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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 망친 땅… "굶지만 않으면 중산층" 한숨만
대학졸업 2년 지나도 일자리 얻은 사람은 10명 중 6명뿐
 
조선일보 기사입력 :  2010/07/1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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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가 사라진다] 포퓰리즘이 망친 땅… "굶지만 않으면 중산층" 한숨만


 

입력 : 2010.07.07 03:12 / 수정 : 2010.07.07 08:53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라나시온’호르헤 엘 리아스 부국장

반면교사 아르헨티나
축복의 땅, 빈곤의 땅으로…
4억명 먹일 자원 있어도 쓰레기 뒤지는 사람 생겨
포퓰리즘, 사다리를 부수다…
국민들 이젠 정부 안믿어, 페소화 대신 달러로 거래
앞이 캄캄한 사람들…
10년째 취업난 시달려 新빈곤층 '네그로' 급증

20세기 전반 부유한 선진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지금 중산층이 붕괴되고 교육·일자리 등 각 분야에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지는 상황을 맞고 있다. '20세기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의 실패는 서민과 저소득층을 위한다는 분배·복지의 포퓰리즘이 도리어 희망의 사다리를 무너뜨리는 역설을 낳는다는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진다. 아르헨티나 일간지 '라나시온'과 공동으로 그 현장을 추적했다. /편집자
아르헨티나는 축복을 받고 태어난 나라다. 4억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물과 고기를 생산한다. 석유도 풍부하다. 인구는 3800만명이다. 이론적으로 아르헨티나 사람 1명이 전 세계 사람 11명을 부양해야 한다. 이런 아르헨티나에서 먹을 게 없어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이 생겼다. 2001년 경제위기 때다.

이후 10년.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tv와 음악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중산층'이라고 착각한다. 파비안 인사우샬레(insaullale·31)씨도 그중 하나다. 깡마른 체격의 이 남자 직업은 애완견 산책 시키기 아르바이트다. 매일 오전 7시~오후 4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번화가와 고급 주택가를 돌며 부잣집 개들을 산책시키고 월 1400페소(42만원)를 번다. 카페가 즐비한 대로를 따라 숙달된 솜씨로 한꺼번에 개 11마리를 끌고 다닌다.


‘개 산책’ 아르바이트도 경쟁 치열… 노천카페와 고급 상점이 즐비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번화가에서 파비안 인사우샬레씨가 애완견 11마리를 산책시키고 있다. 그는 경제위기로 취업을 포기한 뒤 몇 년째 부잣집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아르바이트로 먹고산다. /조의준 특파원
"고등학교 졸업 직후 경제위기가 터졌어요. 지금껏 변변한 직장을 가진 적이 없어요. 이 일도 경쟁이 치열해 구하기 쉽지 않아요. 이만하면 저도 중산층이라고 생각해요. 굶지는 않거든요."

2001년 이전에도 위기는 있었다. 물가가 5000% 뛰어오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도 겪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지는 않았다.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는 마지노선이 2001년에 무너졌고, 많은 중산층이 빈곤층 전락의 '미끄럼틀'을 탔다.

그 배경에는 포퓰리즘으로 얼룩진 역사가 있다. 에드워드 글래이서(glaeser) 하버드대 교수는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 정부와 군사정부가 번갈아 들어서며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을 펼친 것이 아르헨티나의 비극"이라고 했다.

1940년대 후안 페론 대통령의 좌파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렸다. 지방을 발전시킨다며 tv조립 공장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000㎞쯤 떨어진 남극 근처에 세우기도 했다. 반면 좌파 정권을 무너뜨린 군사정권은 부패·무능·폭력으로 국민을 진저리치게 했다.

경제가 경쟁력을 상실한 가운데 1990년대가 시작됐다.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경제 개혁을 명분 삼아 대책도 없이 공기업 민영화를 강행했다. 대량해고 사태가 났다. 적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열차 노선도 여럿 폐지했다. 열차가 지나가는 길에 있던 중소 도시들이 주저앉았다.

동시에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달러화와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1대1로 묶어 놓은 '페그제 환율'이 2001년 무너졌다. 은행이 망해 현금 인출이 중단되자 절망한 시민들이 프라이팬과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수만 명이 정부청사 앞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26명이 숨졌다.


대도시마다 해 질 무렵이 되면 구걸하는 아이들,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뒤지는 어른들, 파지(破紙)를 줍는 노인들이 넘쳐났다.

정부는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연이어 총사퇴를 선언했다. 보름 동안 다섯 번 대통령이 갈렸다. 정치적 혼란이 내뿜은 먼지구름이 가라앉자 장기불황이 왔다. 당시 la타임스지(紙)는 "아르헨티나엔 더이상 '좋은 삶'(good life)이 없다"고 썼다. 중산층이 무너져 국민 절반(53%)이 빈곤층에 떨어졌다고 전하는 기사였다.

건축학·공학·심리학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택시를 몰고 거리에 좌판을 폈다.

취업난은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마르셀 리바(riva·31)씨. 아르헨티나 최고 명문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심리학과를 나와 의류도매시장 옷가게 점원으로 일한다. 2001년 위기 직후 대학을 졸업해 공립병원 심리상담원으로 잠시 일했다. 보수가 건당 50페소(1500원)에 불과해 생활이 안 됐다. 얼마 못 가 그만두고 고졸 친동생이 일하던 옷가게에 들어갔다. 리바씨는 "주변 동창 대부분이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아르헨티나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민자가 몰려드는 꿈의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아르헨티나 드림'은 과거 얘기가 됐고, 교육과 일자리의 신분상승 사다리는 무너졌다. 2001년 이후 아르헨티나는 만성 불황과 빈부격차 확대를 동시에 겪고 있다. 공립학교에 대한 정부 재정지원이 줄어 공교육의 질이 떨어졌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려면 사립학교에 가야 하는 세상이 됐다.

좋은 일자리가 급감해 건강보험·연금·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근로자가 크게 늘었다. 이들을 가리켜 '네그로(black)'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채 캄캄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국민과 국가는 속고 속이는 관계가 됐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4~5년 전부터 대부분 거래를 달러화로 한다. 페소화를 달러로 바꿔 장롱에 넣어놓거나 다른 나라에 예치하는 경우가 많다.

100년 전, 아르헨티나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탈리아보다 50%, 일본보다 180% 높았다. 그런데도 '상승의 사다리'를 망가뜨리고 많은 국민이 빈곤으로 전락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아르헨티나의 실패는 "20세기 현대사 최대의 미스터리"(미국 시사전문지 '뉴리퍼블릭')로 꼽힌다.

지금은 듣기 힘들어졌지만 '아르헨티나 드림'이란 말은 나(엘리아스 부국장)에게 큰 울림을 준다. 나 자신도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어렵게 컸기 때문이다. 한평생 중고차 판매원으로 일해 온 가족을 부양한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인이 됐을 때 "이제 나도 아르헨티나 드림을 이뤘다"고 목이 메셨다. 우리 부자(父子) 같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르헨티나의 진짜 비극이다.
아르헨 최대 일간지 '라나시온'과 공동기획
'사다리가 사라진다' 아르헨티나 르포는 130년 역사의 아르헨티나 최대 종합일간지 '라나시온(la nacion)'과 공동으로 작성했습니다. 라나시온의 베테랑 기자와 조선일보 남미 특파원이 처음부터 함께 기획·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20세기 최대의 미스터리'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사다리 붕괴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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