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 논설위원
이열치열(以熱治熱).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여름의 열기를 이겨볼 요량으로 요즘 뜨거운 소설을 읽고 있다. 일본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료마(龍馬)가 간다’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그 속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료마가 천하대세를 설명한 후 구체제 전복의 필요성을 내비치자 청년 무사 마쓰키 젠주로가 마침내 마음을 굳힌다.
“하겠습니다.”
작가 시바는 마쓰키의 각오 표명에 이어 곧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 당시의 무사는 오늘날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무사인 것이다. 무사가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목숨을 버리겠다는 뜻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무사들의 에너지가 메이지 유신이라는 엄청난 사극(史劇)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나라의 혁명과는 다르다.”
1800년대 중반, 일본이라는 이름의 통일국가를 연 메이지 유신은 이렇게 일본의 젊은 하급무사들이 착착 준비해 나갔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반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는 통일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풍우에는 과연 어떤 한국인들이 정면으로 맞서려 하고 있는가. 아니 적어도 일본의 그들처럼 ‘하겠다’는 각오는 돼 있는 것일까.
국제사회는 엄혹하다. 자기 미래를 스스로 개척할 의지와 역량을 결여한 국민에게는 어느 한 구석 돌봐줄 나라가 없다. 따라서 김정일이 죽으면 통일되리라는 꿈은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죽으면 식민지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헛소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천안함 폭침 사태 당시 이 나라의 수많은 젊은 사병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정부가 전쟁을 획책한다는 일부 불순한 정치세력의 선전·선동에 놀아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병들은 저마다 자기 집에 전화를 걸어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런 판이니 야당은 야당대로 1번 찍으면 전쟁, 2번 찍으면 평화라는 구호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 대박을 터뜨린다.
육·해·공군 합동 서해훈련이 끝나자마자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너머로 수백발의 해안포를 발사했을 때도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이번엔 정부와 국방부가 주인공이었다. 물 한방울이라도 건드리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던 군지휘부는 숙녀용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포탄이 nll 남쪽에 떨어졌다는 초병들의 입을 틀어막기에 열중했다.
물론 대한민국 군대가 해안포의 탄착 지점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현 정부도 이미 국민의 본심을 파악한 것이다. 옆집 조폭이 저러는 것은 돈 때문이다. 그러니 적당히 쌀과 돈을 쥐어주며 편안하게 지내자는 것이 대다수의 본심임을 눈치챈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면서까지 혼자서 강경책을 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국민이면 누구나 김정일의 인간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여론조사만 하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찬성 비율이 높게 나오는 감춰진 배경이기도 하다.
‘하겠습니다’라는 의지는 이미 한국 국민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통일은 반드시 온다”며 이제 통일세(稅) 등 현실적 방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통일이 온다는 것과 누구를 위한 통일인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누구를 위한 통일인가는 오로지 준비하는 자의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 대한민국은 준비하고 있는가. 통일을 위해서라면 과연 ‘하겠다’는 각오가 돼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닌 마당에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통일 비용을 마련해 나가자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통일의 과업은 입찰과정에서 사업권을 따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상인의 발상쯤으로 통일이라는 정치적 행위가 완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통일세 운운하면서 생뚱맞게 재정학자들의 머리를 쥐어짠다고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겠습니다’라는 의지가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