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은 창당 이래 다반사(茶飯事)처럼 사람을 죽이고 약탈해 왔으며, 이제는 그동안 빚은 악업으로 인해 역사에서 도태될 운명에 놓였다. 2004년 본보에서 발표한 시리즈 사설 ‘9평공산당’(중국공산당에 대한 9가지 논평)으로 깨어난 중국인들은 공산당과 그 산하 단체(공산주의청년단, 소년선봉대)를 탈퇴하기 시작해 지난 1월까지 그 숫자가 8,700만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중공을 위해 앞장서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재자를 도와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이 연재물은 중공과 한패가 되거나 진상을 모르고 중공에게 이용당한 이들이 하루빨리 앞선 이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뜻에서 기획됐다.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중국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장 빠르게 접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편집부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대의 중장이자 작전차장(작전참모에 해당)으로 장제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궈루구이(郭汝瑰). 그는 중공의 거물급 간첩이었다. 자료사진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은 1945년 세계 2차대전과 함께 중일전쟁이 끝나자마자 국민당 정부를 뒤엎기 위한 내전(內戰)에 돌입했다. 3년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중공은 마침내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민당은 결코 중공의 군대에 진 것이 아니었다. 중공군이라는 외부의 적 외에도 국민당 내부의 적, 소위 중공이 심어놓은 거물급 간첩들의 교란공작에 무너진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거물이 바로 국민당의 군사정보를 끊임없이 빼돌린 국군(國軍․국민당 군대)의 중장(中將) 궈루구이(郭汝瑰)였다.
마오쩌둥은 종종 “가슴 속에 백만 웅병
(雄兵)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궈루구이 단 한 명이 50만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두 세력이 사생결단을 하는데,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의 작전을 훤히 알고서 싸운다면 승부는 뻔한 것이 아닐까.
1907년 쓰촨(四川)에서 태어난 궈루구이는 황포(黃埔)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 이미 1928년 5월 비밀리에 공산당에 가입했었으나 귀국 후 중공이 항일(抗日)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일본과 싸우기 위해 국민당에 가입했다. 1937년 궈루구이는 42여단 여단장으로 쑹후(淞滬)대전에 참가해 용맹을 떨쳤고, 장제스(蔣介石)의 눈에 들어 국민당 내에서 엘리트 군인 대접을 받았다.
이후 궈루구이는 9전구(九戰區) 군관훈련단 교관대대 대대장을 거쳐 국방연구원 위원으로 승진해 고급장교들을 훈육했고, 당시 중앙훈련단 단장이었던 장제스는 궈루구이를 데려와 훈련단 부대대장에 임명하는 등 각별하게 신임했다.
국민당이 일본과 전쟁에서 승리하자 궈루구이는 중장(中將)으로 파격 승진돼 전군(全軍)의 편제와 장비를 관장하는 군무서 서장 및 국방연구원 부원장을 겸직했다. 즈장(芷江)과 난징(南京)에서 일본군이 투항할 때는 육군총사령관 허잉친(何應欽)과 함께 국민당 군정부 대표의 신분으로 참석할 정도였다.
간첩침투와 이간질에 능했던 중공은 궈루구이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이미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도 있던 궈루구이에게 중공은 자주 사람을 보내 그를 추켜세우며 “국민당은 부패했고 마르크스레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꼬드겼다. 끊임없는 아부와 회유 속에서 궈루구이는 공산당이 말하는 “전 인류 해방, 대동세계(大同世界)”를 다시한번 꿈꾸게 됐다.
결국 궈루구이는 장제스를 배반하고 공산당 초기 멤버인 둥비우(董必武)와 수차례 만나며 중공당원 런롄루(任廉儒)로부터 은밀히 지령을 받는 등 중공의 간첩이 됐다. 그의 돌변에 대해 어떤 이들은 궈루구이가 애초부터 중공당원이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간첩이 된 후에도 여전히 장제스의 신뢰를 받던 궈루구이는 국공내전 중에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국방부 작전청장으로 승진해 주기적으로 장제스의 관저를 드나들며 전투상황을 보고하고 명령을 받았다.
궈루구이는 종종 장제스를 따라 전투지역을 시찰하기도 했는데, 다시 말해 국민당의 모든 작전계획과 편제 및 움직임에 대해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수많은 기밀이 궈루구이의 손을 거쳐 마오쩌둥에게 넘어갔다. 산둥(山東)중점진격계획, 쉬저우(徐州)사령부와 대별산(大別山)의 병력배치, 옌저우(兗州)․솽두이지(雙堆集) 포위해방계획, 장강(長江) 방어계획, 우한(武漢)․산간(陝甘)․시난(西南)의 병력배치 등 국민당의 존망과 관련된 정보들이었다.
궈루구이는 군사기밀을 누설하기만 한 게 아니라 직접 국군에 피해를 입히는 엉터리 작전을 명령하기도 했다. 또 많은 거짓정보를 흘려 장제스가 작전 중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유도했다.
1947년 3월 궈루구이는 중원과 산둥 등지에서 3전구 사령관 구주퉁(顧祝同)과 합동작전을 지휘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공의 주병력이 남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제스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방해함으로써 장제스가 잘못된 지역에 총공격을 퍼붓도록 만들었고, 중공군은 유유히 황하유역을 남침할 수 있었다.
중공에 포위돼 결국 포로가 된 국민당 두위밍(杜聿明) 장군은 궈루구이를 의심하며 “당신은 공산당의 첩자가 분명하다. 당신의 명령은 우리 모두 중공군의 포위권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라고 직접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궈루구이는 의도적으로 국민당 군대 내부에 혼란을 일으키고 병사들을 동요시켰다. 1947년 3월 19일 퇴역장교 400명이 조직개편에 반발한 쿠링(哭陵)사건은 궈루구이가 제정한 방안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궈루구이의 간첩행위로 인해 국군은 가는 곳마다 포위를 당했고, 결국 장제스는 대만으로 쫓겨나야 했다.
장제스는 대만섬에 상륙한 후 “궈루구이가 공산당 최대의 간첩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원통했고, 대만의 한 신문은 “간첩 하나가 숨어들어 천하를 희롱하니 양군(兩軍)의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토록 ‘큰 공’을 세웠던 궈루구이는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한 후 오히려 찬밥 신세가 됐다. 의심 많은 마오쩌둥은 궈루구이를 기용하기는커녕 쓰촨(四川)성 촨난(川南)경찰서 부국장급인 교통청장 자리로 쫓아냈다. 이듬해 “반혁명분자를 엄격히 탄압하라”는 마오쩌둥에 지시에 따른 진반(鎮反)운동이 일어나면서 국민당의 간첩으로 몰린 궈루구이는 그 자리마저도 내놓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1955년, 마오쩌둥이 군장성들의 직위를 개편할 때도 궈루구이는 철저하게 소외됐다. 심지어 공산당 당원자격을 회복할 수도 없었다.
그 후 궈루구이는 숙반(肅反)운동, 반우파투쟁, 문화혁명 등 공산당이 혁명을 벌일 때마다 탄압대상으로 분류돼 노동개조(강제노역), 비판, 가택수색을 당하며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사느니 죽음만도 못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궈루구이는 1978년 71세가 되어서야 겨우 중공으로부터 평반(平反․‘구부러져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중공이 특정 인물의 명예를 회복시킬 때 당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쓰는 용어)을 받아 “국민당 특무(간첩)가 아니며 중공에 가입하는 일에 동의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궈루구이는 만년에 600여만 자에 달하는 ‘중국군사사(中國軍事史)’와 ‘중국항일전쟁정면작전전기(中國抗日戰爭正面作戰戰記)’라는 책 두 권을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털끗만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1937년 7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중화민국정부군(국민당군)은 대형전투 22회, 중요전투 1,117회, 소형전투 2만8,931회를 치렀다. 이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부상, 실종된 육군은 321만1,419명에 달하며 사망한 공군이 4,321명, 파손된 비행기가 2,468대에 달했다. 실제로 항일을 한 것은 국민당이며 장제스 선생”이라고 기록해 국민당의 항일사실을 긍정했다.
국공내전 때 중공의 포로가 됐다가 1959년 대사면된 국민당 병사들의 대다수는 대만행을 선택했는데, 이들은 훗날 ‘국민당장령회해전역친력기(國民黨將領淮海戰役親曆記)’이라는 회고록을 쓰면서 궈루구이에 맺힌 한을 잊지 못했다.
궈루구이는 1997년 교통사고로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그의 자녀들은 부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군사방면에서는 대학생이었지만 정치방면에서는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중공의 달콤한 이상에 빠졌던 궈루구이는 자신을 가장 신임했던 상관을 배신했고, 자신이 가장 충성했던 이로부터도 버림받았으며, 자신이 사랑하던 이들에게조차 차가운 조롱을 받았다.
린후이(林輝) 중화권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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