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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호지명도 머리맡에두고 애독했던 다산의 목민심서
집이 가난할때 어진 아내를,나라가 어지러울때 어진재상이 그리워진다.
 
김 지 형 (고려대 토목환경공학과 교수) 기사입력 :  2008/06/28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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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의 호지명:편집부

월남의 호지명도 머리맡에두고 애독했던 다산의 목민심서


입력시간 : 2003. 11.11. 03:13



다산에 관한 책 몇 권/ 김 지 형


김 지 형 (고려대 토목환경공학과 교수)


▲    편집부



1. {목민심서(牧民心書)}, 창작과비평사, 창비신서 20, 25, 32, 58, 69, 71 1978-1985)

2. {다산 정약용 시선(茶山 丁若蓉 詩選)}, 평민사, 한국의 한시 17, 1986

3. {유배지(流配地)에서 보낸 편지}, 창작과비평사, 창비교양문고 17, 1991


소위 '새천년'을 눈앞에 둔 현시점이라 지상의 여러 곳에서는 지난 천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함께 새천년을 전망하는 안목들이 여기 저기에서 보인다. 그것이 때로는 장사를 목적으로 하는 선전용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나름대로 현실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세상읽기의 시도이기도 하다. 지난 천년이라는 시간을 돌아보는 것은 애당초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넘고, 또 새로운 천년을 전망하는 것도 너무 주제넘은 일이다. 그래도 이즈음에 우리 역사 속에 살았던 사람 하나 라도 다시 읽어 보는 것은 순리와 희망을 목격하기보다는 많은 혼란과 불법을 보기가 일쑤이고 절망과 혼돈을 가슴에 담는 경우가 적지 않은 오늘의 우리에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리라.


벌써 오래된 이야기라 어디에서였는지 분명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월남의 호지명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머리에 두고 읽었다는 글발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외워서 이름 정도를 알고 있었던 그 책이 어느 인간에게 그렇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내 나라 사람을 남이 그렇게 아끼는데, 내가 모른다는 것이 부끄럽고 해서 {목민심서}라는 것을 손에 들어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 책은 나같은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서 읽을 그런 책은 아니었으나 읽어본 모든 구절구절에서 그가 역사와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진실과 애정의 깊이가 그대로 우러나오는 듯 했다. 그 이후로 그의 시와 산문들을 읽어보면서 그는 어느새 나의 가슴에 가장 뚜렷이 남아있는 사람이 되어 갔고 또한 여러 사람에게 읽기를 추천하는 이가 되어왔다.

▲   다산 정약용선생 :편집부



다산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긴 이야기를 달지 않아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터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는 것은 읽은 이에게 무례할 것이고, 그렇다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마당에 그를 소개하지 않음도 또한 무례한 일이니, 어쩌랴? 그 흔한 무슨 출판기념회니, 회갑잔치니 하는 곳에서도 소위 '선생님의 약력'을 길게 소개하는 것을 보면 보통 사람들의 인내심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되는 성싶으니, 그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때인 1762년에 태어나 1836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나보다는 꼭 200년 선배인 셈이고, 햇수를 헤아려보면 흔히 옛부터 오기가 어렵다는 칠십을 넘어 사셨으니 당시로는 꽤나 장수를 하신 셈이다. 8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14살에 결혼을 하였으며 19살에는 첫 딸을 얻었으나 닷새 만에 잃기도 하였다. 21살에는 과거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큰 아들 학연을 얻었다. 22살 무렵에는 천주교에 접하게 되고, 나이 28에는 첫 유배를 가게 되는데 유배를 떠난 지 11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한 지 6일 만에 싱겁게 풀려나기도 했었다.

나이 30에는 수원성 공사에 참여하여 기중기를 사용하여 지금의 고등학교 국사책에 나오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32살에는 아버지를 잃고, 나이 40이 못된 39세에는 전라도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가 학자로서 촉망받았고, 공직에 나아가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옮겨보는 기회도 가졌던 것은 젊은 시절의 잠깐에 불과했다고 할 것이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마침 {목민심서}를 완성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가니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다산이 강진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회갑에는 지금은 복잡하게 배타고 가는 금강산 관광도 다녀오셨다고 하니 그는 매우 강건한 육신을 가졌던 듯 하다. 이 정도로 그의 약력을 살펴두고 그의 책 몇 권을 구경하도록 하자. 그에 대한 읽을거리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미 나의 책상머리에 자리잡은지 오래된 책들을 손에 잡아 드는 내 게으름에 너그러움 있을진져.


▲    다산 선생 생가: 편집부


목민심서

{목민심서}의 자서(自序)를 보면 그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짐작케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진단하여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 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진구렁을 메우지만 그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라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산은 다스림에 대한 철학과 방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참으로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를 원했던 듯 하다.

다산은 나에 비하면 참 불행한 사람인 듯하다. 내가 듣고 보는 우리 시대의 다스리는 이들은 다산이 살던 때와는 참으로 다르다. 그의 투를 빌어 본다면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늘 스스로 일컫기를 모든 일을 국민과 나라를 위한다고 하며, 가끔씩 주로 눈에 띄지 않게 거두어 들이기도 하나 하나 백성이 수재를 당하거나 하면 액수를 알 수 없는 만큼의 액수를 금일봉으로 내놓는다. 또한 북쪽 땅에 사는 백성들이 여위고 병들었다 하나 그 땅은 다스림이 미치지 못하고 이쪽의 백성들은 여윔을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살이 쪄서 몸관리 하느라 바쁘다. 또한 이곳의 나랏님들은 고운 옷은 입지 않으며 그저 남들이 가져다 주는 조금 비싼 옷을 입는다는 소문이 떠도는 정도에 불과하다.' 태평성대로고!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는 목민에 관한 책을 새로 쓸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 다만 다스리는 분들을 칭송하며 이미 다스렸던 분들을 위하여 국고지원과 성금을 합하여 기념관이나 짓고 송덕비나 세우면 되니 진정 {목민심서}는 이 시대의 책은 아니리라.


하지만 요즘,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니 하면서 검찰은 물론이고 사법제도 전반에 관해 불신을 가지고 독립검사제니 뭐니 하면서 떠드는 일부 몰지각한 국민이 아직도 있다하니 재미 삼아 형조(刑曹)나 한 번 넘겨보기로 하자. 그는 형조에 관한 시작에 '청송(聽訟)의 근본은 성의(誠意)에 있고 성의의 근본은 신독(愼獨)에 있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몸가짐을 규율하는 것이니 … 청송을 물흐르듯 거침없이 하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되는 일이니 위험한 방법이다. 청송을 반드시 하나하나 따져 하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되는 일이니 확실한 방법이다,'이라 하고 있다. 유학자다운 교양의 냄새가 그럴 듯 해보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다할 것' 을 강조하는 바는 재주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 무한경쟁 시대의 아동기초에 불과한 상식과도 맞지 않는다.

▲    편집부


우리나라의 소위 법조계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다 그 어려운 사법고시라는 엄청난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신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니, 굳이 마음을 다하지 아니하고 대충 하셔도 백성을 편안히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들일 것이다. 수사도 척 보면 이미 다 눈치 채시고 거침없이 물흐릇 하실 수 있는 분들이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다산이 조금의 겸손함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진지함의 냄새를 풍기기는 하지만 그는 뉴 밀레니움의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우선 책 이름부터 보자. 목민이라니,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긴가? 백성은 치다니? 칠려면 제대로 쳐야지? 격민는 어떨까? 그리고 또 심서(心書)라니, 이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긴가? 21세기는 마음의 시대가 아니고 몸의 시대가 아닌가? 중요한 것은 인기이고 그럴려면 아무래도 마음보다는 몸이 중요하니 육서(肉書)나 신서(身書)는 어떨까?'


▲   다산 묘소:편집부


몇쪽을 넘기면 아주 재미있는 조목이 나오니 묘지(墓地)에 관한 소송이다. '묘지에 관한 송사는 이제 폐속(幣俗)이 되었다. 싸우고 구타하는 살상 사건이 절반이나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며'라고 시작하여 '우리나라 법전에 실린 것이 또한 한가지로 잘라 정한 조문이 없어서 관(官)에서 하고 싶은 대로 좌지우지하니, 백성들의 생각이 진정되지 못하고 싸움과 소송이 많아지는 것이다'라고 나아간다. 한 시대에 발생했던 소송의 절반이 소위 치정(癡情)이나 금전(金錢)이 아닌 묘지와 관계되어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재미있는, 아주 재미있는 사례일 것이다. 이런 튀는 사례를 하나쯤 잘 갈무리해두었다가 나중에 혹시 필요할 때 튈 수 있는 재료로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예나 제나 역시 관은 '하고 싶은 대로 좌지우지' 하는 집단인가보다. 하기사 요즈음의 관도 마음대로 좀 좌지우지 하기는 하나 모두 다 오로지 백성들을 위함이니 알지도 못하면서 탓하면 이는 스스로 생각없는 백성임을 드러내는 꼴이리라. 높으신 분들의 조상이 편해야, 그 분들도 편하고, 또 따라서 백성들도 편해지는 것이 아닌가? 죽어서도 장군은 넓게 쓰고 사병은 좁게 쓰는 것이 우리의 국립묘지이던가? 그럼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하하하.


그런데 다산의 글을 읽다가 보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들고 있는 참고문헌들의 목록이다. 이 묘지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다산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다음 거기에 대해 자세한 설명과 논거를 드는데, 인용되는 참고문헌들을 보면 {주례(周禮)}, {예기(禮記)}, {안자춘추(晏子春秋)}, {경국대전(經國大典)}, {독례통고(讀禮通考)}, {열하일기(熱河日記)}, {속대전(續大典)}, {임관정요(臨官政要)}, {대전통편(大典通編)}, {명률(明律)} 등등이 나온다. 사실 이런 대목에 오면 나로서는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주눅이 들게 된다. 그가 가지는 역사와 사람에 대한 지극한 마음 앞에서가 아니라 소위 글해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글쓰기의 치밀함과 성실함 앞에서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기사, 나도 꼴난 논문 하나를 쓰면서도 뒷편에 적지않은 참고문헌을 달기도 하고, 수많은 선량들이 다 한두마디씩 남의 멋있는 말들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의 성실함은 무서운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높으신 분들에게야 성실성보다는 재치와 기지, 그리고 적당한 융통성과 눈치가 더 필요한 덕목이니 말이다. 살아남으려면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재빨리 결정해야하는 것이지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실히 생각하고 살펴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산은 시 2500여 수를 남겼으니 양으로만 따져보면, 요즘의 시집 한 권이 70여수 안팎, 많아도 100수가 되지 않는 시를 싣고 있으니, 다산은 요즘으로 하면 시집 30여권을 남긴 셈이 되니 대단한 다작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시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많은 설명과 해설이 있으니 젖혀 두고 이미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도 비켜가면서 한 두쪽 넘겨보기로 하자.


그의 시 '손자 병법을 읽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강개한 마음으로 병서(兵書)를 읽고/ 만고에 한바탕 휘둘러 볼까 했지만/ 이 생각 참으로 지나친 것 같기에 책 덮고 한 번 길게 탄식한다네/ 나 배운 것 자본 삼아 이용할까 두려워서/ 호탕한 선비는 가까이 못하겠네.' 아니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병서를 이용하여 한바탕 휘둘러 볼까 했다니?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그가 역적모의라도 꿈꾸었다는 이야기인가? 아, 그래서 한 때 청와대에 머물었던 전(全)씨도 다산을 즐겨 읽는다고 했던가? 그가 다산의 {목민심서}를 즐겨본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목민심서만이 아니라 다산의 시도 읽었던 모양이다.

▲    편집부


그리고 그는 다산의 우유부단함을 우습게 여기며 호탕하게 휘둘렀고. 하하하. 대단한 놈이로고. 다산은 사회적으로 조선왕조의 여러 체제적인 모순이 가장 극심한 시대에 살았지만, 그는 그 체제의 최고 정점에 놓여 있는 정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체제내적인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또한 그가 깊이 몸담고 있었던 유학적인 세계와 새로이 눈떴던 서학 사이에서 적잖이 고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은 한 바탕 휘두르는 꿈을 접고, 체제 안에 머물렀다, 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세상을 뒤집어보고 싶은 혁명에의 유혹은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온통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체제의 가장 중심에서 가장 바깥쪽으로 쫓겨나 앉았던 다산이 병서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지난 번 고향 가는 길에 동해의 바닷가 휴게소에서 난데없이 단군상을 본 적이 있었다. 단군이란 단어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저 신화 속에 그것도 자주 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신화 속에 있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수염 잘 기른 할아버지 단군상을 만난 것이다. 목이 멀쩡한 단군상을 말이다. 단군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붙어 다니는 요즈음의 논쟁과 사건을 알고 있는 터라 뭔가 조금 황당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산의 시에서 단군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는 것도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그는 '남의 것 본뜨기에만 정신 없으니'라는 시 속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슬퍼라,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 자루 속에 갇힌 듯 너무 외져라./ … 남의 것 본뜨기에만 정신 없으니/ … / 무리들이 어리석어 바보 하나 떠받들고 / 야단스레 다같이 숭배하니,/ 질박하고 옛스런 단군 세상의 / 그 시절 옛 풍습만 못한 듯 해라' 다산이 말하는 바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의 시 속에서 복희씨나, 요, 순 임금이 아닌 단군이라는 이름을 들을 수 있음은 그리 기분 나쁜 일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단군이야기를 하면 마치 미신의 원조 혹은 아주 정신없는 국수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신화와 역사를 구별 못하는 아주 미련한 사람이 되고 마는 세상에 말이다.


그의 시를 계속 읽어나가노라면 '등창으로 죽은 아들을 슬퍼하면서'라는 제목을 가진 시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만날 수 있다. '지난번 모진 괴로움 네가 겪고 있었을 적에/ 애비는 한창 질탕하게 즐기고 있었느니라./ 푸른 물결 한가운데서 장구치며 놀기고 했고/ 술집에서 기생 끼고 놀기도 해었니라.' 자식을 잃고 자신을 탓하는 시이다. 다산은 이와 같이 자신의 덧없었음을 고백하면서 '내 마음 거칠었으니 재앙받아 마땅하지'라고 슬픔을 감싸안는다. 다산의 이와 같은 독백을 듣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내 또한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이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 한 것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무심하고도 냉정하게 다가오는 시련들과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그제사 자신의 미련했음과 어리석었음을 돌아보고 만세지탄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인가?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고통의 정화작용이라 한대나 어떻대나? 하여튼 이런 시들은 정사(正史)를 버리고 야사(野史)를 읽으면서 얻는 재미와 비슷한 것들을 느끼게 하며 위대한 실학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는 평범한 한 아비의 모습과 생활인의 초상을 가진 다산을 그려볼 수 있게 만든다.


다산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그 당시의 사회정황을 그대로 담고 있는 여러 시들을 언급하지 않기는 힘드리라. 애절양(哀切陽)이라는 시에 달아놓은 다산의 말을 들어보자. '이 시는 가경 계해년(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 있을 때에 지었다. 갈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 갔다. 그 백성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고 말했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가지고 관가에 가니, 그때까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내가 울며 호소했지만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 내가 듣고서 이 시를 지었다.' 이쯤 되면 시의 제목인 '애절양'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참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울부짖게 만드는 사회가 어디 그 때 뿐이었으랴.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지 아니하다.

▲  다산 유배지 전남 강진포구:편집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그가 18년을 속세에서 벗어나 몸붙이고 살수 있는 '성은(聖恩)'을 입었던 곳은 전남 강진이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 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아갈 곳은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 외로움 속에서 그는 적지 않은 편지를 흑산도에 유배되어 가 있었던 그의 형님 약전, 그리고 그의 아들들, 제자들에게 보낸다. 사실 남의 편지글을 들여다보는 일은 적잖이 재미있는 일이다. 비록 연애편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자식들에게 보내는 글들의 많은 부분은 자식들에게 몸 단정히 하고 공부 열심히 하며 집안단속 잘 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지난날 내가 술 마실 때 반 잔 이상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다 탁 털어 넣는데 그들이야 무슨 맛을 알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저들 얼굴빛이 홍당무처럼 붉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술 마시는 정취가 있겠느냐?'라고 하며 자상하게 술조심을 당부하기도 하고 또 '권세 있는 요직의 사람들을 찾아가 재판의 일을 청탁하여 더러운 찌꺼기나 빨아먹거나, 무뢰한들과 결탁하여 시골의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속여 먹으며 그들의 재물이나 도둑질하는 일은 모두 첫째가는 간악한 도둑놈들이다.

작게는 욕을 먹고 꾸중듣게 되어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게 되지만 크게는 법에 걸려들어 큰 형벌을 받게 되고 말 것이다' 라고 하며 준엄히 몸가짐을 단정히 할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또한 '너희들의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덕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자포자기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부지런히 책읽기에 힘쓰거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구절들은 우리들의 서랍 한 곳에 잘 간직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 부모님들의 글과 너무나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아마도 다산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리라.


역시 유배 가있던 형 약전에게 보내는 편지는 동기간에 정을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학문의 벗으로서 자신이 읽은 책들과 관찰한 것, 연구하여 알고 깨달은 것 등을 나누는 이야기를 적잖이 한다. 형에게 보신할 것을 권하며 개고기 요리법까지도 자세하게 적어 보내기도 한다. '삶는 법을 말씀드리자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 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 장, 기름, 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박초정의 개고기 요리법입니다.'

또한 다산은 그의 저서「아방강역고(我方彊域考)」에 대하여 '10년 동안 모아 비축했던 것을 하루 아침에 쏟아놓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이 책이 '이름 있는 산에 감추어 두어야'할 정도로 중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비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한탄을 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책에 대하여 그렇게 강한 자신감을 피력할 수 있는 그는 진정 무서운 학자이다. 두려운지고. 그가 {예서(禮書)}에 대한 책의 초본을 보내면서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중에 잘못된 해석이 있으면 조목조목 논박해서 가르쳐 주시고 의당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정밀한 데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다가 더러 갑이다 을이다 서로 우기며 분쟁이 오감으로써 어린 시절 집안에서 다투던 버릇을 잇는 것도 절로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다산의 형제들은 소위 학문이라는 것을 하면서 우기고 분쟁하는 즐거움을 알았던 사람인 모양이다. 흔히들 진정한 토론문화의 결핍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이들의 '즐거움'이란 진정 부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    편집부



그의 편지들에서 느낄 수 있는 다산의 냄새는 참으로 여러 가지이지만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그의 호기심과 실험정신, 그리고 끝까지 궁구하는 자세 등은 참으로 그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는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그는 스스로 '내 나이 스무 살 때는 우주 사이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완전히 그 이치를 정리해 내려 하여 서른 살이나 마흔 살 때까지도 그러한 의지가 쇠약해지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는데 과연 그의 그런 모습은 편지의 여기저기에 나타난다.

가령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주장하며 형에게 보낸 다음 문장은 비록 결론이 틀렸다 할지라도 아주 훌륭한 관찰 보고문처럼 보인다. '이 혜성은 지난 7, 8월에는 두병의 두 번째 별과 서로 밀접히 붙어 있었는데 8월 그믐쯤에는 점점 높이 떠서 점점 서쪽으로 갔습니다. 지금은 초저녁 처음 보일 때에 그 높이가 거의 중천에 가깝고 그 방위는 점점 서쪽에 이르고 있으니, 7, 8월 경과는 아주 같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분명히 별이 움직인 것이지 지구가 움직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풀과 나무로써 색을 내는 것을 실험해본 이야기라든지, 자신의 자식이 닭을 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적어보낸 다음 이야기들은 그가 만사에 가졌던 탐구심, 진지하고도 실험적인 자세를 그대로 보여 준다. '산골에서 산 지가 오래되어 시험삼아 풀잎이나 나무껍질을 채취해다가 즙을 내기도 하고 달이기도 하여 물을 들여보니…, 요즈음 중국에서 나오는 비단이나 지폐에 기이하고도 속기를 벗어난 색깔이 있는 것은 모두 평범한 풀이나 나무에서 뽑아낸 물감으로 물들인 것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농서를 잘 읽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아라. 색깔을 나누어 길러도 보고, 닭이 앉아 있는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 보면서 다른 집 닭보다 살찌고 알도 잘 낳을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 또 때로는 닭의 정경을 시로 지어 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 보아야 하느니, 이것이야말로 책을 읽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양계다.'

▲  정조대왕당시  수원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할때 다산이 발명한 거중기:편집부


없어도 되는 …

얼마 전에 그가 '유배'라는 자비로운 왕명을 받들어 터잡고 살던 강진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가 직접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 당호(堂號)를 붙여 놓았던 풀집은 번듯한 기와집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당호는 다산와당(茶山瓦堂)이 안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거닐었을 법한 길을 걸어보고, 바라보았을 듯한 바다쪽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은 꽤나 괜찮은 일이었다. 혹시 지금 누가 그의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도 강진 땅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이가 있다면, 다산이 태어났으며 또한 지금 잠들어 있는 땅, 마재로 찾아가 보시라. 그 곳은 서울에서 멀지 않는 팔당댐 바로 너머에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걸어서도 해지기 전에 충분히 도착하리라. 다산의 무덤곁에 앉아서 그의 목소리보다는 행락객들의 유행가 소리를 들고 있을만한 아량만 있다면 말이다. 그 소리를 듣고 앉아 있을 자신이 없다면, 그의 마음과 혼이 걷고 바라보았을 사람과 사회, 역사에 대한 길, 그리고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의 애정을 그의 책 안에서 더듬어 보는 것,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리라.


나그네 한가로이 웃으며 오가지만,

그야 이 마루에 걸터 앉아 가슴을 쓸어 내렸으렷다.

약천에서 물떠다 솔방울로 데워 차 끓였다지만,

차맛은 진정 쓴 것이었으렷다.

제자들 몇몇 가르치며 수백 권 책을 썼다지만,

회한은 참 깊은 것이렸다.

대나무 전나무 동백나무 어우러져 아름답다지만

그는 진정 슬펐으렷다.


지금이사 기왓집이다마는,

그이는 말대로 초당(草堂)에 살았으렷다. -김우인의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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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치마폭에 쓴 사랑의 노래 매조도(梅鳥圖)-정약용-
2008/01/16 오 전 9:59 | 기본폴더

-= image 1 =-
매조도(梅鳥圖)-정약용-

- 치마폭에 매화를 그리다 -

翩翩飛鳥 息我庭梅 
편편비조 식아정매 

有烈其芳 惠然其來
유열기방 혜연기래

爰止爰棲 樂爾室家 
원지원서 낙이실가 

華之旣榮 有賁其實
화지기영 유분기실

가볍게 펄펄 새가 날아와

우리 뜰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매화 꽃 향내 짙게 풍기자

꽃향기 사모하여 날아왔네.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가정이루고 줄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그

열매도 주렁저렁 많으리.                      

<1813년 강진에서>

귀양살이 10년 째 고향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던 다산의 아내 홍씨(洪氏)가 더 힘들게귀양 사는 남편에게 시집 올 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 6폭을 인편에 보냈다. 세월이 오래된 치마여서 색깔도 바래고 붉은 색도 변해서 가위로 잘라 네 개의 첩(帖)을 만들어서 두 아들에게 경계의 글을 써주었고 그 나머지 천으로는 작은 족자를 만들어 외동딸아이에게 넘겨주었답니다. 남편과 아내가 떨어져 살던 기간이 너무 오래고, 그렇다고 요즘 젊은이들처럼 원색적인 사랑 말을 표현할 수도 없던 그 시대 그래도 사랑의 표현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농속에 깊이 간직된 다홍치마를 보내준 일도 참으로 은근한 사랑의 표시이지만, 이것을 받은 남편 역시 경건한 선비여서 두 사람 사랑의 열매인 아들과 딸에게 넘겨주는 멋진 일을 하였다.

아들에게 써준 네 편의 글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딸에게 준 족자 하나인 "매조도"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조선 후기 실학자. 경기도 광주(廣州) 출생.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사암(俟庵),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본관은 나주(羅州).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경사(經史)를 배우고 1776년(영조 52) 상경, 이듬해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이벽(李檗)을 통해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경세유표(經世遺表)와, 지방의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목민심서(牧民心書) ,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제시한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그의 정치·사회·경제사상을 총괄한 것으로서, 정박명절(精博明切)하기로 이름이 높다.

서양의 과학지식과 기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한강의 배다리(舟橋) 가설과 수원성의 설계, 성제설(城制說)과 기중기의 창제, 종두법(種痘法)의 연구와 실험 등을 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육경·사서에 대한 주해서군(註解書群)과 일표이서가 대표적이며, 이 밖에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아언각비(雅言覺非) 대동수경(大東水經) 마과회통(麻科會通) 의령(醫零) 등 모두 500여 권에 달하는데, 이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에 총망라되어 있다. 1910년(순종 4)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문도(文度).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황진이>

月下梧桐盡 霜中野菊黃
월하오동진 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 人醉酒千觴
루고천일척 인취주천상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류수화금냉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情與碧波長
명조상별후 정여벽파장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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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내일신문 296호(99년 8월25일)

장명국칼럼

올 8·15에 생각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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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극복되었다고 하지만 정부 빚은 무려 1백43조원에 달한다. 8·15 경축사에서 약속한 것을 시행하려면 재정적자는 더 늘어날 것 같다. 아직도 수많은 실업자들이 방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올해 증시에서만 외국인들은 36조원, 약 3백억달러의 이득을 보았다. imf의 후과인지, 국가경영의 방향이 잘못되어서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제는 나라 망친 ys만 탓할 때는 아니다.

8·15가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이승만이 옳은지 백범이 옳은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구국의 영웅이냐, 아니면 8·15 정신을 훼손시켜 나라를 어지럽게 한 사람이냐는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백범 김 구 선생의 정신을 반대하는 사람은 이제는 거의 없다. 이승만은 백범을 국수주의 과격파로 몰았지만 결국 역사는 반대로 이승만의 리더십과 정치노선이 잘못되었다고 판정하고 있지 않은가.

작년 이맘 때 imf의 고통 속에서도 국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목숨 걸고 40년 민주화운동을 했고, imf를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고, 개혁과 통일의 방향을 세워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지지율은 작년의 반도 안되는 35%선으로 급락했다. 올 들어 민심을 모른다고 비판받고 imf 극복도 미국을 위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이는 한편,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라는 회의까지 일고 있으니 말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 말은 어찌보면 8·15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뜻일 수 있다. 8·15 정신은 일제의 잔재와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는 강한 개혁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개혁을 통해 민족통합을 이루고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확고히 세우는 것이 바로 8·15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imf를 극복한다 하여 나라의 주체성을 세우지 않고, 무조건적인 세계화만 부르짖으면 자칫 8·15 당시 이승만의 정책과 동일해질 수 있다. 마음 속에서 진실로 동서간 지역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구호만 남발한다면 결국 8·15 이후의 좌우 이념처럼 갈등대립만 심화시킬 뿐이다. 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멋진 말보다는 강한 실천을 요구한다.

사정개혁보다 국민의 정부라는 말에 걸맞게 국민여론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혁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국민의 정부란 봉건시대의 통치(統治)가 아닌,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政治)를 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민(民)에 바탕을 둔 옳은 정치를 하면 당연히 국민은 지지를 할 것이다. 정치개혁 없이는 재벌들도 관료들도 개혁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개혁은 권력의 정치를 봉사의 정치로 바꾸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개혁은 개혁주체들이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혁은 인적 청산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imf를 극복했으니 인적 청산도 해야 한다. 8·15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여 오늘까지 국가기강이 제대로 서지 못했다는 비판을 유념해야 한다. 세계화도 일방적으로 몰려서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 관점에서 이루어야 한다.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에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가르치고 베트남의 호지명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죽을 때까지 품속에 지녔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하는 세계화는 일방적인 미국화가 되어서는 안된다. 마침 8·15를 전후해 설악산 백담사에서는 처음으로 ‘만해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체코 등에서 만해 한용운의 시와 사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모였다. <조선불교유신론>을 쓴 만해는 불교개혁의 화신이었다.

불교의 황국화를 위한 총독부 방침에 따라 개최된 31본사 주지회의에서 만해는 이렇게 일갈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 하지만,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이요,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은 31본사 주지 바로 네놈들이다.”

그는 기미독립운동 33인 중 유일하게 변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라는 말처럼 개혁과 독립을 위해 싸워나갔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그 스스로 민중이었으며 눈치보지 않고 원칙과 기준을 갖고 올곧게 살아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우리 정치가들이 만해 선생의 얼과 삶을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본사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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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위의 두편의글은 다산 정약용선생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다가 네이버검색창에서 마침 좋은글이 있어 퍼온것이다.

김기백 기자 baek43333@hanmail.net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죽기전에 꼭 읽어

2004/11/12 14:24



복사 http://blog.naver.com/rani6/100007550342



“사람이 지기(知己)가 없다면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것이다. 처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자식이 알아주지 않고, 형제나 집안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데 나를 알아주는 분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경집(經集) 240권을 새로 장정해 두었는데, 장차 그것들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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