로 몽양의 건국노선이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1946년 1월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계기로 점화된 찬·반탁 논쟁 이후에는 찬탁도 아니고 반탁도 아닌 중간노선을 걷게 되면서 좌우 양쪽으로부터 사시 어린 시선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타협적 노선이 좌우 양익의 제휴 대상이 되었던 면도 있었지만 이미 확실한 입장을 가진 정파에 의한 파쟁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몽양의 건국노선은 힘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운형의 타협적 태도는 1946년 봄 미·소 공동위원회(약칭 공위) 휴회 이후 잠시 빛을 발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같이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했다. 좌우합작은 공위가 휴회된 상황에서 좌우익간의 대립을 지양하고자 마련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좌우익이 통합되기보다 좌우익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중간파만의 결집에 그쳤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 1945년 8월 16일 서울 계동 휘문중학교 교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환영하는 학생들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1차 회담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을 통해 제시했던 ‘합작5원칙’을 7월 26일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는데 ‘삼상회의 결정의 전면적 지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친일파-민족반역자 제거’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등 우익 진영과 미군정에서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항을 고수하면서 7월 25일 이후 회의에 불참했다.
▲ 여운형은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경성축구단 선수뿐 아니라 야구선수로도 활동했다.


이에 우익 측은 7월 29일 좌익이 불참하여 좌우합작 2차 회담이 열리지 못하자 언론에 8원칙을 공개했다. 이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우익의 반동성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좌우의 대립 속에서 여운형은 8월 12일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삼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1946년 10월 4일 김규식의 집에서 좌우 대표들은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을 조정하여 통일원칙인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했다. 여운형은 10월 6일 인민당 확대위원회에서 합작 7원칙을 보고하고 승인 받았다. 이에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 7일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으나 이미 7월 말부터 조선공산당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9월 초부터는 박헌영, 이강국 등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이 내려져 참여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우익 정당의 중심 한국민주당마저 10월 8일 원세훈 등 당대표들이 타협한 안을 승인하지 않는 등 좌우 양익의 실세들이 이탈해 버려 중간좌파와 중간우파만의 합작으로 귀결되었다. 1947년 12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여운형의 사회주의 이념은 박헌영의 그것처럼 투쟁적이며 배타적이지 않았다. 여운형의 이념은 좌우합작 운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좌우통합적이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몽양을 만났던 레닌은 여운형에게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民度)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는데 몽양은 이를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몽양은 ‘착취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도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몽양은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도왔지만 기독교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유물론(唯物論)을 뼛 속 깊숙이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폭력혁명에도 반대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7년간 전도사로 시무했던 경험과 신앙이 그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비(非)공산주의자였다.

외국과의 관계 측면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은 거의 유일한 좌익 정치가였다. 당시 소련은 정부 수립과정에서 우익 모두를 배제하려 했으므로 남한의 정치가 중 공산주의자가 아닌 인사 중 배제 당하지 않은 인사가 역시 많지 않았는데 몽양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여운형은 “미국과 소련 한쪽에 기대는 정책을 외세에 아부하는 정책”으로 규정하여 균형을 추구했으므로 자주적인 입장의 외교론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는 미·소 양측으로부터 정치적 유혹을 받았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이렇게 한국을 점령했던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인정 받은 균형된 길을 걸었지만 냉전의 출현으로 좌우익간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암살당했다.

여운형은 식민지 시대에도 민족의 지도자답게 보다 국제적 차원의 외교적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렇다고 그가 투쟁하지 않고 식민지 권력과 타협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자 이강국은 후일 “여운형만큼 일제의 포악한 위협과 교묘한 회유 속에서 권위와 절조를 유지하면서 지상의 신사로, 지하의 투사 생활을 겸비한 인물은 없다”고 평가했다.
▲ 여운형(왼쪽)이 1935년 가출옥한 안창호(가운데)와 자리를 함께 했다.


결론적으로 몽양은 대외적으로는 자주노선을, 민족 내부에 대해서는 민족통일을 견지했으며, 이념적으로는 친사회주의적이지만 비공산주의적인 경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비합법적인 조직가나 강철의 혁명가가 아닌 대중정치가였고 선동가였다. 여운형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자’라고 규정했는데, 이러한 사상적 모호성과 불명확성은 반대파로부터 기회주의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특정 이념보다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했다.

여운형은 대중의 인기를 얻은 정치가였다. 그의 건국노선에 대해 좌우 모두가 비교적 타협적 태도를 보이면서 일정 부분 제휴했던 것도 대중적 인기가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를 시기하는 세력들은 그에 대한 테러를 수차례 기도했으며 결국 1947년 7월 19일 극우 테러리스트 한지근에 의해 암살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 후 조직적 기반이 없었던 여운형계 인사들은 지지 기반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대다수가 월북(越北)을 선택했다. 따라서 몽양과 가까웠던 인사 중 대한민국 건국에 직접 참여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몽양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못하고 잊혀졌다. 그러나 그의 포용력과 타협적 사상은 통일시대 남북화해 사상의 귀감이 될 단초를 형성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여운형 약력


-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 출생

- 1900년 배재학당 입학, 협성회 주최 토론회 참가

- 1901년~13년 광동학교와 초당의숙 설립. 크리스도교 입교. 평양신학교입학

- 1913~1919년 신한청년당 조직,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함. 상하이정부 외무부 차장

상하이교민단장

- 1920~ 32년 고려공산당 가입.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 중국국민당 입당. 제령위반죄로 3년간 복역

-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 1943년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 결의

- 1944년 조선건국동맹 결성. 농민동맹 결성

- 1945년 엔도 정무총감을 만나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치안유지를 맡음

건국치안대 조직.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임시의장, 조선인민당 창당

- 1946 민주주의민족전선 임시집행부 공동의장.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좌우합작 위원회 참석, 인민당해체

- 1947년 근로 인민당 창설. 혜화동 로타리에서 저격당해 서거함.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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