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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아야 할 우리땅 간도(間島)
1909년 일제와 청나라의 간도협약은 국제법상 명백한 무효
 
김기백칼럼 기사입력 :  2008/05/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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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김기백 (2004-01-23 19:14:15, hit : 99, vote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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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아야 할 우리땅 간도(間島)


1909년 일제와 청나라의 간도협약은 국제법상 명백한 무효


입력시간 : 2003. 07.19. 00:00

편집자주:이글과 기사는 중국측의 고구려사 왜곡파동이 일어나기 전에 작성된것이지만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시도는 바로 이 간도영유권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중국측의 사전포석이라는 사실을 우리국민모두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되어 민족신문 톱기사로 다시한번 싣습니다.
▲    백두산정계비(碑) - (일제시대 때의 모습)


간도는 백두산 정계비에도 나타나 있는대로 분명한 우리 영토이지만 한.일합방직전이자 1905년의 을사늑약이래 이미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있던日帝가1909년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코자하는 책략으로 그당시 역시 망해가던 청나라와 결탁,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소위 간도협약을 체결 淸國에 넘겨줘버렸다.

소위 간도협약은 체결당시부터 고종황제가 끝까지 승인을 완강히 거부한 상태에서 날조된 원천적으로 불법무효인 1905년의 이른바 을사늑약의 연장선상에서 체결된것인바, 국제법상으로도 당연히 불법이며 무효인것이다..

▲    
북한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터 표지석. 검은색 돌은 지난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사용했던 주춧돌로 보인다.




*백두산 정계비*백두산 정계비란 1712년 (숙종 38) 백두산에 청과 조선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후 세운 비석을 말한다. 여진족에 의한 청이 건국된 이후 백두산주변은 청조(淸朝)가 일어난 영산(靈山)이라 하여 타 민족의 접근을 금지시켜왔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던 조선에게 청은 입장에 빠져 있었다.그 귀속을 주장하던 청은, 1712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선에서는 참판 권상유 (權尙游)를 접반사(接伴使)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출영(出迎)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의 접반사와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는 목극등의 노함을 타 그의 명령으로 백두산에 오르지도 못하였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측의 군관(軍官) 이의복, 감사군관(監司軍官) 조태상, 통관(通官) 김경문 등만을 거느리고 등반하여 눈짐작으로 제대로 실측도 하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 km, 해발 2,200 m 지점이었으며, 비석 상단에 목극등이 직접 대청(大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 새긴 다음, 양쪽의 수행원 명단도 새겨 놓았다. 비석의 높이는 약 70cm, 높이는 약 55cm이다. 귀부는 즉석에서 주변의 돌을 줏어 세워 놓았다.
 
▲     © 편집부



그 뒤 1881년(고종 18) 청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면서 간도 조선인에게 세금을 물리고 호구 조사를 실시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면밀히 조사한 다음, 간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하였으며, 다시 9월에 생트집을 하는 청의 요구에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 종사관 조창식을 보내어 합동으로 조사하게 한 다음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은 토문(土門)이 두만강이라고 계속 생떼를 써 주장하는 바람에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1900년 러시아가 간도를 차지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1년 회령에 변계경무서 (邊界警務署)를 설치하였으며, 1902년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 로 임명 파견하여 주민을 위로하고 한성 주재 청국 공사에게 통고하는 한편, 포병을 양성하며 간도 영유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뒤 을사조약이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손에 넣은 일본 통감부가 남만주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와 푸순 탄광 채굴권 등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청나라와 조약을 맺어 간도를 넘겨 주니 이것이 간도협약이다.(1909) 그러나 이 비마저도 대륙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에 의해 증거 인멸을 목적으로 만주사변당시 철거되고 말았다.


 

백두산 정계비

백두산 정상도 아니고 백두산의 정상에서 4km떨어진 곳에 실측도 하지 않고, 수계도 살펴 보지 않고 조선측 접반 사도 강제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청측의 목극 등이 자신의 군속과 조선측 통역관만 데리고 독단적으로 세운 백두산 정계비. 비문 첫머리에는 대청(大淸)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정계비마저 그나마 일제가 만주 사변을 발발시키면서 강제 철거하였다.


大 淸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오라 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방의 경계를 직접 조사하고자 이 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강희 51년 5월 15일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는 역사의 현장*목극등이 말하기를, "토문의 원류가 중간에 끊어져서 땅 속으로 흐르므로 강계가 분명하지 않으니 가볍게 비를 세우는 의논을 하여서는 안 되겠다" 하고... 물길을 살피게 하였다. ...60여리 가니 해가 저물어 두사람은 돌아와서 백수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보고했다. 목극등이 이어 사람을 시켜 돌을 깍으니 너비가 2자, 길이가 3자 남짓 하였다. 또 분수령에서 귀부를 취하였다. 비에 글씨를 새겼는데 그 이마의 "대청"이라는 두 자는 조금 크게 썼다.

그 아래 글에는, "오라 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 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 51년 5월 15일 필첩식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 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박도상, 통관 김응헌김경문"이라 하고, 드디어 깍아서 세웠다. 일을 마치고 산을 내려와 무산에 돌아왔다. 목극등이 (박권과 이선부) 두 분에게 말하기를, "토문강의 원류가 끊어진 곳에는 담이나 울타리 쌓아서 그 아래의 수원을 표시하여야 한다." 고 하였다. -통역으로 목극등과 백두산에 올랐던 김경문의 이야기를 기록한 홍세태의 '백두산 기'에서 발췌-




신사유람단 단원이었으며 1883년 간도를 조사하고 간도영유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어윤중.

간도 보통학교의 교육 모습. 일제 통감부는 1907년 간도 용정에 용정파출소를 설치하고 이상설 선생의 서전서숙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그 터를 사서 간도 보통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이미 그 전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5년 3월 북간도 공립 소학교를 설립하고 한성사범학교 졸업생을 교원으로 파견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의 통치권 및 주권이 간도 지역에까지 확실히 미쳤음을 입증하는 것이다.**간도협약의 내용**① 한·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이루되, 일본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한다.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③ 청국정부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한다.④ 장래 지린[吉林]·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


간도.


이 지도(출처:교황청 지도)는 1924년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 데미시용 에트랑제트가 발행한 <까똘리시즘 앙꼬레>에 게재하였던 지도의 축소 사본으로, 도쿄 한국연구원 국경 자료지도 k 1호 이다. 1831년 9월 9일,로마 교황 그레 고리오 16세는 조선교구의 제정을 허락하였다.수차의 대탄압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융성하여 1911년에는 조선 교구를 경성과 대구의 2교구로 분할하고 더욱이 1920년에는 경성교구에서 함경 남북도와 간도 지구를 분리,원산교구를 설립하였다.

이 지도는 바티칸 정청이 한국에 있어서의 교구의 관할 영역을 표시한 지도이다.이 지도는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 데미시용 에트랑 제트가 발행한 ,까똘리즘 앙꼬레.에 게재하였던 축소 복사본인 것이다.(1924)한국의 조선 숙종시대로부터 붙어있던 간도지방의 옛 강토 회복의 운동과 한국민과 한국정부의 의지를 억제.배제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倭(일본)정부는 만주 침략의 계획으로 철도 건설 권을 얻기 위해, 소위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이로 인해 당시의 우리 정부는 간도와 길림지역을 청나라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바티칸 정청은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장구한 기간 한국민족이 거주해 왔으며 대한 제국의 영토임이 명백하므로 이와 같이 표시한 것이다.

1965년 일본은 한국을 대신하여 행사한 그 강압 시대의 모든 외교조약의 무효를 선언하였다.그러므로 간도 협약의 무효임은 말할 것도 없고,간도 길림 등의 지역은 당연히 한국 영토임이 명백하다.


북한과 중국은 62년 10월 김일성과 당시 주은래총리가 서명한 「조-중 변계 조약(국경조약)」에서 국경을 확정지었다. 1992년 무렵부터 최근까지 국경 주변에 세워진 경계비석은 21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계비는 70년부터 92년까지 시차를 두고 세워졌으며, 양면에 번호 표시와 함께 각각 「조선」과 「중국」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북한 영토는 1909년에 체결한 청-일 간도협약 때보다 280여㎢ 정도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倭(일본)는 을사 조약의 내용인 '조선의 외교권 위임'을 근거로 하였다지만 그 당시 을사조약은 고종 황제에 의하여 이미 무효화 선언이 되었으므로 옳지 않다.

**http://bestempire.hihome.com/frame1.htm 에서 퍼온겁니다..


..중국놈들..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도둑질 하려는 이때..우리땅 간도를 생각해 보고자 퍼왔습니다 ..



김기백 기자 baek433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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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11 개)
독 자 의 견 제 목 이 름 작성일
11 간도, 조선영토 표시된 지도 발견 담우리 2003.07.21 (14:05:38)

10 '간도는 조선영토' 지도 발견 담우리 2003.07.21 (14:03:14)

9 김기백님.. 시사저널 기사입니다 . 담우리 2003.07.21 (13:54:58)

8 에구^^ 잉간들아! 니들은 우째서리 생각이 그렇게 밖에 안미치니? 김기백 2003.07.20 (18:55:36)

7 빼앗긴 땅 찾는다고 부산떨지 말고 있는 땅이나 김기백만세 2003.07.20 (18:54:05)

6 다좋은데/중국인들은 인종청소를 시켜야 합니다. ㅋㅋㅋ 2003.07.20 (18:52:56)

5 뙈놈들 한테 핵폭탄 쏴서 찾아 오나요? 다좋은데 2003.07.20 (18:51:46)

4 백두산 (중국은 장백산) 반을 중국이 차지하고있다 중국에서 2003.07.20 (05:25:43)

3 헤헤헤.! 미련퉁이 2003.07.19 (17:16:43)

2 역쉬 퉁이가 짱이구낭!!!^^ 김기백 2003.07.19 (17: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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