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후기로 구분한다. 우리가 유교국가로 알고 있는 조선은 실제로 조선 후기 사회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유교국가로의 전환에 200년이 걸렸다. 현재 대한민국은 조선이 망한지 10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적 관성으로 볼 때 현재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공고한 유교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인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인물관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경영자는 스티브 잡스다. 애플사의 실적이 상한가를 지속하면서 왜 한국에는 이런 인물이 없느냐는 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한국 같은 유교사회에서 그와 같은 인물이 출현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최근 인터넷 구인구직회사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시고 싶은 CEO를 조사한 결과 안철수가 41.2%의 지지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결과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랍게 다가온다. 우선은 그가 경영 일선을 떠난 지 10년이 다 돼가는 전직 경영인이라는 점이다. 그의 삶에서 경영자로 존재했던 시기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더 이상 의사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기업가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런 평가의 주체가 젊은 대학생들이라는 점이다. 도대체 안철수가 이 시대에 왜 젊은 대학생들에게 이상적인 경영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기업가정신에 대한 뒤틀린 인식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조사는 이건희 회장이 2위에, 스티브 잡스가 3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창업가였던 정주영이 4위에 올랐을 뿐 이병철은 아예 순위에 끼지도 못했다. 이것이 단순히 젊은 대학생들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사실은 안철수야말로 이 시대에 퇴화한 기업가정신의 상징적 존재다. 우리가 기업가로서 안철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도대체 그가 만든 기업이 고용위기의 시대에 얼마만큼의 인력을 채용하고 있는가? 주식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투자자들을 부자로 만들어 줬는가? 인터넷 보안업계에서 얼마나 기술적 혁신을 이룩했는가 등이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안철수는 저런 순위에 낀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한국사회는 ‘위대한 기업가’라는 단어에서 ‘기업가’가 아니라 ‘위대한’이라는 형용사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선량한 기업가를 위대한 기업가로 착각하곤 한다. 그가 훌륭한 시민인 것은 틀림없지만 경영자로서 위대함을 평가하는데 그를 언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김연아는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와 상관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단지 아름다운 선수이거나 도덕적인 선수여서가 아니라, 스케이팅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한 선수라는 본질적인 이유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위대한 예술혼은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서라도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려는 열망에 있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기업가정신은 폭탄을 안고서라도 수익이 있는 곳에 뛰어드는 정신이다. 지금의 스티브 잡스를 보라. 췌장암으로 얼굴이 반쪽이 된 상황에서도 직접 프레젠테이션 현장에 나서지 않는가. 더욱이 스티브 잡스가 1955년생인 것을 감안해 보자. 안철수는 겨우 1962년생으로 한창 일해야 할 나이다. 그런데 이미 10여 년 전 일선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과연 그가 지금 해야 할 것이 코치의 역할일까? 그가 학생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이지 않은가?
한국현대사에 대한 오해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경우가 이병철에게도 있었다. 그는 1970년대 말 첫 번째 암 투병 이후 10여 년만의 재발로 세상을 뜨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삼성의 역사를 가른 반도체 사업 진출의 결단이 그 중간단계에서 이뤄졌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만일 첫 번째 암 투병 이후 그가 스크루지처럼 회개해서 물질에 초연한 삶을 살았더라면 오늘의 삼성은 있을 수 없다. 흔히 박정희의 경제개발 업적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진보진영이 만들어 낸 논리가 있다. 그 시절 경제개발의 공은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몫이 아니라 피땀 흘려 일한 국민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창업가에게는 이런 수사조차 통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 자리는 누군가는 대신하겠지만 창업가가 기업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 회사는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병철이 없어도 삼성전자 같은 회사가 존재했을 것이라거나 정주영이 아니어도 현대자동차의 신화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얘기는 다빈치가 아니어도 누군가 모나리자를 그렸을 것이라는 소리만큼이나 허황되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를 떠나 외부의 시선을 통해 보는 것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경영학의 구루였던 피터 드러커는 가장 위대한 기업가정신의 소유자로 한국기업인들을 꼽았다. 그가 꼽은 기업가가 이병철과 정주영 같은 한국 산업화의 주인공들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위대한 기업가들이 오로지 국내에서만 저평가되고 있다.
안철수의 사례로 볼 때 이병철은 이렇게 살았더라면 한국에서 존경받았을 것이다. 1950년대 제일제당으로 떼돈을 벌었을 때 그는 기업에서 은퇴했어야 했다. 그리고 학교나 하나 짓고 장학 사업이나 했으면 이병철은 현재 한국에서 존경받는 기업가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그 대신 오늘날 세계적 기업으로서의 삼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딸린 수 십 만개의 일자리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를 정주영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정주영은 지난 세기 코리안 드림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에 무일푼이었던 젊은이가 한국 최고의 부호 자리에 올랐던 것은 이 시대에는 불가능한 신화다. 정주영이라는 존재가 입증하고 있는 것은 초창기 대한민국의 역사가 진보진영의 주장과는 달리 신분의 이동에 개방적이고 역동성을 간직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안철수는 자수성가가 끝난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가 최근 강남 아이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이 1960년대의 강남 키즈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완벽한 스펙을 쌓으며 성장했다. 이런 배경 덕택에 그는 대한민국 같은 분열사회에서도 아무에게도 비판받지 않는 성역과 같은 존재가 됐다.
이런 경향은 안철수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386세대 벤처기업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김택진, 이찬진, 이해진, 이재웅 등의 벤처기업가들은 모두 중산층 집안의 아들로 명문대학을 나왔다. 특히 네이버의 창업자 이해진과 다음의 창업자 이재웅이 학창시절 강남의 한 아파트에 아래위층 살던 이웃지간이라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제 이 사회는 부잣집에서 명문대학생이 나오고, 그들 가운데 다시 거대한 부자가 탄생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사회가 빠르게 경직돼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이렇게 좋은 교육받고 곱게 자란 이들이 기업가정신이 퇴조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배우지 못한 정주영은 겁도 없이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외화를 벌어들였는데, 좋은 교육 받은 이들은 정작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국내시장에만 안주하고 있다. 더욱이 포털사이트들은 대기업들의 전매특허인줄 알았던 중소기업 죽이기를 똑같이 재현하고 있다. 최근 안철수는 대기업의 행태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고 있는데 자기와 같은 세대의 벤처기업가들에게도 과연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이미 한국에는 유일한이라는 성자와 같은 기업가가 존재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있어서도 안철수보다 훌륭한 인물이 앞선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안철수가 끊임없이 소비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혹시 과거에는 온통 낡고 부조리한 인물들만 있었고 현대인들은 모두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가? 혹은 진득하게 한 분야에 천착하기보다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자유인의 삶을 더 높게 쳐주는 풍조 때문은 아닌가? 한 인물에 대한 근거 없는 과대평가는 우상을 만드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을 가리게 되고 사회적 평가를 왜곡되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어쩌면 안철수를 과대평가하는 이들이야말로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진정한 주범들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