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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됐던 정 중령, 6개월만에 '깜짝' 나타나…
이슈추적 >> 흑금성 재판에 등장한 ‘정보장교 납북사건’ 풀 스토리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1/06/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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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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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국경의 북한 군인이 압록강 주변을 순찰하고 있다.

1997년 가을.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대포동 미사일기지. 신원 불상의 20대 두 명이 이곳에 침투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한국 정보당국 공작관(case officer)에게 포섭된 공작원(agent)이었다. 탈북한 북한군 출신으로 미사일기지에 이르는 경로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았다.

기지 주변을 촬영하는 게 이들의 주 임무였다. 카메라는 버리고 필름만 몸에 숨긴 채 퇴각하다 두 사람은 경비병에 발각됐다. 한 명은 경비병의 총탄에 사망, 또 다른 공작원은 도주에 성공해 접선 장소인 옌지(延吉)까지 도착했다. 필름을 건넨 이 공작원은 이튿날 종적을 감췄다.


1990년대 후반 대북정보활동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그 단면을 엿보게 하는 일화다. 복수의 정보 관계자들은 당시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 움직임 등을 둘러싸고 북·중 국경지대에서 비밀공작(covert action)이 치열했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촬영 등을 통해 포착된 대포동 기지의 모습은 미국의 첩보위성 촬영 등으로 제대로 파악되지 않던 북한 미사일 관련 설비는 물론이고 발사 준비 동향을 추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게 관련자들의 귀띔이다.

실제로 언급한 사건이 일어난 1년여 뒤인 1998년 8월 말. 북한은 ‘대포동 1호(북측 주장은 인공위성인 ‘광명성 1호’)’를 발사했다. 사거리가 1800~2500km로 추정되는 이 미사일의 발사실험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큰 진전을 이뤘음을 입증한 일대 사건이었다.

미사일과 함께 한미 정보당국의 비상한 관심을 끈 문제는 북한의 핵 개발 관련 정보였다. 당시 한미 정보당국은 북한의 핵 연구단지인 영변 핵시설 정보를 얻으려는 휴민트(humint·인간정보) 활동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우리 군 정보당국은 여러 개의 특별 팀을 꾸렸다. 이른바 ‘고폭실험 추적팀’이 가동됐다. 고폭실험이란 일종의 핵실험 전 단계다. 정보 관계자는 “당시 북한 핵시설에 접근해 북핵 관련 개발 동향을 직접 탐지하려고 목숨을 건 대북 침투공작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정보장교들의 활동은 비밀에 부쳐져왔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사건 발생 당시 극비로 처리됐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관련자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ckw 사건’으로 불린 납북
그로부터 10여 년이 넘게 흐른 올 5월 19일 열린, 이른바 ‘흑금성 재판’에서 당시 사건의 일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 재판의 법정 증언 내용을 인용한 보도를 통해 제기된 ‘영관급 장교 4명 납북설’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주장과 증언이 잇따랐다.

흑금성이란 ‘작전계획 5027(북한 선제공격 등 유사시에 대비한 한미연합사 공동 군 운용계획, 1급비밀)’ 등 군사기밀을 북한에 넘긴 혐의로 기소된 박채서(57) 씨가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우리 정보기관(국가안전기획부)이 부여한 비밀명칭이다. 이 증언을 계기로 대령급 장교의 납북설과 함께 4명이란 숫자에서도 서로 엇갈린 관측이 대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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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촬영된 북한 영변 핵시설의 위성사진.

이 가운데 국군 정보사령부 소속 정모 중령 얘기도 포함돼 있다. 정부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에 따르면 정 중령은 1999년 영변에 침투해 시료(흙과 물)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으나, 중국에서 북측의 미인계에 걸려 납북됐다고 한다. 또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대 초 남북 간 물밑 접촉으로 풀려났다고도 보도됐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들은 “일부 언론의 보도는 사실과 다른 대목이 많다”고 주장했다. 정 중령은 고폭실험 시료 채취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납북된 시점도 1998년 3월이라고 한다. 또 그가 돌아온 시기는 납북된 지 7개월 여 뒤인 그해 10월이었다고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북핵 문제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때였다. 관련 정보를 입수하는 게 공작요원들의 지상과제였다. 주력은 정보사 요원들이었다. 사명감이 뛰어난 필드요원으로서 군 정보요원들이 숨가쁘게 열심히 활동했다. 정보사 내 여러 추적팀이 고폭실험장 주변의 시료를 채취하려 고군분투했고, 몇 개 팀이 성공했다.”

당시 이런 성과에 힘입어 정보사령부는 한껏 고무된 분위기였다고 한다. 국정원이 주도해온 북한 정보 관련 분야에서 오랜만에 정보사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등지에 나가 있던 다른 정보사 장교들도 나름대로 부여된 임무 수행 때문에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대북 정보활동의 열기가 달아오르던 1998년 3월 말 d일보 사회면에는 자그마한 단신기사가 하나 실렸다. 중국 단둥(丹東)에서 사업을 해온 한국인 기업가가 실종됐다는 소식이었다. 이 기사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 기업인이 중국 측 파트너와의 불화 등으로 납치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 서초동 정보사 본부의 ◯처 ◯과는 비상이 걸렸다. 문제의 기사에 등장한 인물은 바로 정보사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구축해놓은 대북 공작망의 현지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단둥의 한국고려인삼공사 지사장으로 위장해 근무하던 정 중령의 숙소에는 외부인의 침입 흔적이 있었고 그가 반항을 한 듯한 혈흔도 발견됐다.

피랍 후 3주 동안 정 소령과 연락이 닿지 않자 본부에서 비밀리에 조사팀(수습팀)을 파견했다고 한다. 임무 수행 중 납치돼 죽었다고 1차 결론을 냈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의 소행인지 단순한 강도사건인지 규명되지 못하고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이후 정보관계자들 사이에서 이 일은 ‘ckw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정 중령의 이니셜을 딴 명칭이었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름을 언급하거나 사건의 개요가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때마침 그해 2월 김대중정부가 들어서 북한과의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하려는 분위기가 한창 조성되던 시기라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6개월 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죽은 줄 알았던 정 중령이 제 발로 걸어 옌지에 나타났다. 머리엔 상처가 여전했고 심신이 많이 피폐한 상태인 게 확연했지만 거동에 불편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사태 수습 상황을 파악하던 한 정부 관계자는 긴박했던 정황을 이렇게 전했다.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깜짝 놀랐다. 베이징(北京)에서 무역업을 하던 현지 협조자 j씨를 급파했다. 정 중령은 그의 안내로 우리 대사관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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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한 광명성 1호의 발사 장면. 전문가들은 대포동 1호로 추정한다.

北의 강압과 고문
정 중령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관계당국의 신문에 들어가야 했다. 정 중령이 설명한 납북 경위는 다음과 같다.

“당시 40대 초반으로 ‘블랙(흑색요원)’으로 활동하던 정 중령이 임무 중 한 조선족 여자를 알게 됐다. 그의 신분을 수상하게 여긴 이 여성이 오빠에게 이야기한 게 비극적 사건의 촉매제였다. 이 여성은 오빠에게 정 중령이 ‘특무(특수임무를 하는 정보요원 지칭)’인 듯하다고 알렸다. 그런데 이 오빠는 북한과 국경무역을 하는 사람이었다. 북한에 중국산 물품을 반입해 파는 일을 하던 중 북한 세관 측에 밀수 혐의가 포착돼 붙잡혔다. 그러자 오빠는 이 사건을 무마해주는 대가로 북측의 국가안전보위부에 정 중령의 존재를 알려줬다. 정 중령의 신분과 위치를 추적한 보위부 요원들이 어느 날 숙소를 급습해 그를 북으로 끌고 갔다.”

정 중령은 자신이 평소 교육받은 대로 북한의 신문에 대응했으며 별다른 기밀유출 등은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알려졌다. 또 그들의 요구에 못 이겨 일부 내용을 말했지만 사실과 다르게 언급해 혼선을 일으키도록 하는 등 보안유지를 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의문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리 정보당국이 주목한 대목은 그가 어떻게 풀려났을까 하는 점이었다. 북한에 끌려갈 때 머리가 터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데다 반년간에 걸친 억류와 북한 공안기관의 신문에 심신이 많이 상했지만 북한이 그를 무사히 풀어줬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다. 관계자는 “북한에 있는지, 죽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액션도 취하기 어려웠다”면서 “처음에는 정 중령이 잘 훈련받은 정예요원이란 점에서 그가 북측과 잘 교섭을 벌여 귀환에 성공한 것 같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의심의 여지가 많다고 판단한 당국은 정 중령을 상대로 심층적인 신문을 벌였다. 베테랑 요원들이 참여하고 모든 기술이 총동원된 강도 높은 작업이 이어졌다.

결국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한 정 중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북한 심문관들이 남쪽의 가족까지 파악해 죽여버리겠다는 강압과 고문을 가하자 버티기 어려웠고, 베이징과 선양(瀋陽) 등의 중국 내 우리 대북 공작망을 북측에 대부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북측) 공작원으로 활동하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도망나온 모양새를 취하기로 해 풀려났다고 했다.

북한은 정 중령을 상대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세를 강요했다고 한다. 또 우리 정보기관의 대북정보 활동의 상세한 내용을 월 1회 중국의 포스트(연락거점)에 보고하라는 임무도 주어졌다. 군인과 군 조직 내 불만세력을 규합해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고 임무를 완성했다고 판단할 경우 적절한 시점을 택해 다시 북으로 귀환하라는 지령까지 받고 왔다는 점도 드러났다고 한다. 이중스파이 임무를 준 것이다.
정보당국은 정 중령에게 별다른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가 이미 북한에 억류당하면서 심신상실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를 봤고 일부 정보활동 과정에서 규정을 어긴 측면이 있다고 하지만 중벌에 처할 사안이 아니라는 측면에서였다.

사건 1년 후 정 중령은 전역했다. 이후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당시 사건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는 게 내부 사정에 밝은 이들의 전언이다. 한 관계자는 “정 중령은 대북 정보활동에서 가장 큰 희생자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청춘을 바쳐 국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 정보활동을 벌였지만 신분 노출로 북한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얘기다.

정보기관과 관련 장교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김대중정부의 태도였다. 당시 햇볕정책 추진으로 새로운 대북접근법을 모색하던 청와대와 정부는 이 사건을 극비에 부쳤다.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필드에서 뛰는 대령은 없다”
김대중정부 출범과 동시에 불거진 이 사건이 드러날 경우 국민적 분노를 사게 되고 ‘정상회담 추진’ 등 청와대의 구상이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ckw사건’은 정보장교들 사이에 금기시되는 사안이 됐고 전설 같은 이야기로만 남았다. 한 관계자는 “국가를 위해 희생된 정보장교를 이처럼 철저하게 방치하는 정부가 어디 있느냐”면서 “현역 장교를 끌고 가 고문하고 역임무까지 줘 침투시킨 북한 김정일정권에 침묵한 김대중정부는 군에게 충성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이 왜곡된 형태로 공개된 사실에도 군 정보 관계자들은 분노하는 분위기다. 흑금성 재판 과정에서 등장한 영관급 정보장교 4명의 납북 얘기는 실체가 없다는 얘기다. 군 소식통은 “북·중 국경지대에서 공작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펼친 1996~1999년 사이 조선족이나 탈북자 공작원 중 일부가 납북된 적은 있다”면서도 “정 중령 외에 피랍된 장교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 중령 사건이 군내에서조차 잊혀가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이후에는 아예 이런 일이 발생할 거리도 사라졌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김대중정권이 본격화된 이후 청와대가 국정원에 공세적인 대북 공작의 중단을 요청했다”면서 “사실상 국정원의 지휘를 받는 군 정보요원들의 활동도 이후 상당히 위축됐다”고 강조했다.

정보장교 납북설의 주인공인 흑금성 박채서 씨는 현역 육군 소장으로부터 입수한 작계 5027 등 군사기밀을 대북 공작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북한 작전부(현 정찰총국) 공작관에게 2003년부터 2005년 8월까지 넘겨준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12월 1심 재판에선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2심이 진행되자 박씨는 변호인을 통해 북한은 이미 납치한 장교들을 통해 2000년대 초반 작계 5027을 입수했고, 2004년에 북한이 직접 이런 사실을 공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직 북한 전문기자인 정모 교수를 증인으로 내세워 논리를 폈다.

우선 변호인은 정 교수에게 “합동참모본부 중령이 1999년 중국 국경에서 납치됐고, 이모 대령이 체포됐으며, 또 다른 이모 대령과 박모 대령이 북한에 납치된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정 교수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고, 이 내용이 보도되면서 이슈화됐다. 하지만 정 교수는 이후 “관련 얘기를 듣고 취재한 사실은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고 전했다.

일련의 진행 상황을 지켜본 한 정보 관계자는 “공작 개념이나 군 정보요원의 특성을 잘 모르고 횡행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대북 공작요원 간부 중 필드에서 뛰는 최고 직급은 중령으로 알려졌다. 보통 중령은 현장 팀장을 맡는다. 대령이 되면 본부에서 지휘·감독하는 일종의 ‘데스크’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대령이 중국 현지에서 잡혔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란 얘기다.

또 규정상 공작관은 적진에 직접 침투할 수 없다. 사실 침투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따라서 대북 공작의 경우 주로 중국 현지에서 포섭한 공작원에게 임무를 주고 투입시킨 뒤 해당 공작원이 받아온 첩보를 본부로 보고하는 식이라고 한다.
현장에서는 일체 보고문건을 작성할 수도 없다. 만에 하나 잡히면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전보고 형태로 ‘배가 잘 들어와 물건을 잘 받았다’ ‘태풍이 왔다’ 등의 음어를 쓸 뿐이란다. 국내에 들어와야 정식보고를 할 수 있다.

“대북 정보요원, 작계 안 가르쳐”
정보요원이 핵시설 주변 시료를 직접 채취해왔다는 등의 보도 역시 와전된 내용이라고 한다. 시료채취는 영관급 납북사건과 전혀 별개의 사안이란 얘기다. 한 관계자는 “시료채취 건은 이미 언론에 노출돼 보도된 내용으로 안다”며 “이를 영관급 납치와 관련이 있는 듯 얘기하면 잘못된 정보”라고 말했다. 시료채취 문제는 해당 장교들에게 정부가 포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리실에 올라온 공적조서가 공란인 것을 이상하게 여긴 한 기자가 추적 끝에 극비 대북 공작 사항임을 밝혀낸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자는 “대북 첩보수집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의 경우 공적 내용을 밝힐 수 없어 비워둔 채 포상을 신청하는 경우가 있다”고 귀띔했다.

다른 대북 정보분야 관계자는 “정보장교들이 납북됐다고 쳐도, 현장의 대북 공작 상황이 아닌 우리 군사기밀을 북한에 넘기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도 주장했다. 정보사 공작부서 간부들은 야전에서 소대장을 마친 중위 정도의 초급장교 시절에 대부분 선발된다고 한다. 이들은 6개월~1년간 집중 보수교육을 받는다. 이후 대북 특수임무수행팀 팀장을 맡아 스쿠버다이빙·공중강하·육상침투 등의 특수훈련을 거치며 정예요원화된다.

“정보요원은 일반 야전 전투요원보다 포로가 될 확률이 10배 이상 높다고 통상 얘기한다. 그래서 포로가 돼도 적에게 노출될 내용이 없도록 하는 게 간부 교육에서 중요하다. 아군 전투서열(the order of battle)은 절대 가르치지도 않는다. 주로 초급장교 때 차출하는 까닭도 그런 사정 때문이다. 중위 때 오면 야전에서의 작전개념 등은 개념적으로만 알 뿐이지,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작계 5027 같은 걸 어떻게 알겠나.”

이어 그는 “물론 소령 때 정보사로 전입해 알 거 다 아는 흑금성 같은 경우가 예외적일 수 있다”면서도 “전문요원으로 일찌감치 선발된 요원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단언했다. 박씨는 3사관학교 14기생(1977년 임관)이다. 야전부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소령 진급 후 육군대학을 거쳐 1990년대 초반 정보사에 왔다고 전해졌다.

“(그가) 재판에서 주장한 납북 장교 얘기도 앞뒤가 안 맞다. 1993년에 이미 전역한 그가 1990년대 후반에 있었다는 일을 어찌 알겠나? 어디서 (부대 동료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나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보려고 무리수를 둔 듯하다.”

오랜 시간 베일에 가려졌던 ‘ckw사건’은 엉뚱하게 흑금성 재판을 통해 일단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폭로 과정이나 의도는 순수하지 못하다고 정보 관계자들은 주장한다. 흑금성 측의 주장을 요약하면 “납북된 정보장교들이 군사기밀을 넘겼으니 나중에 기밀을 건넸다 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중령급이 대령급으로 부풀려졌고 인원도 4명으로 과장됐다는 것이다. 한 정보장교는 “군 생활의 대부분을 힘들고 위험한 대북 공작에 바친 정 중령은 북한의 함정에 빠져 너무 많은 걸 잃었다”며 “남북 분단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그가 대북 공작 과정에서 일부 허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를 비난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그의 불행을 정쟁거리로 삼거나 개인적인 유불리에 자의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 관계자는 “김대중정부가 대북 햇볕정책의 성공을 노려 국익 때문에 희생된 한 정보장교를 외면한 처사는 정부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라면서 “이런 식이라면 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을 던져 정보전쟁의 현장을 뛰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흑금성’ 박채서는 누구인가?
“정보사 장교 출신으로 안기부 비밀문건 속 주인공”
재판 과정에서 ‘정보장교 4명 납북설’을 주장한 박채서(57) 씨는 남북을 오가며 공작활동을 벌인 이중간첩이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진행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북풍공작’이 이듬해 알려지면서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안기부는 국내 여론을 움직일 목적으로 북한을 이용한 여러 건의 비밀공작을 진행했다. 당시 청와대 행정관을 비롯한 3명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관계자를 만나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이른바 ‘총풍(銃風)사건’이 대표적이다. 대북사업가로 위장해 북한 정보기관이나 고위층과 접촉하던 박씨는 북풍공작 관련 의혹을 받아 신분이 노출되면서 해고됐다. 이후 북한 측 정보기관의 공작원이 돼 국가기밀을 건넸다는 혐의로 기소됐고, 현재 2심을 받는 중이다.

안기부는 그에게 ‘흑금성(黑金星)’이라는 비밀명칭을 붙여 그를 대북 비밀공작원으로 활용했다. 정보 관계자들에 따르면 안기부 비밀문건에 출처가 ‘흑금성’인 첩보보고서가 상당수 존재했다고 한다.

박씨는 군 정보장교 출신이다. 3사관학교 14기생(1977년 임관)으로 소령 진급 후 1990년대 초반 정보사령부로 왔다. 하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문제되는 개인 생활이 감찰팀에 알려지면서 1993년 전역했다고 알려졌다.

이후 그는 안기부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북한 내에서 광고 촬영을 준비 중이던 박기영 씨를 만나 ‘아자커뮤니케이션스’라는 광고회사의 전무로 활동하면서 공작을 실행했다. 아자커뮤니케이션스는 박씨를 통해 금강산 등 북한의 명소를 배경으로 남북한 인기 연예인을 등장시키는 tv광고 기획을 추진했으나, 1998년 3월 안기부 전 해외실장 이대성 씨가 국내 정치인과 북한 고위층 인사 간의 접촉 내용을 담은 기밀정보를 폭로하면서 사업은 불발됐다. 이른바 ‘이대성 파일’로 불렸던 이 정보는 안기부가 남북 비밀접촉을 취합한 기밀정보였다. 여기에는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활약상도 들어 있었다.

 
이후 아자커뮤니케이션스는 “사업이 실패한 데는 흑금성을 위장취업시킨 안기부에 책임이 있다”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03년 1월 법원은 “국가는 6억5000만원을 지급하고 화해하라”는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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