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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최고 기생 김향화는 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나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0/08/2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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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일본 놈들은 우리 임금님 계시던 곳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데요.” 기생 한두 명만 모여도 울분을 토했다.

 

1919년 3월 29일 수원 최고 기생 김향화는 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나 [중앙일보]


2010.08.24 00:43 입력 / 2010.08.24 01:42 수정

[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나라를 빼앗기고 고종 황제를 잃었다
일제는 조선기생의 얼마저 꺾어버렸다
그러니 어찌 독립을 부르짖지 않으랴


등장 인물 김향화(金香花) 고향은 경성(서울·당시 23세). 1896년 생. 본명은 순이(順伊)다. 15세에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기생이 됐다. 수원 최고의 기생으로 활동하던 1919년 1월 고종 임금이 승하하자 대한문 앞으로 가서 통곡했다. 같은 해 3월 29일 건강검진(성병검사)을 받으러 동료 기생 32명과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만세운동’을 벌였다. 주모자로 붙잡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녀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2009년 4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프롤로그

“수원기생 김향화는 태극기를 들고 여러 기생을 데리고 경찰서 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일제)경찰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졌다. 북촌검사의 심리를 받고 지난달 이십칠일 공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팔 개월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김향화에게 징역 6개월 형을 언도하였는데 방청석에 사람이 가득하였더라.”

김향화가 이끄는 수원 기생 30여 명이 1919년 3월 29일 수원 종로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중앙포토]
3·1 독립운동이 있었던 1919년 6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렸던 기사 내용이다. 기생 향화는 그렇게 영어의 몸이 됐다.

# 에필로그

김향화와 동료 기생들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6개월 후 출소를 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이후의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많은 독립투사들이 고문 후유증 등으로 출소 후 사망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김향화 선생도 출소한 뒤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거나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향화의 일생을 연구한 수원박물관 이동근(40) 전문위원의 말이다.

훗날 고은 시인은 ‘기생독립단’이라는 시를 통해 김향화와 동료 기생들을 이렇게 칭송했다.

‘기미년 3월 29일, 자혜병원으로 정기검진 받으러 가던 중,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을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렸다

1911년 봄. 경성(서울) 변두리에 농가가 있었다.

“순이(順伊)야. 가자” 툇마루 한편에 앉아 한숨을 내쉬던 아버지가 일어나 날 불렀다.

“어머니 저 갈게요. 건강하세요.” 굳게 닫힌 안방 문 사이로 어머니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이 아렸다.

“죽으러 가나. 울긴 왜 울어.” 역정을 낸 아버지는 싸리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난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툇마루에 있는 옷 보퉁이를 집어 들고 난 집을 나섰다.

제대로 먹지 못해 바짝 마른 몸을 휘청이며 걸으면서도 아버지의 걸음은 빨랐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본인에게 돈을 빌렸고 결국 날 팔아 돈을 갚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 도착한 곳은 기생조합(학교)이었다.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다.

“잘 지내라.” 아버지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래도 난 봤다. 돌아선 아버지의 눈에 어린 피눈물을. 그때 내 나이 15살. 꽃다운 처녀였다. 이름은 김순이. 난 그렇게 기생이 됐다.

기생은 궁녀다

일제가 조선 기생들을 관리하기 위해 1918년 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실린 수원 기생 김향화사진. 수원박물관 이동근(40) 전문위원이 2008년 11월 발굴했다. [수원박물관 제공]
기생조합에 들어서자마자 행수(行首) 어른이 날 불렀다.

“기생 이름이 순이라고 하면 누가 찾겠니. 향기 향(香)에 꽃 화(花). 향화라고 부르자.” 그날로 내 이름은 향화가 됐다.

수업은 고됐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춤과 노래를 배웠다. 글을 배워 시도 지었다. 화선지에 붓으로 난을 치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수업의 하나였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노래였다. 창을 시작하면 주변 동무들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향화 너는 어쩜 그리 애달프고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니.” 다들 감탄했다.

행수는 항상 말했다. “기생은 궁녀다.” 임금을 모시고 조선을 지키는 궁녀라는 거였다. 행수는 덧붙였다. “공직(궁녀)에 있는 사람답게 당당하게 행동해라.”

행수의 말은 이어졌다. “예부터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렀단다. 바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거지. 우리는 몸을 파는 창기가 아니다. 예술인이다.”

1907년 직제상 관기제가 폐지되긴 했지만 기생은 여전히 공인 예술가였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기생들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1908년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일본은 전통적인 기생의 존재를 부정하며 공창제를 강화했다. 천한 기생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대한문 앞에서 곡을 했다

스무 살이 넘어 난 수원군내 최고의 기생이 됐다. 요릿집마다 나를 모셔가기 위해 안달이 났다. 남정네들이 날 그렇게 찾았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양금 연주도 최고요. 향화는 수원이 아닌 조선 최고 기생이다.” 다들 나를 치켜세웠다.

유학생과 수원지역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그들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수원이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축성한 계획도시라고 했다.

1795년에는 행궁 내 봉수당에서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치렀다. 봉수당 진찬연을 빛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생들의 가무였다나.

일제 강점기의 화성행궁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 왕의 상징이었던 화성행궁을 무너뜨렸다.

정조의 위폐와 어진이 모셔져 있던 화령전과 왕이 머물던 봉수당에는 자혜병원이 세워졌다. 군사들이 머물던 군영에는 수원 경찰서가 들어섰다.

“어쩜 일본 놈들은 우리 임금님 계시던 곳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데요.” 기생 한두 명만 모여도 울분을 토했다.

가장 싫었던 것은 한 달에 두 번씩 받아야 했던 건강검진, 즉 성병 검사였다. 그곳이 바로 나랏님이 머물렀던 봉수당자리였다.

“병원을 왜 봉수당에 지었는지. 우리 조선 왕실과 기생들을 욕보이는 일 아니요.” 검사를 받고 올 때마다 난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다.

1919년 1월 21일. 내 나이 23살이었다. 매일신보에 고종임금께서 승하하셨다는 부고가 떴다. 청천 날벼락이었다.

당장 대문에 ‘오늘부터 휴업합니다’는 간판을 내걸었다. 화려한 비단옷이 아닌 깃당목의 소복을 걸치고 나무비녀를 꽂았다.

“우리 임금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연히 궁녀의 후손인 우리가 임금님 가시는 길에 함께해야지.”

20여 명의 동기들과 수원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리고 대한문 앞에 도착해 통곡을 했다. 눈물바다는 청계천으로 흘렀으리라.

그날 일을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이렇게 기록했다.

“수원군 인사들은 물론이요 화류계에서도 일절 가무를 정지하고 엄숙히 근신 중이던 바 동군 이십여 명의 기생들은 십칠일 성복에 참례키 위해 깃당목의 소복과 나무비녀를 꽂고 대한문 전에서 망곡을 하였더라.”

독립을 외치다

1919년 3월 19일, 진주의 기생 6명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한이 없다’고 외치다 일본군에 잡혀갔다는 기사가 한 신문에 실렸다.

그날 저녁,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기생 선배인 서도홍을 찾았다. “언니, 우리가 기생이긴 하지만 대한제국, 조선의 백성이 아니요. 우리도 만세를 부릅시다.”

나의 호소에 서도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수원군에서 활동하던 기생들을 불러모았다. 모두 33명.

성병검사를 받으러 자혜병원으로 가는 치욕적인 그날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몰래 태극기도 만들었다.

거사 날짜는 3월 29일, 날이 밝았다. 몸을 정결하게 단장했다. 준비한 태극기는 치마폭에 감췄다.

오전 11시 자혜병원으로 향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32명의 동기들과 눈을 맞췄다. ‘준비됐니?’ ‘네. 준비 됐어요’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대한독립만세” 목이 터져라 외쳤다. 경찰서 앞이었다.

동기들도 태극기를 꺼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만세 소리에 놀란 일본 경찰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몽둥이를 휘둘렀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우리를 개처럼 끌었다.

“대한독립만세.” 우리를 연행하려는 경찰들을 막아서면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만세행렬은 갈수록 불었다. 일부 격앙된 시민들은 일본인의 상점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손하기도 했다.

경찰은 수원소방조합을 동원했다. 일본인 소방수들은 시위대에 물을 뿌렸다. 그리고 골목까지 쫓아가 시위대를 잡아들였다. 그날 밤 난 경찰에 머리채를 끌리며 피를 쏟았다.

“장하다” 누군가 외쳤다

고문은 잔인하고 집요했다. “기생 년들이 이런 짓을 꾸밀 리가 없다. 머리가 누구냐.” 일본 경찰은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까무러쳤다가 깨어나기를 수십 번.

“내가 하자고 했소. 내가 머리요.” “독한 년.” 순사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2개월 동안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졌다.

검찰은 보안법 위반이라며 징역 8개월을 구형했다.

1919년 6월 20일 나의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당시 수원군 유지들과 동료 기생들로 재판정이 가득 찼다.

“언니, 얼굴이 왜 이렇게 못쓰게 됐소.” 일부 동기들이 방청석에서 통곡을 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 이후 수원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계속 이어졌다고 했다.

“장하다.” 누군가 외쳤다. 그래. 나는 장한 일을 했다. 양반들도, 지식인들도 못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김향화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한다.”

수원=최모란 기자



내러티브 저널리즘 (narrative journalism) 기존의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 문장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하는 기사 형식. 주요 인물을 추적해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고, 사실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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