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간디로 불리우던 古堂 조만식 선생의 생애와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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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고당 조만식 선생... 북녘의 동포들을 버리고 혼자 내려갈수 없다며 월남을 거부... 결국 김일성 측근졸개들이 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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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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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
2012/01/23 [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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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曺晩植, 1883년[1] 2월 1일 ~ 1950년 10월 1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에 개신교에 귀의한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 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등 주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역 위원장에 참여했고, 11월에는 한국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김일성 측근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북조선지역에서 지도적인 개신교 민족주의자였으며 평안도 개신교도들을 비롯해서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2]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 종교는 개신교이다.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유년기
1883년 2월 1일(음력으로는 12월 24일) 아버지 조경학(曺景學)과 어머니 경주김씨 김경건(敬虔)의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경학은 매년 벼 백 섬을 거둬들이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향반으로, 평양에서 일종의 위탁판매업이라 할 수 있는 물산객주 일을 하던 상인이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1888년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6년 한문 수학을 마쳤다.
1905년 평양의 개신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또는 숭실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숭실중학에서 수학하면서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했다.[3] 어린 시절의 조만식은 병약하였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였다. 한번은 어린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부친은 그때 울고 온 아들에게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 하며 벌을 세웠다 한다. [4] 그뒤 체력을 단련하고 무예를 연마하여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익혀 호신술로 활용하면서 어린 조만식은 날파람의 명수로 이름나도록 연마하기도 했다.[5] 아버지 조경학은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절의(節義)를 존중하고 지켜야 하느니라"하며 의리와 절의의 중요성을 자녀들에게 역설하였고, 이는 그의 생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보다 5살 아래인 누이 동생 조은식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는데, 은식은 열일곱에 결혼하여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로 50년을 수절한 후 고고하게 생을 보냈다.[4] 그 뒤 조만식은 평양시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편집] 포목상 경영
1897년 15세 때부터는 포목상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포목상을 경영하다가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1897년 그는 부모의 권유로 2세 연상의 박씨(朴氏) 부인과 결혼하였다.[6] 첫 아들 조칠숭이 태어나 아버지가 되었으나 조칠숭은 정신 미발육의 장애아였고, 가정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생활 7년 만인 1902년 그는 첫부인 박씨와 사별하였다.[6] 1902년 전주이씨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6] 장애아였던 장남 조칠숭은 그의 나이 26세때에 요절하고 말았다.[6]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조만식은 장사를 그만두고 가족들을 이끌고 대동강 중류 지방의 베기섬에 있는 벽도지리(碧島只里)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그 무렵 고당의 나이 22살 때 피난 생활 중에 급우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6]
[편집] 개신교 입문
[편집] 장대현교회
조만식은 22세에 장로교에 귀의하여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 [7] 폭음으로 건강을 잃어 부모로부터 생활의 절제를 권유받았고 동료 한정교는 그에게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고하였다. 개신교에 입문한 한 후 조만식은 한정교를 따라 평양 장대현 교회에 출석했다.[5] 주일 낮에 1천 5백명을 육박할 만큼 신자가 많던 장대현 교회의 교회당에 처음 들어 선 순간 조만식은 거대한 군중들의 분위기를 보고 놀랐다 한다.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인파가 서양 선교사의 예배집례에 따라 열광적으로 노래하다가, 다시 온 무리가 함께 부르짖기도 하는 광경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처음 개신교 예배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며칠 밤을 잠못이루다가 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면서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다.[5]
[편집] 숭실학교 재학 시절
놀기를 좋아하고, 대주가(大酒家)로 용맹을 떨칠 정도였던[5]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직후 조만식은 술과 담배를 끊고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7] [5] 1905년초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년사경회를 통해 감화받은 조만식은 3월이 되자 고당은 숭실 중학교에 입학을 결심, 아버지를 여러 번 설득한 끝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5] 숭실중학교에 원서를 제출시 초라한 몰골 때문에 배위량 박사 등이 거절하였으나 여러번의 설득으로 1905년 그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5][8]
[편집] 금욕주의
교장 배위량 박사는 한국인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폐단이 많은 것을 보고 학교의 교칙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술이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철저하게 금주 교육을 시켰던 것이며 수업중에 술 주(酒)라고 써야할 대목이 나오면 그 글자를 일부러 피하여 ○표로서 술 ‘주’자를 썼다.[9] 숭실중학교의 교장이자 은사였던 배위량 박사와 박자중 교사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박자중 교사는 조만식이 숭실중학교 재학 중이던 1906년 6월 21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9] 또한 교외의 인물로는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에 다니며 금연과 금주를 결심하였으나, 술과 담배 습관을 완전히 끊기 어려워 그는 급우들과 망을 보면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켜서 여러번 벌을 받기도 하였다.[7] 그러나 그해에 조만식은 금연·금주에 성공했고 그후 40년을 일체 금주, 금연하면서 지조를 지켰다.[7]
[편집] 청년기
[편집] 일본 유학
숭실중학교 재학 중 그는 시내에서 평양의 태극서관 주인 안태국의 활동과 강연, 민족지도자 안창호 등의 활동과 연설을 우연히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받은 그는 실력을 양성하는 길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 확신하고 일본유학을 결심한다.[10] 1906년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설립에 관여하였고, 김정식 등과 유학생을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11] 1908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1910년까지 정칙영어학교에서 영어[8]와 수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인도의 민족해방운동가 간디의 일대기인 '간디전'을 읽었으며[9] 영어를 공부하던 도중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주창한 인도주의와 무저항주의, 민족주의에 관한 글을 공감하여 이를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3][8] 그뒤 심지어 복장이나 삶의 스타일까지 간디풍을 즐겨 따라하였으며[9]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주의의 실천과 간디 정신을 따라 매사에 스스로 절제하려 노력하였다.[9] 한편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국내 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후원하기도 했다. 1910년봄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校)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때 송진우, 김성수 등을 만나 친구관계를 형성하였다.
일본 도쿄 유학 시절 조만식은 '동경한인교회'의 영수로 기독교청년회의 회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영수로 시무한 장로교단 소속의 동경한인교회를 1911년 여름, 백남훈,김영섭등과 함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교회(재일본 동경조선예수교연합교회)로 개편하였다.
이는 1909년 5월 한인 장로교회가 설립도니 이후 하나둘씩 늘어난 감리교회 출신 유학생들이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격하고, 이국땅에서 교파 문제로 개신교인들이 분열된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더불어 조만식은 지방별로 나뉘어 따로 놀던 동경 유학생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망국적인 지방할거주의 문제를 통함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묻지말자"고 외치며 전라도 출신의 송진우, 경기도 출신의 안재홍과 힘을 합해 1911년 겨울, 출신지방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회를 구선유학생친목회로 통합하였다. 조선유학생친목회는 창립 몇 달 만에 일제에 의해 해산당하고 말았지만, 1913년 가을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발족으로 이어지며 뒷날 2.8 독립선언의 디딤돌이 되었다.[12]
일본 도쿄 유학 중 1910년 여름 조만식은 잠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머무르고 있을 때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였다.[10] 치욕스러운 한일합방에 분노를 느낀 그는 시내의 한일합방 경축식과 일본의 신사에서 신을 모셔오는 행사장에 난입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려다가 아버지 조경학이 계속 간곡히 만류하여 그만둔다.[10]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닭고 격정을 참은 그는 참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깨닭게 되었다.[10] 그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을 다녔다.
[편집] 계몽·사회 활동
- 물산장려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3년 3월 31살의 늦은 나이에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5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8] 당시 오산학교는 설립자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학교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위기에 놓여 있던때였다. 조만식은 그런 학교에 부임하여 봉급도 받지 않고 교사로, 교장으로 만 8년 동안 모두 3차례 걸쳐 봉직하면서 학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13]
1919년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을 필두로 교사와 직원에 이르기까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도 교장직을 사직하고[8]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수배되어 피신, 1919년 3월 4일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 동료 도인권과 함께 평양을 떠나 국내를 탈출, 상해로 망명하려던 중, 평안남도 강동에서 일본 헌병대의 추격을 받았다. 도인권은 미리 몸을 피했으나 그는 체포되어 평양에 압송되었고,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가 1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자 아버지 조경학은 아들이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졸도하였다.[4]
집에서는 가장의 인사불성으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으나 얼마 후 아버지 조경학은 병석에서 일어났다.[4] 병석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그가 수감됨 평양형무소에 가 형무소 주변을 한바퀴씩 돌았다고 한다.[4]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을 본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만식을 면회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아가서 옥중 간수에게 취사장의 위치를 물은뒤 간수의 안내를 받아 취사장으로 갔다.[4] 형무소 취사장에서 조경학은 수수와 콩으로 지어진 밥을 직접 시식하고는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뭐, 이만하면 견딜만하겠다 하며 아들을 면회하게 되었다.[4] 조경학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염려의 기색을 숨긴 채 태연하게 아들의 안부를 묻고는 이정도의 식사면 건강에 지장이 없으니 잘 이겨내라며 사내에게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참고 견딜 것을 주문하였다.[4] 아버지 조경학은 외아들에 대한 격정을 감추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4]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한 후 1920년 1월 평양 형무소에서 2개월의 형 만기를 남겨 두고 가석방을 받았다.[7] 일반적으로 가석방 소식은 감방 내에서 경사와 같았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형을 단호하게 거절, "10개월 동안 수감된 것 자체가 불법인데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은전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니 가출옥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잔여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가겠다"며 거절하였다.[7]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석방조치 되었다. 평양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조만식은 다시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20년 10월 오산학교 교장직에 취임하였다.[3]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가 되고,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에 선출되었다. 1922년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14] 부회장으로는 저명한 변호사였던 한근조를 찾아가 초빙해서 영입하였다. 평양 YMCA 총무를 지내기도 하였다.[14] 이때부터 “조선의 간디”로 불리었다. YMCA 청년회를 중심으로 그는 YMCA내에 장,감여합 저축조합을 조직하였고, 자본을 모아 평양 양말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편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편집] 민립대학 설립 운동
1923년에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 조직에 동참하였다.[8] 연정회의 구성 목적은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 목적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3] [8] [15] 바로 숭인중학교(崇仁中學) 교장에 취임하였다.[8]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과 압력 끝에 1926년 숭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8] 1921년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하였다.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되면서 그는 평안도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21년부터 1932년 평양 YMCA 총무직을 지내는 동안 그는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전역을 근거지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자신이 구상한 '풀뿌리 민족운동'을 실천에 옮겨 나갔다. 조만식은 YMCA를 거점으로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하였고, 물산장려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개신교계와 상공업계,교육계,여성계,청년계를 하나의 '네트워크'식으로 엮어나갔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가했다.[3] 1927년 평양지역의 신간회 조직 활동에 적극참여하고[8]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었다.[15]
[편집] 실력양성과 자치 운동
1929년 평양에 공회당이 설립되자 참석하였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공회당의 명칭을 '백선행 기념관'이라고 명명하였다.[16]
1929년 인파를 모아 서울역 앞에 집결하여 광주만세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15]가 풀려났다.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대 이후로 잡지 삼천리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1932년 평양 YMCA 청년회 총무직을 사퇴했다. 1932년에는 숭실학교 후배인 조병옥이 출감하자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서 그를 사장으로 임명하였고 조만식은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경성부로 활동무대를 옮겨 사장직을 맡았다. 조선일보의 사장이 되자 편집국장에 주요한(朱耀翰), 전무겸 영업국장에 조병옥을 임명했다.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자 조선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를 협조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부하였다.[14] 그러나,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왔던데다 경성부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 악화와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하게 되었다.[17]
조선일보 사장직에 물러난 이후 조만식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물산장려회와 관서체육회의 회장으로 복귀하여 지역사회의 대소사를 챙겨 활동했다.한편 이봉창·윤봉길 사건으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자, 여운형, 이광수 등과 함께 매일 안창호를 찾아 안부를 물었으며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와도 관계를 갖고 출입하였다.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보천교를 통해 종교자금 명목으로 모금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만식이 보천교와 관계를 맺고 출입한 이후,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에 알려지게 되었다.[18][19]
조만식이 출입한 이래 조만식 외에도 한규숙·장덕수·최팔용·송진우·백관수·조병욱·신석우·김철수·김철수(동명이인)·안재홍·백남훈·설태훈·임모, 김모 등이 보천교에 출입하게 되었다.[20]이 외에도 그와는 동명이인인 조만식(趙晩植)도 보천교에 가담하였다.[20]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韓圭淑)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 원을 독립 군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총독부 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했다.[18][19] 조만식과 한규숙이 체포된 원인은 그들과 함께 권총 2자루를 소지하고 있다가 검거된 '상해 밀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함께 관여한 월곡의 후손들은 보천교에 있다 체포된 사람은 고당 조만식이 아닌 1936년에 신의주에서 사망한 동명이인 이라 증언하였다.[20]
[편집] 사회단체 활동
1932년 조만식은 평양의 을지문덕묘소를 돌보면서 '을지문덕장군 묘 수보회'(墓修保會)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평양 고아원 및 양로원, 인정도서관 개관 등에도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3년 백선행이 사망하자 조만식은 평양 시민들을 이끌고 자발적으로 장례식에 참여하여 애도하였다.[21]
1935년 12월 18일 부인 이의식 여사가 별세하였다. 그뒤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때 주변의 소개로 옛 제자인 전선애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선애는 이 무렵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22] 다시 만난지 3개월 만인[22] 1937년 봄 조만식은 전선애와 결혼하였다.[23][22]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있으면서 미국유학을 준비중이던 전선애는 조만식과 결혼하게 된 동기로는 조만식의 인품을 보고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22] 1936년 공석인 목사를 대신하여 산정현 교회의 일을 보고 있던 조만식은 목사가 된 제자 주기철에게 산정현 교회의 목사로 부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24] 은사의 부탁을 받은 주기철은 곧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다.[24]
도산 안창호 선생 말년. 왼쪽에는 여운형, 오른쪽에는 고당 조만식. 조만식은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의 말년생활을 끝까지 곁에 있었다.
이무렵 안창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송환되었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에게 문안인사차 찾아다녔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평양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탄압이 지속되자, 조만식도 이때 체포되어 서울에 이송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20여일만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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