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논객 김규항과 진중권 간 야당연합 관련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이 둘은 지난 지방선거 당시 김규항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면서 1차로 부딪힌 바 있다. 이번에는 최근 가시화되는 야권연합에 대해 김규항이 원칙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진중권은 과거 입장을 뒤집고 야권연합에 적극성을 보이며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진중권의 전향은 무슨 수를 쓰던 정권을 재탈환해야 한다는 친노 시민사회 인사들의 절박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김규항은 지난 2월10일자 한겨레에 ‘좀 더 양식있게’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김규항은 이 글에서 최근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을 펴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조국 서울대 교수를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들’이라 규정하며 “결국 이 책은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거 연합, 즉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책이다. 과연 그런 정권교체가 ‘진보집권’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김규항은 이어 “그런 정권교체를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건 그런 정권교체로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이명박이냐 노무현이냐가 그 밥에 그 나물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폭력”이라고 비판하면서 “오연호, 조국 선생이 이제라도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 제목을 좀 더 양식 있게 바꿔주길 정중하게 요청한다. ‘시민집권플랜’ 혹은 ‘민주집권플랜’ 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제안을 던졌다.
그러자 진중권은 3월1일자 한겨레에 ‘철인좌파의 딱지치기’라는 칼럼을 게재, “자신을 “b급 좌파”라 부르는 철인좌파가 있다. 최근 c급 가짜 시뮐라크르 좌파를 폭로하는 일에 단단히 맛을 들였다“며 김규항을 직접 비판했다.
진중권 “진보정당은 집권 전망도 수권 능력도 없다”며 전향 선언
진중권은 이 글에서 “현재 진보정당은 집권 전망도, 수권 능력도 없다. 이것이 철인좌파마저 모자 눌러쓰고 진보정당을 외면해온 바람에 생긴 빌어먹을 현실”이라고 김규항의 ‘책임론’까지 거론하면서 “딱지치기로 ‘진보’하는 좌파정치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지, 그 연합에 딱지나 갈아붙이는 것은 확실히 아니”라고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중심으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적극 연합에 협력해 정권을 탈환하자는 주장이다.
김규항은 즉시 재반론을 했다. 김규항은 3일자 한겨레 칼럼에서 “진씨는 현재 개혁우파 세력과 일부 진보정치 세력이 진행 중인 선거연합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선거연합을 할 수 있지만 현재의 선거연합은 ‘정권교체’만 강조될 뿐 정작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물리적 방안이 없다. 이런 선거연합은 개혁우파 세력의 집권욕에 진보정치의 자원과 가능성을 헌납하는 절차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규항은 이어 “그런 무작정한 선거연합을 ‘진보집권 플랜’이라 주장하는 게 양식 있는 행동일까? 그런 선거연합을 진보라 부르면 제대로 된 선거연합을 모색하는 진보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순진보, 원조 진보라 할까?”라고 반문하면서 “그걸 지적했더니 도리어 ‘진보를 전세 냈느냐’ ‘딱지를 붙인다’ 성을 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태도”라고 지적했다.
이번 김규항과 진중권 간 논쟁은 사실상 좌파진영에 뿌리 깊은 논쟁의 연장에 속한다. 1997년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던 시절 좌파진영은 국민승리21 소속 권영길 후보를 내세웠다. 그러자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좌파진영에 후보를 내지 말라는 주장을 했고, 이는 2000년 지방선거, 2002년 대선, 2004년 총선까지 상대만 바꿔가며 늘 벌어지는 논쟁이 됐다.
2000년 지방선거, 2004년 총선에서 좌파정당 독자노선 선두주자였던 진중권
아이러니하게도 좌파정당 독자세력화의 최전방에는 늘 진중권이 있었다. 진중권은 200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문옥 민주노동당 후보의 사이버 대변인을 맡아 김민석 민주당 후보를 공격했다. 당시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명박 후보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출마를 포기하고 민주당 후보를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진중권은 민주노동당 후보의 독자 출마는 정당하니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문옥 후보를 지지하라며 압박했다.
당시 이문옥이냐 김민석이냐를 놓고 벌어진 이른바 ‘옥석논쟁’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민주당과 당선 가능성은 없지만 선명한 좌파성향의 민주노동당이 한 선거에서 맞붙었을 때 유권자들에 어떻게 다가야 하는지에 중요한 논점을 제시했다. 이런 똑같은 상황이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또 벌어졌기 때문이다
2004년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 유시민과 민주노동당 진중권이 정면충돌했다. 총선 막바지였던 4월12일 유시민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득표력이 매우 높은 극소수의 후보를 제외하면 지역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는 표는 모두 죽은 표가 된다”며 한나라당 부활을 저지하기 위한 현실적 투표를 제안했다. 이에 진중권 등 민주노동당 측은 발끈했다.
당시 김종철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자기 내용을 주장하기 보다는 다른 세력을 죽여 반사이익을 보려는 열린우리당의 정치 행태는 기존부패세력인 과거 정권과 다른 게 없다”고 반발했다. 진중권도 민주노동당 지지 사이트인 진보누리에 글을 올려 “총선을 맞아 사표 심리를 부추겨 앵벌이나 하는 게 바로 열린우리당의 꼬라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유시민은 “선거 때 다른 당으로 가는 표를 우리 쪽으로 불러 모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모든 정당에 허용된 당연한 권리”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진중권, 경기지사 선거에서 유시민 당선 위해 사퇴한 심상정 옹호
주로 민주당 지지자들과 맞서 싸우며 좌파정당 독자노선을 주장해온 진중권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부터 민주당과의 연합 노선으로 기울었다. 진중권은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 캠프에 참여했으나, 지지 글도 지지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심 후보가 돌연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해 진보신당 당원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진중권은 180도로 돌변해 심상정을 옹호했다. 사실상 진중권과 심상정은 유시민을 지원하며 야권연합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진중권은 노골적으로 야권연합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이번 4월 재보선에서 야권연합이 쟁점화 되자, 공개 칼럼으로 야권연합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과거 진중권의 좌파정당 독자노선과 비교하면 사상 전향에 가까운 일이다.
이러한 진중권의 전향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진중권은 익히 알려진 대로 좌파적 이념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미국 등 서구사회에 대한 사대주의 수준 예찬론, 포털 등 기업 규제를 반대하는 친기업 의식, 외국영화 규제 철폐, 반김정일 의식 등을 지녀 신자유주의 우파 성향에 가까운 인물이다. 오히려 이런 우파적 인물이 좌파진영에서 활동한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니 진중권이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사이비 좌파지식인들, 묻지마식 민주당 중심 연대에 속속 동참
그보다는 주로 좌파정당 독자노선을 주장해온 인물들이 김규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진중권처럼 민주당 중심의 연합론으로 돌아선 점이 더 중요하다. 이른바 좌파지식인들은 노무현 정권 하에서 수많은 정부 위원회 등에 참여해 한자리를 챙겨왔다. 이것이 정권교체로 맥이 끊기자,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탈환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정당 독자노선은 정권탈환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이 묻지마식 민주당 중심연대에 동참하는 이유다.
공희준, "진중권은 봉하마을의 새내기 마당쇠로 전락"
진중권의 전향은 이러한 사이비 좌파지식인들이 노 정권 하에서 부당한 특혜를 누려왔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가치와 원칙조차 내던질 수 있다는 결정적 방증이 되는 것이다. 사이트 수복의 공희준은 진중권에 대해 "전근대로 방향을 잘못 잡아 그만 봉하마을 새내기 마당쇠가 되고 말았다. 비유하자면 탈근대 깜박이 켜고 전근대로 운전대 꺾은 격이랄까. 미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진중권이야말로 좌측 깜빡이 켜고서 우측으로 핸들 돌렸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완벽한 시뮬라크르인지, 시뮬라시옹인지 여하튼 뭐 그런 혀 꼬부라진 복제물인 셈이다"라고 비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