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299조 '항거불능' 조항 여성이 강력 저항 안했다고
가해 남성들에게 무죄 선고…선진국선 처벌 강화 추세
지난달 23일 수원지법은 12세 소녀를 돌아가며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양모(21·대학생)씨 등 20대 남성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나이 어린 소녀이고 음주를 한 사정은 인정되나 심리적 또는 물리적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런 행위가 형법 제299조에서 규정한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간음행위로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12세 소녀를 윤간(輪姦)한 혐의로 기소된 20대 남성 3명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즉각 인터넷을 중심으로 비난 여론이 쇄도했다. "우리나라는 성폭행당할 때 저항하지 않으면 즐겼다고 생각한다. 슬픈 현실" 같은 분노 섞인 글이 올라왔다.
형법 제299조(준강간, 준강제추행)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를 같은 법 제297조, 제298조의 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죄와 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항거불능'의 기준이 모호해 판사에 따라 그 판결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20대 남성 3명은 지난 2009년 12월 28일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피해자 김모(12)양 등과 경기 군포시의 한 여관에서 술 먹이기 게임을 하며 플라스틱 컵에 소주와 맥주를 반씩 섞은 '폭탄주'를 마시게 한 후 성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김양은 검찰 조사에서 "술을 마시고 나니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김양이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성관계가 끝나자마자 스스로 옷을 입고 걸어서 여관을 나왔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김양이 술에 취한 것은 인정되지만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항거불능 상태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법원이 항거불능 상태를 유연하게 판단한 경우도 있다. 지난 2005년 대법원은 "피해자가 성교 이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지난 2004년 서울 북부지법 형사11부는 피해자와 합의하여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피의자에 대한 재판에서 "공포심이 클수록 더 강하게 저항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공포심이 커지면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례도 보게 된다"고 했다. 또 "피해자의 저항과 구조요청이 아예 없었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형식적 측면만을 들어서 강간을 당했다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가볍게 배척한다면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의자에게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검찰 관계자는 "일부 판사만이 이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장애인 항거불능 조항 폐지 법안까지 발의돼
성폭행을 당한 장애인들 역시 '항거불능' 상태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형사1부는 지난 2009년 정신지체 2급인 a양(당시 14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모두 세 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최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양이 컵라면을 사달라고 한 점을 근거로 "강제로 끌려가고 있었던 상황임을 납득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모순되는 진술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판단한 것.
지난 2004년엔 부산고법 형사2부가 정신지체 2급인 b양을 4년간 여덟 차례 성폭행해 임신까지 시킨 김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가 지적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초등학생의 지적 능력이라면 성적 자기방어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하며 항거불능 상태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6조(장애인에 대한 간음 등)는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여자를 간음하거나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사람은 형법 제297조(강간) 또는 제298조(강제추행)에서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인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저항하다 목숨을 잃을지언정 피해자는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하고, 그 저항을 입증해야 가해자 처벌이 가능한 것이 현행 법체계"라고 지적했다. 최 의원은 지난 10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명시된 '항거불능' 요건을 삭제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검찰 관계자는 "재판부가 술에 취해 범행을 저지른 피의자는 심신미약으로 감형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성폭행 피해자의 항거불능에 대해선 엄격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며 "피의자보다 피해자가 우선시되는 판결 추세가 자리 잡아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선진국, 항거불능 유연하게 해석하는 추세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성폭행 피해자의 항거불능 요건을 완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 법원은 1970년까지 피해자가 모든 육체적 힘을 다해 가해자와 싸우는 '극도의 저항(utmost resistance)'을 했을 때만 강간으로 인정했다. 이후 강간죄 개혁운동(rape law reform movement)이 일어났고 1974년 미시간주를 시작으로 대다수의 주 형법이 저항요건을 폐지했다. 아이오와주 형법은 '성적 학대 행위가 당사자의 의지에 반하여 범해졌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당사자의 육체적 저항을 입증할 필요는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난 1992년 뉴저지주 대법원은 특별한 폭력 없이 성관계를 가졌다는 피의자의 주장에 대해 "피해자의 반응이나 방어행동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긍정적으로 그리고 자유로이 허락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어떠한 성적 삽입도 성폭행을 구성한다"고 판시했다.
1997년 개정된 독일 형법 제177조 1항은 가해자에 대한 공포, 기타 다른 심리적 이유로 저항할 능력이 없었던 경우, 가해자가 체력적으로 우월해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처음부터 저항을 포기한 경우에도 강간죄가 성립될 수 있도록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