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6일 중국 베이징대에선 중국 내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한 비공개 정세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북한의 2차 핵실험과 향후 전망.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발표자 대부분이 북한 옹호론을 강하게 개진했다고 전했다.
사회과학원 쭤다페이(左大培) 연구원은 “미국은 조선(북한)을 제재하는 데 중국을 앞장세우는 악역을 맡겨 이간시키고, 궁극적으론 조선에 친미(親美)정권을 세우려 할 것”이라며 “조선 제재론을 펴는 우파들이 있는데 이는 미국의 계책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중앙민족대학 장훙량(張宏良) 교수는 “조선의 형제가 핵무기를 소유하는 것이 중국에 좋았으면 좋았지 나쁜 일만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사회자인 베이징외국어대 쉬량(徐亮) 교수는 토론내용을 종합 정리하여 “북의 핵실험이 중국에 위해(危害)라고 과대·왜곡 선전하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발표했다. 그의 요약 내용 중엔 ▶북 제재 반대 ▶수교 60주년을 기해 중·조 관계 더욱 강화 ▶북에 대한 어떤 타격도 불허 ▶북 정권의 붕괴 불원(不願) 등도 포함돼 있다. 마지막 내용이 압권이다. “조선이 서방의 패권에 맞서 핵무장 국가가 되는 것이 오히려 중국에 유리하고 동북아의 안정성을 증강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김정일의 방중(訪中)과 그를 대하는 중국의 극진한 모습을 지켜보는 한국인들로선 심사가 편치 않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개의 목소리까지 들린다. 그러나 베이징대에서의 토론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게 중국이란 나라다. 우리만 중국의 ‘생얼’을 혼동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중국 일각의 친한론(親韓論)만 골라 편식하고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운운하는 중국 정부의 수사에 도취해 중국의 진짜 얼굴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토론회 한 달 뒤 중국은 북한 문제와 북핵 문제를 분리해 다룬다는 이원 정책을 채택했다. 북핵 문제는 6자회담에서 해결토록 하고 그와 별도로 북한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는 더욱 돈독히 다져나간다는 전략이다. 즉 유엔의 대북 제재와 상관없이 대북 지원 및 경제협력을 확대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9월 베이징에서 북·중 수교 60주년 기념 ‘양국 우호의 해’ 기념식을 거행했고, 10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혈맹(血盟)”관계를 강조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북·중 간엔 고위급 인사들이 뻔질나게 오가며 각종 조약을 체결하는 등 협력을 다지고 또 다졌다. 김정일 방중도 그 연장선상에서 장기간 조율해 온 결과물이다.
물론 중국 내엔 북한 제재를 주장하는 견해도 분명 존재한다. 특히 ‘국제파’로 불리는 세력은 주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대북정책을 수립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하고, 선박 검색 등의 제재 조치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중국의 대북정책은 이들 국제파가 주도했으나 지난해 2차 북 핵실험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 북·중 우의를 중시하는 이른바 ‘한반도파’들이 일제히 공격에 나섰고 양파 간 치열한 논쟁 끝에 한반도파가 우위를 점하게 됐다는 것이다. 베이징대 토론회는 한반도파의 득세를 확인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는 그런 변화와 움직임을 몰랐던 것일까.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아편전쟁 이전의 중화(中華)사상이 되살아나는 징후들이 감지되고 있다. 중화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는 자신들의 종속국이다. 중국의 ‘관할권’ 안에 있는 지역으로 어려울 땐 도와줘야 하는 ‘품 안의 아이’다. 그 땅에서 미국 같은 나라가 큰소리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자체가 체질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게 한국은 뒷전이요, 북한을 소중히 안아야 하는 까닭이자 명분이다. 실리(實利)적 측면에서도 북한은 미국의 방패막이로서 활용가치가 높다. 베이징대 토론 내용이 바로 그러한 속내의 일단이다.
바야흐로 오랜 잠에서 깨어난 용이 몸을 뒤트는 중이다. 대륙의 일진광풍이 한반도를 몰아칠 기세다. 어쩌면 천안함을 두 동강 낸 서해의 파고는 전주곡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행히 천안함 사태와 김정일 방중 사건은 한국과 한국인들이 망각하거나 착각하고 있었던 북한의 위험성과 중국의 진면목을 명확하게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 대해 섭섭해할 필요도 없다. 이제 그 실체를 확인했으니 그에 맞춰 냉정하게 대처하면 된다. 다만 이젠 헛다릴랑 그만 짚자. 모두 조금씩만 영악해지자.
허남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