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안철수가 과잉 평가되는 사회현상을 비판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안철수 개인에 대한 공격과 이병철, 정주영 회장에 대한 숭배로 받아들여 유감이었다. 필자가 대학생들의 조사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업하고 싶다’던 학생들이 정작 모시고 싶은 경영자로는 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기업가를 첫 손에 꼽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을 대상으로 ‘입사하고 싶은 기업’ 순위를 매기면 만년 1위를 차지하는 것이 삼성전자다. 반면 안철수연구소는 저런 순위에 끼지도 못한다. 왜 안철수라는 사람은 인기 있는데 안철수연구소는 인기가 없는가? 왜 삼성전자는 인기 있는데 창업자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필자는 이 불일치가 뿌리 깊은 한국적 현상이라고 느꼈다.
많은 분들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기업가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주장을 펴지만 이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다면 한국이 낳은 최고의 사회적 기업가가 안철수인가 말이다. 젊은 학생들의 기억에는 안철수가 직원들에게 주식을 분배한 것만 기억에 남는 모양인데, 이미 그런 사회적 환원은 유일한이라는 초창기 기업가가 실천한 바 있다. 더욱이 그는 조국의 식민지시절 미국에서 독립운동에까지 참여한 인물이다. 하지만 386세대에 속하는 안철수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사회적 기업가를 높이 평가하는 추세라면 왜 유일한은 기억하지 못하는가?
또 필자는 한국 산업화 시기의 기업가들이 위대했다는 근거를 피터 드러커라는 해외석학을 통해 주장했다. 아마도 많은 대중이 그가 한국 실정을 잘 몰라서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경영학의 대가가 과연 그들의 약점을 몰랐을까? 오히려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한국 대중이다. 현재 한국인들이 위대한 기업가로 알고 있는 해외 인물들은 당대에 존경받은 것이 아니라 사후에 만들어진 존재다. 어느 사회나 산업화 시기는 법과 제도보다 기업이라는 괴물이 앞질러 성장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기업가들은 지역을 초월해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날 전 세계 아이들의 위인전 속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인물이 앤드류 카네기다. 하지만 그는 당대에 ‘강도귀족’이라는 평판을 받았고, 기업가가 할 수 있는 온갖 비리의 한계에 도전했던 인물이다. 이병철, 정주영의 비리에 대해 시시콜콜히 알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이런 사실에는 둔감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해외 기업가들은 모두 존경받을 존재고, 한국에는 악당만 있다는 미신이 넘친다.
이병철과 정주영에 대한 평가는 결국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휴머니즘으로 가득차고 도덕성이 충만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최단기간에 최소희생으로 최대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더의 지위는 초식을 할 수없는 육식동물의 운명과도 같은 측면이 있다. 우리가 성자와 같은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순신도 실제로는 부하들의 목을 치던 장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젊은 학생들이라도 거스 히딩크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이 경험한 최고의 리더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히딩크의 신화는 모두 월드컵 4강 진출 후 만들어 낸 사후합리화의 결과다. 그 이전까지 한국 언론은 히딩크가 명품으로 온 몸을 두르고, 여자 친구를 숙소에 불러들인다는 사적인 문제나 꼬집어대고 있었다. 그는 선수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유명선수들의 프리미엄을 파괴했고 고참과 막내가 맞장을 뜨도록 했다. 만일 인기투표로 지도자를 뽑는다면 그는 결코 선택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있던 그 해 한국 대중은 대통령도 수입하자며 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추앙했다. 하지만 히딩크가 안철수와 전혀 다른 부류의 인물로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인가? 혹시 우리 사회는 히딩크가 남겨준 교훈을 벌써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
예술인들의 세계에는 요절효과라는 것이 있다. 일찍 세상을 뜬 예술가들이 과대평가 받는 현상을 뜻한다. 2005년 계간 ‘시인세계’에서는 8명의 평론가들이 과대평가된 시인 4명을 선정했다. 그 가운데 2명은 윤동주와 기형도 같은 요절 시인이었다. 전문가와 대중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천재는 요절한다’는 명제를 ‘요절하면 천재다’라고 세상이 잘못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예술가를 평가할 때 작품 자체로 하지 않고 요절, 기행 따위로 평가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예술의 저질화를 불러오게 된다.
한국사회는 유달리 이런 현상이 심각하다. 지금 외국인이 한국사회를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직 시절 국민들로부터 무척 사랑받은 줄 알 것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는 현직 시절에 지지율이 죽을 쒔고, 퇴직 후 급상승했다가 사후에 신화가 되었다. 노 전 대통령 장례식 당시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던 군중들 가운데 대다수는 예수를 3번 부정할 때의 베드로와 같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지금 자기수치심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면하려 든다. 당시 외신이 이런 한국적 현상에 대해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밖에 없다는 미군 장교의 말처럼 한국인들에게 좋은 사람은 죽은 사람들 밖에 없다. 그래서 늘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대접받고, 훈수꾼이 플레이어보다 존중받는다. 이런 현상이 만들어낸 거품이 안철수, 조국, 문재인 같은 인사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직에 있지도 않은데 해당분야의 가장 이상적인 리더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독특한 한국적 현상이다. 한국인들에게 좋은 정치인은 아직 정치를 시작하지 않은 정치인이고, 좋은 기업가는 기업 활동을 하지 않는 기업가다. 그래서 현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모두 오염된 인간들이고, 구름 위에 올라앉은 이들만 세상의 존경을 받는다. 도대체 이런 유령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난 대선 당시 문국현 후보는 이런 정서를 활용한 아주 졸렬한 정치공학적 산물이었다. 정치지도자로서 전혀 검증되지 않은 신인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워 정권을 잡겠다는 수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아직 여기에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어서 문재인, 조국, 안철수에 대한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해찬식 표현을 빌리면 저들은 정계에 입문하는 순간 한방에 날아간다. 그것은 수구꼴통 집단이 저들을 죽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구름위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대중의 눈을 가리고 있던 신비주의가 걷히기 때문이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적 결함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인어공주처럼 거품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한 때의 이회창은 얼마나 신선하고 인기 있는 인물이었나. 이를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비하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하는 짓도 10여년 후에는 낯부끄러운 일이 될 지도 모른다.
정확히 평가하자면 저런 인물들은 군사정권시절 국무총리나 했으면 딱 어울릴 사람들이다. 도대체 실체는 없고 가진 것은 이미지밖에 없는 자들이 얼굴마담밖에 할 게 더 있겠는가? 노무현이 위대했다면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던 대통령자리에 오르기 위해 타협하고, 계략을 꾸미고, 현실세계에서 승리한데 있다.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람은 그렇게 똥물을 뒤집어쓰고, 진흙탕 싸움을 마다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도덕군자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경영은 김수환 추기경이나 성철 스님 같은 분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조국이나 문재인은 노무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안철수는 이병철, 정주영과 비교도 되지 못한다.
예수의 부활신앙이 있는 기독교문명에서는 이런 질문이 존재한다. 예수가 지금 돌아온다면 과연 알아볼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유효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메시아는 결코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다가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리더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부지불식간에 다가온다. 히딩크와 노무현이 우리사회에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면 한국 대중은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수많은 위대한 천재들이 피어나지 못하고 죽어간다는데 혹시 우리 자신이 그들을 죽이는 범인은 아닐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도자는 유권자의 수준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명제가 그 어느 때보다 가슴 깊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