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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북방으로 ‘나의 原鄕’ 고구려를 찾아서 - 윤명철 교수
 
역사탐험 기사입력 :  2008/05/30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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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原鄕’ 고구려를 찾아서 - 윤명철 교수 | 가자! 북방으로
전체공개 2004.07.22 01:14

[이달의 역사기행]‘나의 原鄕’ 고구려를 찾아서

永生과 無限의 자유 꿈꾼 고구려人의 숨결이…

윤명철 동국대 사학과 교수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에 있는 오녀산성.

 
나는 때때로 떠난다. 망명자의 심정으로, 민망해서 도저히 역사에 고개를 쳐들 수 없는 죄인의 멍에를 지고 배반의 땅을 떠나고 싶어서다. 아니 귀향한다. 한반도, 그나마 동강난 조그마한 땅덩이를 버리고 대륙으로 회귀한다.

내 원형이 형성된 곳, 내 혼이 하늘과 땅에 살을 섞어가며 인연을 지은 곳으로…. 어미의 어미가 자식들의 질긴 탯줄을 이빨로 물어뜯어 양지바른 산기슭에 묻은 곳. 언젠가 회향할 자식들에게 보여주려고, 그 살덩이와 숨결의 흔적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겨둔 터. 그 고구려를 찾아 미련 없이 시간여행, 공간여행을 떠난다.

1,000여 년 간 누구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만주에서 나라를 새로 세울 꿈을 펼치는 독립군들 외에는…. 그러니 고구려가 정말 어떤 나라인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까지 알 길이 전혀 없었다.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이 한 이야기를 듣고 받아쓴 역사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믿을 수 없는 필자는 그들이 살아 숨쉬었던 하늘과 흙, 산의 빛깔과 크기를 보고, 냄새를 맡고, 또 그들의 혼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고구려행 귀향선에 몸을 싣고는 했다.

행여나 하는 절박함과 깨달음을 위해 생명을 내거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잃어버린 땅, 잊힌 역사의 장에 초대받지 못한 내 몸뚱이를 내던지는 것이다. 역사가 아닌, 역사라는 이름을 빌려쓴 학문이라는 가면을 덕지덕지 쓴 이곳을 떠나 그곳의 흙바닥에서, 공기방울에서 고구려의 마음을 찾아본다.

고구려는 언제 국가로 성립되었을까. 그 종족은 누구였을까. 현재 우리 민족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을까. 고구려 이전에는 그 땅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 그리고 ‘위서’ ‘북사’ 등의 중국 사서들에는 건국신화 혹은 건국과 관련된 기록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다.

오녀산성인가, 흘승골성인가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신라보다 20년 늦은 기원전 37년에 건국했다고 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 차곡차곡 예서체로 1,775자를 음각해 놓았다.

첫머리에 ‘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지’(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地)와 ‘출자북부여천제지자모하백여랑’(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이라는 글이 있다. 자신들이 북부여에서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주몽은 지린(吉林)성 북쪽에서 말을 타고 남으로 이동하여 비류수(현재 혼강) 가에 고구려를 세웠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비류곡 홀본 서쪽 성의 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어비류곡홀본서성산상이건도(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라고 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환인 시내를 굽어보는 오녀산 위의 산성을 주몽이 세운 흘승골성이라고 주장한다.

오녀산은 해발 800m에 달하는 암산인데, 특히 윗부분의 직벽 150여m는 바윗덩어리 그 자체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인데다 위가 반듯하게 잘려 있어 신의 손길과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산이나 산성이라기보다 신들이 거주하는 성소(聖所)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중국 고고학자들이 왕궁지로 보이는 터를 찾아냈고, 서문지를 복원했다. 초소 터에서는 화살촉과 창 등이 발견됐다. 천지라고 불리는 연못은 길이 14m, 너비 6m, 깊이 2m 규모로, 성 안 사람들의 식수원 겸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매번 환런(桓仁)에 갈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정말 이곳이 고주몽이 세운 흘승골성일까. 저 유장한 흐름의 혼강이 과연 주몽이 말채찍으로 내리치며 하늘에 고했던 그 강물일까. 부여의 광활한 영토, 고조선의 질 높은 역사, 기마민들의 이동 거리를 고려한다며 왠지 초라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환런을 떠나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가 있는 지안(集安)으로 향했다. 1995년도에는 말을 타고 넘었던 산길을 이제는 맥없게 버스를 타고 넘었다. 유리왕은 기원후(ad) 3년 이곳 지안에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을 세웠다.

지안은 압록강물이 살결을 부딪치며 흘러가고 그 너머로 북한 쪽의 웅장한 산들이 방패처럼 서 있는 곳이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접근이 곤란하고 대피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지이며,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국내성의 북문이나 서문을 나와 뒤편으로 통구하를 따라 2,5km를 가니 해발 676m의 환도산이 눈을 채운다. 고대사회에서 수도의 함락과 왕의 항복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수도 근처에는 여러 개의 위성과 대피 겸 방어 중심의 역할을 하는 군사수비성이 필요하다. 환도성은 군사수비성이면서 때로는 임시수도의 구실을 겸했던 최대의 성 가운데 하나다.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으로 전체 길이가 거의 7km(6,951m)이고 성문은 모두 5개인데 동과 북에 각각 2개씩, 그리고 남쪽에는 정문 겸 1개, 서벽에는 워낙 험해서인지 문이 없다. 정문 격인 남문은 골짜기가 빠져나가는 출구라 옹성구조로 만들었으나 무너진 돌산만 남아있을 뿐이다.

돌아 들어가니 음마지(飮馬池·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가 나타나고 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 점장대(點將臺·군사들을 지휘하는 망루)가 있다. 통구하와 지안 시의 한 모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궁전 터는 남북 92m, 동서 62m라고 하는데, 지금은 밭이 되어 고구려의 석양빛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환도(丸都)라는 말은 한자로는 알맹이 도시, 즉 중핵도시라는 의미지만, ‘한’은 ‘크다’ ‘최고’ ‘하나’ 등 순수한 우리말 ‘한’의 전음이다. 따라서 환도는 한도가 되고, 수도를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어한다. 압록강 너머로 북한의 산자락들이 흘러가는 한가운데, 바로 용산 아래 네모나게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아 피라미드처럼 계단식으로 만든 7층의 방형 계단석실묘가 있다. 바로 장군총이다. 군더더기 없이 욕망을 깎아낸 듯 단아한 모습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고구려인의 손길을 느낀다.

한 변이 35.6m의 정방형이고, 높이는 12.4m.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비율이 일정해서 끝없는 상승구조다. 큰 것은 길이 5.7m, 폭 1.12m, 두께 1.1m인 돌 1,100여 개를 모아 만들었다. 몸체에는 호석(護石)이라는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큰 돌덩어리가 한 면에 3개씩 모두 12개가 있었는데, 북면에 있던 1개가 사라져 현재는 11개뿐이다.

무게가 가장 가벼운것이 무려 15t이나 된다. 이 기묘하고 웅장한 돌은 아무래도 고구려인들이 의미를 두었던 3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시신을 안치한 현실은 4층과 5층 사이에 있으며 정문은 정남을 향해 있다.

안쪽은 한 변이 5m, 높이 5,5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화강암을 잘 다듬은 관대가 관도 없이 두 개 덩그러니 놓여있다. 시신은 없더라도 관 조각, 하다못해 가루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야말로 텅빈 공간이다. 잃어버린 역사, 망해버린 역사의 상징이다.

“장군총은 시조묘, 천제 지낸 장소”

[위] 오녀산성 정상 부근의 성벽. 촘촘하게 돌을 쌓은 기술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아래] 지안으로 말을 타고 가는 필자(앞사람).
천장에는 개정석이 있다. 면적 60여㎡, 무게 50여t이나 되는 돌 한 장으로 돼있는 것은 하늘이기 때문이리라. 예전에는 7층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 위가 벗겨져 개정석이 드러나 있고, 네모진 둘레의 돌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20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난간이 설치된 흔적이니, 건축물이 있었다는 증거다. 이 무덤 위와 묘역에서 회색 와당과 평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었고, 1964년에는 건축의 구조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장수왕, 광개토대왕, 고국원왕…, 도대체 누구의 무덤일까.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추모는 하늘의 자손이라고 분명히 음각되어 있다. 유화부인과 동명인 주몽을 숭배했다면 그들이 묻힌 무덤도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좀더 가까운 무덤의 꼭대기에 신전이나 사당을 세우고 때마다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이 무덤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었다면 고구려를 세운 천제의 아들을 모셔놓은 것이 옳다.

수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심축이고, 신성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시조묘는 정치체제의 정통성을 상징하므로 수도를 옮기면 당연히 이장해야 한다. 고주몽의 무덤이 평양성의 교외인 평안남도 중화부에 있듯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이곳에도 시조묘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용산 아래에 있으며 태왕릉보다 작지만 가장 중심부에 있고, 더 큰 현실을 가진 장군총이야말로 시조묘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지안현지’에는 장군총을 동명왕묘로 기록하고 있었다(재성북십오리산세장엄가관전유동명성왕묘속칭장군분·在城北十五里山勢莊嚴可觀前有東明聖王墓俗稱將軍墳). 고구려인들은 소위 장군총 위에 사당을 지어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며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능역 한구석에는 일종의 딸린 작은 무덤인 배총(陪塚)이 4~5개나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을 뿐이다.

멀리서 바라본다. 1,500년이나 지난 돌덩이의 집합체들이건만 무너지지도 않고 지금껏 꼿꼿하고 단아하게 그리고 장중하게 서 있다. 아래로는 땅을 딛고, 위로는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하지만 땅이 힘들어하지 않고, 하늘에 짓눌리는 것 같지 않다.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그들이 이미 공학과 과학을 뛰어넘어 끌어안을 수 있는 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주를 인간이 사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었던 탓이다.

먼 훗날의 자식인 나는 남의 것이 된 땅의 이곳저곳에 흩어진 역사의 나락들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줍고 어르면서 그들의 눈길이 머물렀을 산 능선, 초원의 푸른 빛들, 고구려 땅을 밟고,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흔적에 알몸과 알혼을 묻히면서 점점 고구려가 돼갔다.

장군총을 멀리 등 뒤로 두면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나지막한 구릉 위에 커다란 돌덩이가 의연히 박혀 있다. 광개토대왕비다. 6m가 훨씬 넘는 돌덩어리가 우주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고구려 사람들이 혼을 불어넣어 역사의 씨줄, 날줄을 꼼꼼히 엮어 1,775자를 장쾌하게 새겨놓은 돌비석이다. 장수왕이 아버지가 붕어하고 2년째 되던 해에 세운 비다.

그것은 하나의 큰 돌덩어리, 단순한 영웅의 묘비명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역사가 쓰인 사서가 아니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살아있는 생명의 덩어리, 역사의 혼불이었다. 신들린 듯, 혼을 빼앗긴 듯 나는 입을 벌린 채 멍청하게 서 있다 걸음을 옮겼다. 그 생명체는 나를 끌어안으려고 너른 가슴을 벌리고 있었다.

돌덩이 앞에서 멈춰 서서 고개를 바짝 쳐들었더니 하늘이 보인다. 검은 몸뚱이가 하늘 끝까지 솟구친 것 같다. 하늘에 뿌리를 박고 내려온 듯하다. 매체는 늘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형태는 그 자체가 곧 기호요, 언어다. 자연은 말을 하지 않는다. 소리조차 아주 가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낸다. 그럼에도 늘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구려의 상징’ 광개토대왕비

대왕비는 고구려 자체를 반영하는 상징물이다. 고구려가 큰 나라임을 몸으로 알려준다. 보이는 그대로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글자에 닿은 가는 손끝 마디에 불이 확 인다. 뜨거운 기운이 훅하고 끼치더니 몸으로 기운이 몰아친다. 힘이 생긴다. 별안간 사내가 되고, 기운찬 고구려 사람이 되는 것을 느낀다.

기(氣)는 생명이다. 기는 혼이다. 기는 얼이다. 기가 없거나 비틀리면 혼도 얼도 뒤틀려 인간은 타락한다. 기가 차야 인간은 역사와 하나가 된다. 고구려인의 기인지, 하늘에서 내린 기인지, 아니면 자랑스러운 역사가 채워놓은 기인지. 몸뚱이와 마음에 기가 묻어난다. 기로 한바퀴 몸을 돌린 다음에 고요히 내리쉬었다. 아래에 힘이 차오른다. 고구려의 기운이 생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다른 돌비들과 뭔가 다름이 있다. 아랫변이 약 1.3m이고 높이는 6.4m인데, 올라가면서 오히려 폭이 두꺼워지고, 배가 부르고 더 넓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윗부분이 넓으니 힘이 더 생기고, 그 힘을 바탕으로 더 위로 솟구칠 것 같은 형국이다. 고구려인들은 그 비의 제일 앞에서 ‘천제지자(天帝之子) 하백지외손(河伯之外孫)’이라고 선언하였듯 하늘의 자손이다.

그래서 곳곳에 하늘로 올라가는 길, 통로를 만들고, 염원을 풀게 하였다. 그러니 이 비는 하늘로 올라가는 그들의 염원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나 할까. 고구려인들의 역동성, 하늘을 향한 의지를 이만큼 잘 표현한 상징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왜 고구려인들은, 장수대왕은 그 부왕인 동아시아의 영웅을 기리는 비석을 이런 불완전한 모습으로 놓아두었을까. 이 어수룩함과 무정제성 속에서 고구려인들의 사유를 느낀다.

고구려인들은 화려한 미보다 후덕한 미, 무위자연의 도를 지향한 것 아닐까. 고구려는 터를 넓히고 정복전쟁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다른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국민으로 삼았다. 그들 모두를 끌어안고, 새로운 이질적 문화들을 고구려라는 용광로에 넣고 녹여야 했다.

피정복민의 슬픔, 인연을 놓친 회한, 분노에 떠는 광란을 끌어안아야 했다. 그들과 고구려가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가 되고, 한 식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래야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었다. 이 비를 세운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정복전쟁을 늘 승리로 이끈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비에 정복자의 권위와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두에게 바른 가치관과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을 알리고자 이러한 자연스럽고 검박한 의미를 가득 담은 것이다.

이 비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 고구려 백성들, 초원의 백성들, 삼림 속을 헤매는 복속된 백성들 모두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또 앞으로 태어날, 먼 훗날 후손들에게도 전할 이 시대의 혼과 얼을 담은 메시지다. 고구려의 뿌리를 밝힌 돌 이상의 신성한 돌이었다.

바람이 분다. 압록강 물 위로 역사의 살 비듬이 날린다. 군데군데 동산처럼 솟은 무덤들이 고구려의 혼으로 날아와 내 마음결에 이슬처럼 맺힌다. 지안 주변에는 1만2,00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이 있다. 이 가운데 20여 기에 벽화가 있다.

북한지역에도 60여 기가 있으니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의 벽화고분은 80여 기다. 지금은 내부를 볼 수 없지만 나는 몇 개의 고분벽화를, 그것도 자주 보았다. 그 탓인지 사랑했던 여인처럼 늘 그리움에 허덕거린다.

자유 이상향이 담긴 고분벽화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방탄유리에 둘러 싸이긴 전의 모습.
고분은 또 하나의 고구려다. 그들은 무덤에 이상세계를 꾸몄고, 그곳에 마음에 담아두었으며, 추구했던 세계,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식, 세상을 살아가는 세계관 등을 표현하였다. 그들이 땀 흘려 이룩했던 위대한 흔적들은 패망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 마음은 무덤 안에 누운 채 때(?)를 기다리다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찌 보면 자신들의 메시지를 먼 훗날의 후손들에게 알리려고 멋진 교과서를 만들기 위하여 더 열심히 아름답게 벽화를 그렸는지 모른다.

신과 사람들의 옷깃은 바람에 하늘거리면서 날리고 있다. 구름도 깃을 펼친 채 활달하게 움직이고, 심지어 물고기마저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헤엄치고 있다. 신들도 점잖은 걸음걸이로 위엄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한껏 벌린 채 뛰고 있다. 산길을 평지 달리듯 한다는 중국인의 기록이 그림에서 살아난다.

말을 타고 산을 넘기도 하고, 달리면서 사슴과 호랑이에게 활을 쏘아대는데, 몸을 뒤로 젖힌 채 앞에서 화살을 날리기도 한다. 삼실총의 여러 벽면에 그려진 역사의 우람한 체격과 근육들, 살아있는 표정들은 현실적이고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행렬도의 질서정연한 움직임, 무용총의 춤사위와 노랫가락들이 움직이고 있다.

이처럼 벽화의 세계는 어느 것 하나 정지해 있는 것이 없다. 모두 살아 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도 아주 신명나게 움직이고 있다. 역사는 움직이지 않으면 생명을 잃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고구려의 운동은 직선이 아니라 원·곡선·유선형으로 표현되었다.

심지어 역사(力士)마저 곡선을 주조로 처리하였다. 정제되고 무언가 목적을 지향하는 질적으로 성숙한 역동성이기 때문이다. 정중동(靜中動)이 아닌 동중정(動中靜)의 아름다움은 관념에 지친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것은 자유였다.

자유는 아름다움이었다. 늘 하늘을 날고 싶다. 내가 산을 오르고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초원에서 말을 타는 것은 모두 날고자 하는 또 다른 몸짓이다. 방 안에서, 숲에서 다리를 틀고 앉아 숨을 깊게 들이쉬는 것은 영원히 날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고구려인들 또한 진정 날기를 원했던 것 같다. 자신들을 천손(天孫)이라고 했으니 존재의 근원을 얼마나 그리워 했겠는가. 그래서인지 벽화에서는 모든 것이 날아 다니고 있었다. 무용총에는 새 잔등에 올라타고, 새들이 끄는 대로 아득한 하늘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사람이 있다.

또 그 인물 옆에는 해모수나 주몽을 상징하는 듯 천왕랑(天王郞)이라는 묵서가 있는 벽화도 있다. 특이한 모습의 동물들도 날개를 달았고, 사람과 동물의 얼굴을 한 신들도 날개 깃을 달고 있다. 그러니 모두 날고 있는 존재들이다.

자유로움이란 무한의 경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나들며 걸림 없는 무애의 경지에서 나온다. 모든 것을 하나로 인식하고, 너와 내가 따로 구분이 없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그래서 벽화 속에는 사람의 얼굴을 가진 새(人面鳥), 머리에 뿔이 달린 동물(一角獸), 몸뚱이는 뱀이지만 사람의 얼굴을 한 채 날아가는 해신과 달신, 사람의 몸을 한 소머리신 등 반수반인(半獸半人· 神人)의 존재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동물이나 신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어 인간(人間)과 신(神)의 구분이 때로는 모호하기까지 하다.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짐승과 인간 등의 대립적 관계를 조화시키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물아일체’(物我一體)처럼 대상체와 합일(合一)하려는 자유정신을 지녔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내 꿈을 고구려인들도 똑같이 꾸었고, 그들은 그림으로 형상화시켰고, 그곳에서 영생하려고 했고, 나는 그것을 보면서 영생을 꿈꾼다.

어둠이 깔린다. 고구려의 옛 땅에, 우리의 원향에 검은빛이 물든다. 나 이제 돌아간다. 아름다운 나라, 감동을 주고, 자유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나라. 고구려는 영토도, 마음도, 역사도 큰 나라였다. 이 원향을 두고, 두고 온 고향으로 떠난다.

원향의 혼과 살을 간직한 고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 위로 찐득찐득한 아스팔트 위를 헤매다 달빛에 물든 초원의 풀냄새에 미친 검은 이리의 울부짖음이 달려온다. 역사란 그런 것이 아닌가. 메마른 종이 속에서 흔적을 더듬고 소리를 듣는….
 
-- 출처 : 역사탐험 2004년 07월호--
마나스(supermind)
 
 
 
 
마나스 윤명철 교수님 글을 볼때마다 느끼는것은 이 분은 천상 낭만파요 로맨티스트다. 그런분에게 역사학자란 직함이 웬지 안어울릴것 같으면서도 어울린다. 국내에 판치는 메마르고 건조한 실증사학의 위세에 숨조차 쉬지 못하는 우리 역사를 되살릴 꼭 필요한 분이 아닐까. 주채혁 교수님, 양민종 교수님등 글로 만나는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학자분들이 계속 많아 지고 있다는데서 우리 역사의 희망을 본다.....
마나스 윤명철 교수님의 <말타고 고구려 가다> 와 뗏목탐험기<장보고의나라> 추천입니다. 휴가때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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