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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개천절에 성조 한배검에 후손이 불초하다고 탄식
<김구 주석 건국기원절 연설문 전문>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1/10/0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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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공개] 광복 직후 상하이 발간 <대한일보> 독점 입수

[중앙일보] 입력 2011.10.02 10:20 / 수정 2011.10.02 11:01

65년 전 홍구공원으로 가는 시간여행
김구 임시정부 주석 상하이 도착(1945년 11월 5일)~귀국(11월 23일) 과정 행보 상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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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현 루쉰공원). 상하이임시정부 김구 주석 등 임정 요인들이 한국 교민과 중국 현지인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개선(224쪽 사진)했다. 이에 앞서 1932년 이 홍구공원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일본 천장절과 전승 기념 축하식장에 던진 폭탄에 시라카와(白川·백천) 대장 등 일제 고위장성 10여 명이 숨을 거뒀다. 이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를 빠져나간 임정 요인들은 13년 만에 역사적 장소에 승리자로 다시 섰다.

<월간중앙>은 당시 임정 요인 상하이 도착 현장을 기록한 언론 보도 내용(225쪽 사진)을 처음 공개한다. 1945년 광복 직후 창간된 상하이 교민 신문 <대한일보>(발행인 박거영 등 6명) 11월 6일자는 1면을 다 털어 현장의 감동을 전했다.(이하 <대한일보> <대한신보> 기사 중 일부 내용은 뜻을 최대한 살리는 선에서 현대 표기법에 맞게끔 고쳤다.)

‘熱狂的(열광적) 歡聲裡(환성리)에 김구 주석을 맞이함’을 머리기사로 삼고, 관련 기사로 ‘임시정부(臨時政部)로써 입국하겠다-虹口公園(홍구공원)서 교포(僑胞)에게 절규(絶叫)’ ‘錢市長(代理)(전시장(대리)) 出迎(출영)-中國各新聞記者(중국 각 신문기자)도 同行(동행)’ ‘天則(천칙)인가 奇蹟(기적)인가’ ‘金九先生(김구 선생)과 記者團會見記(기자단회견기)’ 등 5꼭지 기사로 전면을 할애했다.

<대한일보>는 그날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은 우리의 갈망에 11월 5일 오후 4시 반 역사적 오천 교민의 환영하에 상해를 떠나신 지 13년 만에 다시 아타까웠던 이 땅에 발을 딛게 되었다. (…) 오늘날 정의의 승리자가 돼 깃발을 날리고 오시게 되니 우리는 어찌 이날을 기쁘게 감격의 눈물로 맞이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은 모름지기 우리 오천 교민뿐만 아니라 전 민족이 그러함을 중언을 필요치 않는다. 이날 정말 이 민족혼을 맞이하기 위해 홍구공원 江灣(강만) 비행장에는 무려 천여 명이 정말 가슴을 탁 헤쳐놓고 환희에 넘쳐 두 손으로 맞이하였으니 다시 그 감격에 넘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그 가운데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열광적 환성리에 김구 주석을 맞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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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상하이 귀환 장면 담은 첫 보도
신문은 또 13년 전과 이날을 비교하면서 정의는 승리한다는 점을 되새겼다. “옛날 홍구공원에선 백천 대장이 죽고 오늘의 홍구공원에서는 월계관을 쓰신 분이 있다. 언제나 정의는 그 역사를 창조함에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도 기적적인 역사는 또다시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옛날에 홍구공원에서 우리의 선열 의사에게 백천 대장이 죽는 것을 보았고, 오늘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애국지사가 월계관을 쓰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한 개의 우연이 아니라 기필코 있어야만 할 오늘의 天則(천칙)임을 깨닫게 되었다….”(‘천칙인가, 기적인가’)

<대한일보>는 김 주석이 홍구공원 환영 인파 앞에서 발언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전했다. “…우리는 이제 건전한 독립국가의 민족이 되자면 먼저 우리의 씩씩한 참됨을 살려야 하겠다. 다같이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 될 것이다. 더욱 금후 우리 임시정부는 국가에 들어가 새 나라를 세우고, 새 민족을 갖도록 주력할 것이다….”(‘임시정부로써 입국하겠다-홍구공원서 교포에게 절규’)

이날 임정 요인이 도착한 강만공항에는 한인 기자가 다수 몰려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김 주석을 기자들이 둘러싸면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구 선생과 기자단 회견기’ 기사는 김 주석의 감회를 이렇게 전했다. “나는 13년 전에 상하이를 떠날 때 홀로 南市(남시·남상하이) 길가에서 미국 피치 부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새벽에 출발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렇게 여러 동포를 대할 때 내 가슴은 구름과 같이 뭉게뭉게 한다”고 심정을 드러냈다. 백범은 또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 총통 등 중국 정부로부터 이례적이라 할 성대한 송별회를 몇 차례 받았음을 밝혔다. 공항 현지에 중국 정부 관료들이 대거 출영해 임정 요인들에게 예우를 갖췄다(‘전시장(대리)출영-중국 각 신문기자도 동행’ 기사)고 신문은 보도했다.

현장 기자는 별도의 기사로 ‘임시정부 요인 인상기’라는 글을 썼다. “우리가 늘 갈망하던 김구 선생이 그 雄姿(웅자)를 나타내시었다. 우리들 예상은 과거 30여 년간이나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셨고, 다시 독립운동에 그 전부를 바치다시피 하였으니만큼 그의 기질과 성격이(인상으로 봐서) 날카롭고 한 번 호령을 하면 태산이 무너지고, 호랑이가 도망칠 것으로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생각하였으나 모름지기 첫인상은 몹시 온화하다기보다는 너그러운 慈父(자부)와 같이 친밀성을 갖게 했다. 말씀은 은은하시고,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한쪽 구석에서는 좀처럼 무한한 위엄성을 지니고 계셔서 감히 그 앞에서는 모두가 없어질 듯했다. 몸은 뚱뚱한 편이고 키는 보통, 얼굴은 약간 검은 편으로 그 골격이 커 보이시니 정말 혁명가적 타입을 가지셨다.”

김 주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의 감격적인 상하이 도착 장면은 앞서 언급된 사진 한 장과 임정 관계자들의 기억에 의존해서만 전해졌다. 언론이 현장에서 전한 기사로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광복군 연구>(일조각)를 펴내는 등 한국광복군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김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후 귀국하기 전에 들른 상하이의 행적은 홍구공원 환영 사진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대한일보> 자료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의 상하이 교민사회를 집중 연구해온 김광재 박사도 “<대한일보>의 기사는 임정 요인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 상하이 교민사회의 생활상과 정치·사회적 여건을 규명하는 데도 중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백범, 개천절에 성조 한배검에 후손이 불초하다고 탄식
<대한일보>는 그해 11월 7일 광복 후 처음 맞이한 개천절(당시 개천절 기념행사는 음력 10월 3일을 기준으로 거행)에 참석한 김 주석의 강연문 전문(226쪽 하단 사진·<월간중앙> 홈페이지에 전문 게재)을 3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김 주석은 개천절 강연에서 광복군이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연합국의 승리에 힘입어 조국 광복을 맞이하게 된 점을 극히 안타깝게 여기면서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위해 임정 요인이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도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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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홍구공원 거사를 앞두고 촬영에 응한 윤봉길 의사.

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한배검을 민족의 시조로 표현했다. “…우리의 聖朝(성조)인 한배검은 4277년 전 이날에 우리의 조국을 세우셨습니다. 한배검은 배달겨레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 홍수와 맹수와 싸웠습니다. 前石左石上下(전석좌석상하)로 위협을 주는 대자연과도 싸웠습니다. 우리의 한배검은 이 모든 악렬한 환경을 정복하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희생하였으며, 무수한 인간의 피와 땀을 흘리셨습니다. 우리 한배검의 자손은 자못 불초하였습니다. 조상에게 불효하였으며, 민족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발자취는 반도(半島) 밖을 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대에 와서는 이 조그마한 반도나마 외국에 잃고 말았습니다. 과연 우리의 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선열들은 이것을 씻어버리기 위해 외적과 악전고투하였습니다. 그들의 피는 우리 조국의 강토만을 물들인 게 아니라 멀리 만주 벌판과 중국 평원도 또한 물들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우리는 하등의 드러난 공적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서 “우리의 손으로 조국을 해방하지 못하고 필경 동맹국의 손을 빌려 해방하게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또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임정 요인들이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희생을 감내할 것이며, 민족이 통일하고 단결하지 않으면 전도가 위험하다고도 호소했다.

김 주석의 광복 후 첫 개천절 강연문도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라고 한시준 교수는 확인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임정은 광복 후 귀국에 앞서 임시정부 관련 문서를 충실히 챙겼다. 하지만 미 군정이 임정을 대표성 있는 단체로 인정하지 않는 데다 1949년 김 주석이 흉탄에 숨을 거두면서 임정 관련 자료가 제대로 검토될 겨를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임시정부 조사과장을 역임한 관계자에게 문서 보관업무가 맡겨졌으나 한국전쟁 당시 분실돼 지금도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 임정 관련 공식 문서가 거의 없는 데다 광복 후 상하이 시절에도 그렇게 꼼꼼하게 기록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기에 귀국 전 임정 관련 공식 자료는 드문 편이라고 한 교수는 말했다.

상하이 도착 후 백범은 윤봉길 의사 동상을 건립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도 처음 밝혀졌다. <대한일보> 1945년 11월 13일자(226쪽 위 사진)는 “10일 김구 주석께서는 교민회 회장과 총무로부터 교민 조직 경과 현상과 보선 결과를 청취하신 후 다음과 같은 훈시를 주셨다. (…) 6. 윤봉길 동상은 교민회를 중심으로 만들라. 장 위원장(장제스 총통) 동상도 건립하는 것이 좋으나 일개 단체가 할 게 아니므로 중국 내 각 지방 (한인) 교민회가 합치하여 하는 것이 가하다”는 내용을 실었다.

백범 홍구공원에 윤 의사 동상 건립 지시
상하이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는 불가분의 관계다. 1932년 윤 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를 대거 폭사케 하는 의거를 결행함으로써 임정은 중국 정부로부터 합당한 예우를 받기 시작했다. 윤 의사 의거 전에는 임정이 중국 정부로부터 이렇다 할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의거 이후 중국 정부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교민사회는 김 주석의 요청을 제대로 실행해내지 못한 듯하다고 상하이 교민사회를 연구해온 김광재 박사는 말했다. 홍구공원에 윤 의사 흉상이 세워진 것은 2003년이다. 당시 홍구 인민정부와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가 루쉰공원 내 ‘매정(梅亭·윤 의사의 호 매헌을 기린 정자)’에서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 개관식’을 거행할 때 비로소 흉상도 건립됐다.

9월 17일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창설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중국의 각계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결성됐다. 광복군 관련 자료 역시 대부분 유실되다 보니 당시의 규모나 운영 상황을 담은 기록이 많지 않다. 광복 후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광복군 관련 자료를 다수 국내에 들여왔으나 이 역시 한국전쟁 당시 이 장군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 사라졌다고 한시준 교수는 전한다. “아마 인민군이 대거 수집해간 게 아닌가 추정된다”고 한 교수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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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5일 광복군 제2지대원 5명이 적진으로 출전하기 전에 이뤄진 선서식. 광복 직후의 광복군 훈련 현장 르포 기사가 <대한일보>를 통해 처음 세상에 소개됐다.

<대한일보> 1945년 10월 16일자는 광복 직후 광복군의 모습을 전했다. 기자가 직접 광복군 훈련장을 찾아 현장을 스케치하고 관계자 인터뷰도 했다.

다음은 ‘광복군방문기-운동장에서는 앞으로 가읏, 사내에선 피아노 소리’(228쪽 오른쪽 사진) 제하의 기사다. “(…) 15일 오후 2시 날씨는 몹시 청명하여 기자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중주로(일본인 제6국민학교) 광복군 숙사를 찾았다. 출입구에서 낯선 중국군에게 통과를 허가받아 먼저 운동장에 들어서니 우리의 늠름한 병정들이 강렬한 태양볕에 웃통을 벗고 살을 새까맣게 태워가며 씩씩하게 ‘앞으로 가읏(行進)’ ‘그만 섯(止)’ ‘우로도랏(右向)’ ‘좌로도랏’(左向) ‘쉬엿(休)’을 붙이며 맹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군인의 호령이로구나 하고 새로이 듣는 그 규율적 음조는 어딘가 무거운 힘의 압착을 가슴에 쌓아놓는 듯했다. 휴식시간이 돼서 바람결에 가느다란 음률이 새어나오니 그것은 억센 사나이들의 감정을 부드럽게 수놓는 것이 오매 宿舍(숙사) 내에서 애국가의 피아노 소리였다. 그 노래는 다시 동지가인 듯 더욱 격노한 물결같이, 광란의 성정같이 들려지는 것이, 이 나라의 병정들아, 이 나라의 백성들이여, 우리는 나라를 세우는 지사가 되여지더이다라고 외치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10월 17일자 광복군 르포 기사는 일문일답으로 이어진다.
“응접실에 들어가 학도병 몇 사람과 아래와 같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문: 지금 가진 이름은 무언가?
답: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상하이훈련총대라고 부른다.
문: 학도병을 비롯해 광복군 총인원은?
답: 학도병은 백수십 명, 장교는 십여 명, 광복군을 모두 합치면 800여 명에 달할 것이다.
문: 식량 문제는 걱정 없나?
답: 이제부터가 문제다. 아직 별다른 방안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문: 내부 조직은 어떻게 돼 있나?
답: 완전히 정비됐고, 이를 총괄할 최고책임자를 기다리고 있다. 즉 제1지대장·제3지대장에 명령이 있으면 그 명령계통을 따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당초 제1지대 제2구대에 입대를 하였으니 여기에 대한 순서가 있는 것을 말해둔다.
문: 훈련의 요지는 어떠한가?
답: 첫째 군사적 기초, 둘째 체육을 향상하는 운동경기, 셋째 정신적 훈련으로 국사와 국어 등의 강좌가 있다.
문: 별다른 연구조직은 없는가?
답: 학술강좌 연구회가 있어서 그 목적은 ‘회원으로 하여금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게 하여 독립 신한국 건설에 필요한 학식·교양을 갖추는 것이고, 연구 과목은 사학·경제·정치·문예·자연과학으로 돼 있다.
문: 오락으로는 어떤 걸 하나?
답: 도서관·운동경기·군악대를 편성했다.
문: 시가지로 외출은 자유로운가?
답: 공무 외에는 금지돼 있다. 그러나 진찰·목욕·반찬구입 등은 무방하다.
문: 하고픈 말은 없는가?
답: 우리는 당시 각처에서 모여들 때 목이 터지도록 우리의 임무를 외쳤고, 다시 우리의 그 뜻을 갖추는 데 굳세게 맹서했다.”

이에 앞서 9월 26일자에서는 광복군이 해군을 창설했다고 보도했다. “광복군이 해군을 창설·운용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려졌다”고 김광재 박사는 말했다. ‘海軍兵隊新設(해군병대신설)코 訓鍊(훈련)을 開始(개시)’ 제하의 기사다. “광복군 소속인 해군병대 2백여 명 우리의 병정으로 조직하고 실제 군사교육의 훈련을 개시하고 있다고 한다. 同隊(동대) 趙奧洙(조오수) 씨와 金益泰(김익태) 씨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말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難事(난사)가 生起(생기)드래도 이것을 이기고 신한국의 꿋꿋한 軍人(군인)이 될 覺悟(각오)로써 건전한 理念(이념)을 세우고 있다’고 굳은 힘줄을 세워 言明(언명)하였다.”

광복군의 여성 인권의식 뚜렷해
국가 기록원에 따르면 임시정부 군사력으로서의 해군 관련 언급은 1919년 9월 한성정부·노령정부·상하이정부가 하나의 정부로 통일됨에 따라 헌법의 개정과 정부기구의 개편이 진행되면서 처음 나온다. 이때 임시정부의 직속 독립군 창군 준비가 시작된다. 1919년 9월 11일 공포된 임시헌법에서는 제10조 2항에 “병역에 복하는 의무”와 제15조 2항에 대통령의 직권으로 “육·해군을 통솔”, 그리고 제36조에 국무원의 의정사항으로 군사에 관한 사항을 명시한 정도다. 이후 해군의 존재가 따로 규명된 일이 없으며, 1940년 9월 17월 충칭에서 창군된 이후에도 해군 관련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밖에 <대한일보>는 10월 2일자 기사에서 광복군이 패망한 일본군으로부터 한국인 병사 608명을 접수했다고 보도하는 등 광복 직후 상하이에서 광복군 擴軍(확군) 활동을 간간이 전하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모은다.

<대한일보>에서 1946년부터 한 달에 3회 발행하는 순간지로 제호를 바꿔 발행되기 시작한 <대한신보>는 1946년 1월 첫 호(상순·230쪽 사진)에는 다소 이색적인 안내기사를 올렸다. ‘警衛隊(경위대)에서 ‘女子韓警(여자한경)’을 모집’이란 기사를 보자. “光復軍總司令部(광복군총사령부) 警衛隊(경위대)에서는 ‘한경’으로 女子隊員(여자대원)을 募集計劃(모집계획)이라 한다. 卽 女人(여인)들의 몸을 수색할 때 男子(남자)보다 ‘女人韓警(여인한경)’이 效果的(효과적)이겠다는 必要(필요)에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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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장군의 시가 실린 <대한신보> (왼쪽 사진). 광복군에서 여경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기사.

학계에 따르면 당시 상하이 교민사회는 마약이나 아편을 취급하고 윤락업을 일삼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를 일러 不正業者(부정업자)라 하는데 현지에서 물의를 빚고 지탄을 받는 등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대한일보>는 1945년 9월 16일자 머리기사에서 ‘不正業者에게 경고!/금후로는 잔호한 처단을 한다’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당시 상하이에 들어와 있던 광복군 이소민 대장의 담화문을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다. 기사는 “중국에 있는 일부분의 부정업자로 인해 조선인은 중국의 민족 생존을 파괴하는 최악의 인종이란 낙인을 받게 되어 있다”면서 “앞으로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는 ‘민족의 적’으로 간주하고 단호한 처단을 내리겠다고 이소민 대장은 담화에서 밝혔다”고 전했다. 사흘 뒤인 19일에도 ‘경고한다, 속히 그 생활을 청산하라’는 이소민 대장의 주의 환기문이 보도됐다.
이런 조치의 일환으로 마약을 운반하는 여성을 단속하는 요즘으로 치면 여군·여경이 필요했다.

이범석 장군 詩 3편 첫 공개
<대한신보>에는 이범석 장군 소개도 나온다. 상하이로 진주한 광복군을 이끈 이 장군에 대해 이 신문은 1946년 정월 중순호 ‘三白(삼백)으로 三千(삼천)의 왜병(倭兵)을 잛어’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光復軍參謨長(광복군참모장) 李範奭將軍(이범석 장군)이 來滬(래호, 滬는 상하이의 약자)하셨다. (…) 韓國光復軍(한국광복군)을 맨들어 처음 참모장이 되셨다. 同將軍(동장군)은 祖國語(조국어=국어) 밖에도 俄(아=러시아), 獨(독), 中(중), 日(일) 四國語(4국어)를 말하시며, 어름같이 차거운 理性(이성)을 함께 지니신 그는 불같은 熱情(열정)을 갖고도 多情多恨(다정다한)한 분으로 詩作(시작)에는 專門詩人(전문시인)의 낯을 붉히게 하는 그야말로 文武兼備(문무겸비)한 분이시다.”
같은 날짜에 이범석 장군의 시가 실렸다. ‘李範奭將軍(이범석장군)의 詩(시) 세 首(수)’ 제목으로 발표된 시는 다음과 같다.

“(一)
내 生明의 草原에서는
永遠히 黃昏과 가을이다
나도 萬一 꽃피는 봄
해돋는 餘命이 잇다면
그는 아마 最後의 무덤 속에서
혹 찾을까 하노라

(二)
黃昏의 붉은 놀 불태우는
秦 나라 古城
까마귀 검은 물결 흐른다
하늘 저 쪽으로
異域의 歲月은
無情도 하고나
記憶에 똑똑하든 故鄕
갈사록 흐릿하네

=註
그가 西安에서 지은 것. 겨을이면 西安에는 까마귀가 하늘을 꺼멓게 덥어 더욱더 뜻품은 나그네의 마음을 서긆게 해준다.

(三)
눈 밑에 잠든 荒野
저녁바람 쌀쌀한데
말없는 東쪽하늘엔
별 한 개 반짝인다
가리라 저기저
노을 속까지
懊惱의 世上 떠나
理想의 나라 찾아
東興은 잠자는지
등북조차 않뵈는데
개소리 아득하다
짖는 곳이 어드메냐

=註
東興은 滿洲東興. 部下들의 식량을 생각하고 白頭山原始林 속으로 노루사냥 갔다가 종일토록 노루 한 놈 잡지 못하고 도라올 때 東興 앞 언덕 위 東興城을 내려다보며 지은 詩다. 바야흐로 눈보라 펄펄 날리든 때.(박영만 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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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6일부터 연말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된 교민 신문 <대한일보> 사본.

여기에 나오는 박영만 씨는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로 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장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졌다.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 측은 “이 장군이 시와 글씨에 능했다고 그의 부관을 지낸 고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전한 바 있다”고 말했다.

<대한일보> <대한신보> 입수 경위
<대한일보>는 1945년 9월 6일 중국 상하이에서 타블로이드판 2쪽짜리 국한문 혼용 교포 신문으로 창간됐다. 나라를 되찾는 감격과 희망에 한참 부풀어 오를 즈음 중국 내 한인사회의 여론과 이익을 대변해주는 매체의 등장이었다. 당시 중국 당국은 이 매체의 정기간행물 등록(등기)을 허가하지 않았다.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와 상하이시 당안관(문서보관소)이 공동으로 작성한 ‘중국지역한인단체관계사료 휘편’에 따르면 박거영·김극해 등 <대한일보> 발행인단은 1945년 10월 3일(9월 6일 창간호가 발행되고 거의 한 달이 지난 시점) 상하이시 정부에 공문을 보냈다. 한문판(韓文版)인 <대한일보>를 발행해 한교(韓僑·한인 교포)의 진로를 밝히고, 한중 국민의 우정을 증진시키고자 하므로 등기 허락을 요청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 요구를 검토한 상하이시 정부 사회국은 ‘한교 주관의 여러 단체는 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제한된 범위 내에서 활동을 진행할 수 있으며, 신문은 중요한 선전도구로서 한국인이 자체로 발행한 간행물은 신중하게 심사를 해야 하며, 명문으로 활동 범위를 규정하기 전에는 허락하지 말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상하이시 정부는 1945년 11월 8일 ‘<대한일보> 창간 요구는 허락하기 곤란하다’는 내용의 지시문을 <대한일보> 측에 보냈다. 결국 <대한일보>는 당국의 창간 허가를 받지 못한 채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 박사는 교민 신문인 <대한일보>가 이번에 빛을 봄으로써 광복 직후 중국 교민사회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계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광복 후 상하이 한인사회 연구는 주로 중국 정부의 자료가 많아 그에 의존했다는 게 김 박사의 설명이다. 당시 중국의 입장에서 한인 교포는 치안 확보 차원에서 단속과 관리 대상이자 조속히 한국으로 보내야 할 대상이었다. 김 박사는 “그래서 중국 측 자료에는 당시 상하이 한인사회가 부정적으로 그려지게 마련인데 이번에 교민사회 내부 동향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한인사회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번에 입수한 <대한일보>와 <대한신보>는 발행인의 한 사람이자 상하이 현지 기자로 활동한 박거영(시인, 1916년 함남 원산 출생, 1943년 중국 상하이 국민대학 수료 후 상하이에서 <대한일보> 발행) 씨가 보관해왔다. 그는 오래전에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에게 사본(대한일보)과 원본(대한신보)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김구 주석 건국기원절 연설문 전문>
(1945년 11월 7일 연설문. 대한일보 1945년 11월 14일자 등 3회 연재)
여러분 父母兄弟姉妹에

우리는 오늘에 四千二百七十八年의 건국기념절을 맞게되였읍니다. 이것은 祖國의 解放된 後에 우리가 맞는 첫 慶節입니다. 이 慶節을 우리가 歸國하는 途中에 우리 臨時政府의 誕生地인 上海에서 맞게될 때에 우리 臨時政府同人은 非常히 愉快함을 느끼며 또 非常히 興奮됩니다.

우리와 聖祖 한배검은 四千二百七十七年전 이날에 우리의 祖國을 세우셨습니다. 한배검은 배달겨레의 永遠한 自由와 幸福을 爲하야 洪水와 猛獸와 싸웠습니다. 前後左右上下로 威脅을 주는 大自然과도 싸웠습니다. 우리의 한배검은 이 모든 惡劣한 環境을 征服하기 爲하여 無數한 生命을 犧牲하였으며 無數한 人間의 피와 땀을 흘리였습니다. 우리의 한배검은 그의 자손인 우리를 위하야 그와 같이 偉大한 努力으로써 廣闊한 天地에서 自由롭게 살만한 살림살이의 터를 便安하고도 굳게잡아노았습니다. 그때의 한국사람은 半島안에 답답히 갓쳐있지않았습니다. 우리의 뛰놀던 땅은 자못 넓어스며 우리가 呼吸하는 공기는 新鮮하였읍니다. 그러나 한 때의 우리 한배검의 子孫은 자못 不肖하였습니다. 그리하여 祖上에게 不孝하였음며 民族에게 罪를 지었습니다. 그 結果 우리의 발자취는 半島밖을 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畢竟 우리 代에 와서는 이 조그마한 半島나마 倭寇에게 잃고말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임니까. 과연 우리의 죄가 얼마나 겄읍니까!
여러분의 부끄러음을 알고 있든 우리의 先烈들은 이것을 씻어버리기 爲하야 倭敵과 惡戰苦鬪하였습니다.

그들의 피는 우리의 祖國의 疆土만을 물들인 것이 아니라 멀리 滿洲벌판과 中國平原도 또한 물들였던것임니다.

至今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不肖한 本人도 아직 先烈의 뒤를 따라가지는 못하였지만 先烈의 遺志를 밧들어 三千萬 同胞의 熱望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爲하여 四五十年間을 奮鬪한 者의 하나임니다. 우리 臨時政府를 領導하는 領袖들과 韓國光復軍을 領導하는 領袖들도 다 그 中의 하나임니다. 그러나 우리는 何等의 드러난 貢獻이 없는 것은 부끄러워 함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祖國을 解放하지 못하고 畢竟 同盟軍의 손을 빌어서 解放하게되였음니다. 우리는 우리를 爲하야 多大한 努力을 한 同盟國에 向하야 無限한 感謝를 드리는 同時에 우리의 親善하는 友邦과 우리의 尊敬하는 先烈에 對하여 또한 깊이 깊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祖國의 解放된 後에 처음 맞는 建國紀念節을 當하여 徹底하게 悔改하여야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悔改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사람中에는 우리가 道德上으로 느끼는 허물보다 더 큰 罪惡을 지는 자가 많을 줄 압니다.

우리는 비록 큰 功績을 내지 못하였다 할 지라도 오늘까지 祖國의 獨立과 民族의 自由를 쟁취하기 爲하여 努力하였음니다. 그러나 우리사람들 中에는 民族에게 害毒을 주며 祖國의 獨立을 妨害한 者도 적지 않을 줄 압니다.

其中에도 過去의 地位를 팔며 惑은 倭敵에게 등을 대고 그놈들에게 아첨하기 爲하야 民族의 敗類가 된 者의 罪惡은 容恕하기 어려운줄 암니다. 여러분 이날을 當하야 우리는 우리를 굽어 살피시는 한배검의 靈魂앞에서 太極旗를 向하여 굳게 盟誓하고 우리의 罪惡을 全部 깨끘하게 싳어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祖國의 完全한 自由를 獲得하기 爲하여 共同 奮鬪합시다. 正義를 擁護하며 世界의 和平을 實現하기 爲하여 共同努力합시다.

여러분 우리 臨時政府의 同人의 入國하는 目的도 祖國의 完全한 獨立과 民族의 完全한 自由를 獲得하려함에 있습니다.

이 目的을 達成하기 爲하여 나는 奮鬪하였읍니다. 나는 아직도 完成하지 못한 이 目的을 完成하기 爲하여 餘生을 바치게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歸國하는 臨時政府同人이 다 그러한 決心이 있는 것임니다. 이 目的을 完成하기 爲하여는 個人의 資格으로 들러가도 좃습니다. 우리는 過去보다 더 큰 犧牲이 있더라도 사양치 아니하겠습니다. 우리 目的과 決心의 이와 갗이 一致하므로 우리는 굳게 뭉쳣습니다. 이 앞으로 우리가 祖國의 獨立을 完成할 때까지는 完全한 獨立을 實現하기 爲하여 個人도 犧牲하고 黨派도 犧牲할 覺悟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政府가 統一되지 못하고 人民을 어떻게 統一하겠읍니까. 統一할 줄 모르는 民族이 어터케 統一된 國家를 建設하겟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運命은 우리가 統一되고 못되는 데서 決定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南北의 統一된 祖國을 願하심니까. 그럿다면 여러분 自身부터 統一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은 果然 名譽로운 獨立國 人民이 되기를 願하심니까. 그렇거든 여러분 自身부터 統一하십시오. 民族이 統一할 줄 모르고 제 힘으로써 團結한 生活을 할 줄 모르면 그 民族의 前途는 危險합니다.

우리는 남을 원망하기에만 熱中하지말고 제 自身의 進步를 求하여야 하는 것임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안으로 우리 民族自體의 統一을 求하고 밖으로 同盟國에 對하여 親善을 圖謀하여야함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方法으로써 自由幸福의 統一된 新民主國家를 建設할 수 있는 것임니다. 오늘의 建國紀元節을 맞을 때에 나는 四千二百七十七年전에 우리 한배검이 우리를 爲하여 세워주신 것과 같은 그 아름답고 偉大한 獨立 自由 幸福의 新民主國家를 우리의 손으로 建設하기 爲하여 여러분 앞에 나의 所感을 大綱 告하는 것입니다.

祖國獨立의 完成과 여러분 同胞의 健全한 奮鬪를 빌고 이만 그칩니다.



박성현 기자 p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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