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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에 法교과서 내민 판사 "약속 없던 돈 줘도 유죄"
현명한 재판장... 돈주기로 약속했는지는 재판의 쟁점 아냐
 
조선일보 기사입력 :  2011/10/1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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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에 法교과서 내민 판사 "약속 없던 돈 줘도 유죄"

입력 : 2011.10.18 03:11 / 수정 : 2011.10.18 08:44
 

[곽노현 교육감·박명기 교수 첫 공판… 김형두 재판장, 핵심 쟁점 먼저 치고나가]
법학교수 출신 곽노현 "(선거비 보전해주겠다는 사전약속 있었다는 것)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法해석 포문 연 판사 "사전약속이 없었다면 죄가 안된다는 식으로 피고인 오해하고 있는데…"

17일 오후 3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카키색 수의를 입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과 하늘색 수의를 입은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가 차례로 법정에 들어섰다. 두 사람의 오른쪽 가슴에 수인(囚人)번호가 선명했다. 검사의 공소 사실 설명이 끝나고, 재판장인 김형두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장이 박 교수에게 먼저 모두(冒頭) 진술 기회를 줬다.

"박명기 피고인, 할 얘기 있으면 하시죠." 박 교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두 진술 기회는 곽 교육감에게 넘어갔다. "지독한 오해의 수렁에 빠져 있지만 내 양심이 알고 하늘이 알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선거 비용 보전 사전 약속을) 몰랐습니다." 곽 교육감이 말을 이어갔다. "2억원이 어떻게 선의의 부조(扶助)냐는 수군거림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17일 서울 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곽노현 교육감·박명기 교수의 첫 공판이 열렸다. 김형두 재판장(왼쪽 맨 위)의 질문에 곽노현 교육감(아래 오른쪽 두번째)이 마이크에 대고 답하고 있다. 곽 교육감 옆 테이블에는 같은 수의 차림의 박명기 교수가 앉아있다. /박상훈 기자 ps@chosun.com
듣고 있던 박 교수가 "따로 준비하지 않았지만…" 하며 발언을 신청했다. "강경선 교수(곽 교육감의 친구·불구속 기소)에게 도와주려면 많이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강 교수는 인격자인데 미안하고… 곽 교육감이 직무 수행을 못 하게 돼 죄송합니다. 곽 교육감이 마련한 돈을 받은 게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재판장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피고인들의 모두 진술이 끝나자 재판은 본격적인 공방으로 접어들었다. 곽노현·박명기 두 사람이 기소된 선거법 232조 1항 2호가 핵심 쟁점이었다. 이 조항은 선거가 끝난 후 후보였던 사람에게 대가성 금품을 주는 행위를 처벌하게 돼 있다.

공방에 불을 붙인 건 재판부였다. 김 부장판사가 "변호인, 피고인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라며 미리 인쇄해 둔 국내 선거법 교과서 3종과 일본의 선거법 교과서 1종,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문을 검사와 변호인, 피고인에게 돌렸다. 변호인들이 피고인들의 모두 진술이 있기 전에 "(선거 당시 금품 수수) 약속이 없었다면, 나중에 돈을 줬어도 대가성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 뒤였다.

▲김 부장판사: "제시한 교과서들과 판례 모두 '후보 사퇴의 동기가 이익을 준 것과 무관하더라도 추후 대가를 제공한다면 유죄가 성립한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재협 변호사(박 교수 변호인): "적어도 투표 종료일(작년 6월 2일)까지 이익 제공 약속이 있어야 232조 1항 2호를 적용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김칠준 변호사(곽 교육감 변호인): "검찰은 사전 합의 부분에 대해 영장, 공소장에 정확히 적지 않았는데 설명해주십시오."

▲송강 공안1부 검사: "검찰은 교과서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검찰과 변호인이 설전(舌戰)을 이어가자, 김 부장판사는 "(재판에서) 교과서대로 해석하겠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사전 약속이 없었다면 죄가 안 된다는 식으로 변호인들이 법 조항을 해석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핵심 쟁점은 2억원에 대가성이 있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재판부가 법정(法廷)에서 법학 교과서를 피고인(변호인)과 검찰에 제시하는 것은 보기 드문 장면이다. 피고인 가운데 곽 교육감과 강 교수는 법대 교수이기도 하다. 유·무죄는 물론 법 해석론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이 과열되는 것을 막고, 핵심 쟁점을 미리 환기하려는 재판부의 의도로 해석됐다.

2시간 30분가량 진행된 재판이 끝나자 박 교수는 강 교수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러기 위해선 곽 교육감 앞을 지나가야 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음 달 1일 열리는 다음 재판에서는 증인신문이 시작된다.


[키워드] 곽노현·박명기 첫 공판대가성 금품 수수곽노현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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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현명한 재판장

  • 기사
  • 100자평(12) 입력 : 2011.10.18 23:03
     
    2002년 3월 수원지법 210호 법정 주변은 소환장을 받고 온 인근 아파트 주민 1087명으로 북새통이었다. 주민들은 아파트 근처 공사장 때문에 어린이 등굣길이 위험하다며 공사를 방해해 건설사로부터 방해 금지 가처분신청을 당한 처지였다. 법정엔 200명밖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먼저 입장한 사람들이 심문을 받고 나오기를 차례로 기다려야 했다. 주민들은 "왜 사람들을 모두 불러 이 난리를 치르느냐"며 흥분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장이 "좁은 법정에 여러분을 모셔 죄송하다"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소환장을 보낸 것은 주민 한 분 한 분에게 충분한 발언기회를 드리려는 뜻입니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의견을 다 듣겠습니다." 주민들은 잇달아 손을 들고 나와 공사판 주변 통학로의 위험성을 호소했고 재판장은 주민 의견을 일일이 받아적었다. 주민들은 어느새 화가 풀렸고 재판은 무사히 끝났다. 법조계에서 재판장의 현명한 진행 사례로 꼽히는 일화다.

    ▶능란한 재판장은 말 한마디로 방청객이나 재판 당사자들을 진정시킨다. 재판 쟁점을 분명히 부각시켜 검사와 변호인이 엉뚱한 문제로 설전을 벌이는 것을 막기도 한다. 전두환 정권 때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하다 죽인 경찰관 5명의 재판정에서 방청객들이 경찰관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재판장은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도 질서 있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 한마디는 오히려 방청객의 고함과 욕설을 부추겨 법정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엊그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첫 재판에서 재판장이 "변호인과 피고인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검사와 곽 교육감에게 자료를 돌렸다. 법률학 교과서의 선거법 해설이었다. 재판장은 "사전 약속을 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후보자 사퇴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기만 하면 범죄가 성립한다고 돼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간 곽 교육감은 "(경쟁 후보였던)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후보 사퇴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고 나중에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선의로 줬을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재판장은 그런 곽 교육감에게 "약속을 했는지는 재판의 쟁점이 아니니 그런 걸 갖고 다투지 말라"는 언질을 준 셈이다. '사전 약속' 여부를 놓고 양측이 끝없는 설전을 벌이는 걸 막으려는 재판장의 센스가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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