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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이승만 싫어해 귀국 막았다”
“하지 장군이 이끈 24군단 1만여 명의 병사 가운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미군은 한 명도 없었다.”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1/08/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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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이승만 싫어해 귀국 막았다”

[중앙일보] 입력 2011.08.15 01:02 / 수정 2011.08.15 01:09

미 군정 하지 중장 보좌관 조지 윌리엄스가 증언한 해방공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미 군정(軍政) 책임자 존 하지(John Reed Hodge·1893~1963) 중장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조지 윌리엄스(George Zur Williams·1907~94) 해군 중령의 ‘해방공간’ 증언이 처음 공개됐다. 윌리엄스의 증언을 수집한 이는 이정식(80)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석좌교수. 이 교수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대한민국의 기원』 등의 책을 내며 한국현대사 연구의 초석을 놓은 학자다. 조지 윌리엄스의 이름은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지만 이 교수는 윌리엄스 생전에 직접 면담을 통해 미 군정 초기 그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했다.
 
① 미 군정 하지 사령관(중장)이 이승만 박사 옆에서 트럼펫을 불고 있다. [연합뉴스] ② 하지 중장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조지 윌리엄스의 1950년대 모습. [한국기독교회사 연구가 김선호 제공] ③충남 공주시 영명중고교 뒷산에 있는 조지 윌리엄스의 묘. 오대현 교장(왼쪽)이 묘를 찾아 학생들에게 영명학교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영명중고교(④)의 전신 영명학교는 조지 윌리엄스의 아버지인 프랭크 윌리엄스가 1906년 세웠다. [프리랜서 김성태]

윌리엄스와 이 교수의 만남은 1988년 6월 20일 미국 메릴랜드주 록빌 파빌리언(Rockville Pavillion) 호텔에서 영어로 이뤄졌다. 이 기록은 이 교수의 수많은 ‘현대사 파일’ 속에 묻혀 있었다. 이 교수의 펜실베이니아대 제자인 김용호 인하대 교수가 최근 이 교수를 방문해 ‘윌리엄스 면담록’을 발견, 본지에 단독 공개하게 됐다. 김 교수는 “이정식 교수의 수많은 현대사 인물 면담록 가운데 처음 공개하는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연구논문 쓸 때 참고하던 면담록들을 이제는 이 교수의 연세도 있고 해서 공개를 결심한 듯하다”고 밝혔다.

 증언은 해방 직후 한국사회의 혼란상을 보여 준다. 미 군정 초기 ‘준비 안 된 미군’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윌리엄스의 증언에 따르면 “하지 장군이 이끈 24군단 1만여 명의 병사 가운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미군은 한 명도 없었다.” 의사소통이 안 돼 일어나는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한다. 윌리엄스가 유일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미군이었는데, 그는 본래 하지의 병사가 아니었다. 하지의 24군단을 호위하던 7함대 소속 해군 군의관이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하지의 군단이 인천에 상륙하던 45년 9월 8일 하지와 윌리엄스는 처음 만났다. 그것도 우연히.


이정식 교수
 “인천에 내리기 위해 갑판 책임자인 육군 대령 하트먼에게 상륙 보고를 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하트먼은 한국인 3명과 말이 안 통해 애를 쓰고 있었어요. 하트먼은 이탈리아어·불어·영어로, 한국인들은 중국어·일어·한국어로 제각기 떠들고 있었죠. 그걸 본 윌리엄스가 하트먼에게 ‘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싸운 지하 독립운동가이며, 하지 중장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통역해 주자 하트먼은 내게 ‘어떻게 한국어를 아는가’ 물었고, ‘저기 보이는 언덕 위 검은 지붕의 붉은 벽돌집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자 하트먼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후 하트먼 대령은 윌리엄스를 하지에게 소개시켰고, 해군이 육군의 보좌관으로 특채되기에 이른다.

 윌리엄스는 1907년 인천에서 태어나 14세까지 충남 공주에서 자랐기에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그의 증언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귀국이 늦어진 배경에 관한 것이다. 미 국무부에서 이승만의 귀국 허가를 빨리 내주지 않아 늦어졌다는 정도로 지금까지 알려졌는데, 윌리엄스는 구체적으로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1893~1971) 국무차관을 지목했다.

“애치슨이 부정적이었다. 애치슨은 이승만을 싫어했다. 이승만이 미 국무부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당시 무국적 망명객 신분이었으므로 한국에 돌아오려면 국무부 허가를 받아야 했다. 윌리엄스는 또 “미 군정과 한국인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남한 전역을 돌며 여론 조사를 했다”며 “당시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우리 대통령’이라 부르며 그의 귀국을 바라고 있다는 내용을 여러 차례 하지 사령관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백낙준 어린 시절 알고 지내 … 오세창과는 밤새 역사 토론
윌리엄스와 한국인 인맥


백낙준(左), 오세창(右)
충남 공주시 공주영명(永明)중고교 뒷산에는 감리교 선교사들의 가족 묘지가 있다. 이곳에 가면 조지 윌리엄스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유해 절반은 태평양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영명학교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유년 시절을 보낸 영명학교를 고향처럼 생각한 것이다.

영명학교는 선교사였던 그의 아버지 프랑크 윌리엄스가 1906년 세웠다. 1919년 3·1운동의 주역 유관순(1902~1920) 열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유관순 열사는 영명학교를 2년간 다니다 서울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윌리엄스는 이정식 교수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한국인 인맥을 소개했다. 미군정 경무국장(경찰청장)을 지낸 조병옥(1894∼1960) 박사는 영명학교 2회 졸업생으로 인연을 맺었고, 영명학교 교사 출신으로 ‘코리아 타임스’ 초대 사장을 지낸 이묘묵(1902~57)은 윌리엄스와의 인연으로 하지 장군 통역관이 됐다고 했다.

 연희대(현 연세대) 초대 총장 백낙준(1895~1985)과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며, 윌리엄스와 백낙준의 부모끼리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서예가 오세창(1864~1953), 의학자 오긍선(1879~1963), 성악가 이인선(1907~60) 등도 언급했다. 의사인 오긍선을 통해 오세창을 만났는데, 오세창은 한국 역사·문화에 해박해 밤새도록 토론을 즐겼다고 했다.

 오세창의 조언을 자주 듣던 그가 미국에 초청하겠다고 하자 오세창은 나이가 많아 가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그 이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인선은 의사이면서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테너가 돼 해방 후 귀국, 이화여대 교수였던 윌리엄스의 어머니와 함께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La Traviata)’를 공연했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미 전쟁성(육군성)에서 일을 하는데, 잊혀지지 않는 보고서가 하나 있다고 했다. 하지 장군의 보고서였다. “10년 내로 북한과 전쟁을 할 것 같다. 전쟁을 막을 방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애치슨은 그 보고서를 읽지 않았다고 했다. 윌리엄스는 “당시 국무부의 한국 데스크는 한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해군 대위가 맡고 있었다. 미국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1950년 북한이 남침했을 때 미국은 속수무책이었다”고 회고했다. 배영대 기자

◆조지 윌리엄스(1907~94)=미군정 초기 한국어를 아는 유일한 미군. 그의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1883~1962, 한국명 우리암·禹利巖)는 감리교 선교사로 1906년 공주에 영명(永明)학교(현 공주영명중고교 전신)를 세웠다. 인천에서 태어난 조지 윌리엄스는 영명학교 졸업 후, 조부모가 있는 미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쳤다. 미 해군 군의관 생활을 하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한국명은 우광복(禹光福).

 
◆딘 애치슨(1893~1971)=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 외교를 지휘했다. 1933년 재무차관, 41년 국무차관보, 45년 국무차관을 거쳐 49년 국무장관이 됐다. 50년 1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선언은 6·25 남침을 유발했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냉전이 해체된 90년 이후 소련·중국 등에서 공개된 문서들은 6·25전쟁이 스탈린-마오쩌둥(毛澤東)-김일성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발발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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