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1875~1965), 아이젠하워 (1890~1969)(왼쪽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미국의 구두약속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의 대한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그에게 구두약속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판단은 근거가 있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래 태프트-가쓰라 조약과 포츠머스 조약, 임시정부 승인 거부, 제2차 세계대전 시 전시회담, 1945년 일반명령1호와 한반도 분할 제안, 신탁통치 제안, 주한미군 철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강대국 우선주의로 인한 한국의 희생은 막대했다. 이승만은 한·일 강제병합과 1945년의 분단은 미국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몰아세웠다. 따라서 한반도 안전을 위해 현찰 없는 어음은 전혀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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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승만은 미국의 국내 정치를 너무 잘 알았다. 미국의 구두약속을 믿고 휴전을 수용하였으나, 휴전 이후 조약 체결에 실패하거나 의회 비준이 거부되면 한국은 낭패였다. 더욱이 그는 휴전협정의 체결 이후에는 자신의 카드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승만이 꿰뚫은 변수가 또 있었다. 당시 워싱턴은 일본을 중시하는 친일파가 넘쳐났다. 한국을 중시하는 친한파는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으로 한국이 희생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한·미동맹에 집중한 이유는 반공 못지않은 반일 때문이었다.
미국의 구두약속 이외엔 어떤 구체조치도 없는 가운데 휴전회담은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사태를 되돌릴 수 없었다. 백선엽을 포함한 군 지도부를 소환하여 충성을 확인한 그는 마침내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는 치밀하게 계산된 돌출행동을 결행했다. 6월 17일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현재의 휴전안은 대한민국엔 ‘사형집행영장’이라고 경고한 다음 날 그는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이제 미국은 공산군과 이승만이라는 두 적과 대면해야 했다. 이승만은 이미 대공, 대미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반공포로를 석방한 그날 아이젠하워는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 국장 등 핵심인사가 모두 참여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직접 이승만을 ‘친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적’이라고 언명하였다.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이 찾아 낸 1953년 6월 18일 미 제150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문서. 그는 또한 직접 쿠데타를 언명했다. 미국 대통령이 반이승만 쿠데타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다시 미국을 전면전에 끌어들이려 할 경우) 나 역시 염려하고 있다. 어떤 국면에서는 아마도 위험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신속한 방법은 쿠데타”라며 “확실히 이러한 행동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물론 우리 스스로가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한국에서 사태를 수행할 만한 자들에게 즉각 확실하게 인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추가했다. 직접 쿠데타를 수행하지는 않되 한국인 주도의 쿠데타에 대해서는 미국이 반이승만-친쿠데타 편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승만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언명과, 한국인에 의한 쿠데타 후원 가능성의 언급, 이것이 당시 한국에서 미국이 직면한 이중 현실이었다. 미군을 따돌리는 일사불란한 반공포로 석방이 보여주듯 한국 군부는 이미 이승만의 확고한 장악하에 있었다. 신익희·조병옥·장면·조봉암 등 정치인들을 검토한 결과도 전혀 신통치 않았다. 신익희는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잠정 대안으로 검토된 바 있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조봉암은 미국에 이승만의 전략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실제로 “모든 점들이 검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명백히 남한에서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언명하고 있다. 미군이 직접 쿠데타를 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한국 군부나 민간의 쿠데타를 후원해야 했으나 점검 결과 가능성이 없었다. 결국 이승만을 제거할 수도, 한국에서 철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휴전협정 조인 이전에 미국은 이승만과의 상호방위조약 협상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힘을 보여준 이승만이 만약 방위조약도 없는 상황에서 작전지휘권에서조차 이탈한다면 휴전협정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미국은 정확히 알았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북한과 남한의 이중 억제장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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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미국과 마주앉은 이승만은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접 국무부 차관보, 국무장관과 끈질기게 회담하면서 조약 문구와 협력 내용을 하나씩 밀고 당겼다. 이승만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연속된 초강수에 한·미동맹의 최종 구축과정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방위조약은 휴전과 거의 동시에 가조인 되었으나(8월 8일) 1년3개월이 지난 1954년 11월 17일에야 비준서 교환을 통해 정식으로 발효됐다. 약속-가조인-조인-의회 비준-비준서 교환을 거쳐 발효에 이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정은 한국인들에겐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대륙국가로서는 미국으로부터 아시아 최초의 방위조약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를 통해 남한은 주변 3대 강국의 한반도에 대한 장구한 지배 욕망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북한 방어를 넘어 ‘소련 저지’-‘중국 봉쇄’-‘일본 견제’의 4중 장치였다. 한국은 세계 최강 미국을 활용해 주변 3강의 대한 영향력을 견제하는 역사적 전환을 이뤘던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남한의 휴전협정 참여가 초래할 북한 정권 인정, 통일 추구 불능, 한반도 안정의 연쇄효과로 인한 한·미 동맹 약화를 우려해 휴전협정 조인에 참여치 않음으로써 이후 한국 문제에서 남한의 역할이 크게 제약당하는 지형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후대의 과제로 남겨졌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