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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초근목피' 들고 유엔 간 외무장관
6ㆍ25 당시 유엔외교 단상..전상진 前유엔대사 회고- 7차총회서 한반도 의제화.. 美ㆍ蘇 타협속 '고군분투'
 
연합뉴스 기사입력 :  2012/01/2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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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초근목피' 들고 유엔 간 외무장관

한국문제 결의안 통과(자료사진)
한국문제 결의안 통과(자료사진)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6ㆍ25 당시 유엔외교 단상..전상진 前유엔대사 회고
7차총회서 한반도 의제화..美ㆍ蘇 타협속 '고군분투'
 
 
(서울=연합뉴스) 정묘정 기자 = 『마른 풀과 소나무 껍질, 도라지, 고사리...』
1952년 10월 초, 변영태 외무장관은 급히 비서를 찾아 '초근목피'(草根木皮)를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말만으로는 여간해서 유엔과 국제사회를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전란 통의 한국민들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시켜줄 요량이었다. 변 장관은 비서가 구해온 초근목피 표본을 반찬용 유리병에 넣고는 뉴욕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막상 유엔 총회장 앞에 당도한 변 장관은 그 유리병을 들고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는 발언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판이었다. 또 기회가 온다 해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휴전문제를 다루는 게 더 시급했다.총회 분위기를 살피던 변 장관은 결국 계획을 접었다. 대신 일요일 아침 일찍 뉴욕 컬럼비아 대학 인근 한인교회를 찾았다. 예배를 보러온 교포와 학생들 앞에 선 변 장관은 유리병 속의 초근목피를 내보이며 "국민이 지금 이걸 먹고 산다.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정성'이 모이기는 했으나 교인들이 적은 탓에 성금액수는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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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변 장관을 수행한 전상진 전 유엔주재 대사가 회고한 한국 유엔 외교의 '뿌리'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2년 9월 제7차 유엔 총회에 본격 데뷔해 고군분투하던 우리 외교의 단상이다.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고 각종 유엔 구호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당시 변 장관을 비롯한 한국 외교관들의 기개와 뚝심은 대단했다. 변변히 내세울 게 없는 약소국이었지만 미ㆍ소 양국의 '강대국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의 주장을 관철해내려는 '불퇴전'의 의지로 똘똘 뭉쳐 있었다고 전 전 대사는 회고했다.
 
◇ 유엔 정식의제로 오른 '한반도' = 전선의 총성이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1952년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초순까지 열린 제7차 유엔 총회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 분수령이 됐던 회의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가 다자 외교무대의 정식의제로 올랐기 때문이다. 회의개막 당일인 10월14일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한국문제의 유엔토의는 실로 우리의 천년(千年)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을 정도다.
 
총회는 전쟁이 장기화하느냐, 아니면 휴전이 성사되느냐의 갈림길에서 열렸다.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협상은 포로석방 방식을 둘러싼 유엔군 측과 북ㆍ중의 대립으로 기나긴 교착국면에 빠져 있었다. 그 휴전협상의 최대쟁점이었던 포로송환 문제가 이번 총회를 계기로 판문점이 아닌 유엔무대로 이관돼 국제적 공론에 부쳐진 것이다.
 
우리 정부 대표단에게 주어진 임무는 중차대했다. 이미 미ㆍ소가 휴전협상 쪽으로 분위기를 잡아가는 상황에서 '통일 없는 정전협정'에 반대한다는 한국의 입장을 반영해내는 게 최대 임무였다. 한국의 유엔가입을 추진하고 유엔으로부터 대규모 식량원조를 받아내는 과제도 주어졌다.대표단은 변 장관을 단장으로 임병직 주 유엔대사, 양유찬 주미 대사, 한표욱, 이재항, 그리고 전 전대사(당시 장관보좌관 역할)로 구성됐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5번째 열린 유엔 총회이지만 본격적인 의미의 유엔 외교가 시작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외교는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기'에 의존했다. 사실상 이승만 대통령의 '1인 외교' 시절이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장관과 대사들은 유엔 주변에 사무실 하나 없이 호텔에 투숙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변 장관은 휴대용 타자기로 직접 공문을 써서 워싱턴 주미대사관을 통해 외교행랑으로 본국에 보고했다.
 
◇ '휴전'으로 기운 美..한국요구에 미온적 = 그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은 '판문점 회담'의 유엔 이관에 반대해왔다. 휴전협상을 교전 당사국들로부터 떼어내 중립국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유엔 무대로 옮길 경우 소련 측의 주장이 먹힐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변영태 전 외무장관(자료사진)
변영태 전 외무장관(자료사진)
<저작권자 ⓒ 2000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그러나 휴전협상이 장기화하자 미국은 초조감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해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 내에서는 미군 사망자가 늘고 전쟁이 지루한 국면에 접어들면서 반전여론이 고조돼 있었다.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정치적으로 위기였다. 미국이 판문점 회담을 유엔으로 가져오고 점차 공산측과 타협의 기류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런 맥락이었다.
 
제7차 유엔총회에 임하는 미국 대표단은 이미 정전 쪽으로 마음이 기운 채 조속히 교착국면을 타개할 돌파구를 찾는데 관심을 쏟았다. 유엔 총회가 열린 지 3일 만인 17일 미국 국무부에서 접견한 딘 구더햄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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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단을 이끄는 변 장관이 "한국문제 토의에 중공이나 북한 괴뢰가 개입하지 못하게 미국이 활약해달라"고 요청하자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소만 띤 채 확약하지 않았다. 또 한국의 유엔 가입 추진문제를 언급하자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전연 무용하다"고 일축했다는 후문이다.구호문제로 들어가 변 장관이 "일선에 징집되어 가는 청년들이 부모처자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꼴을 보고간다"며 전폭적인 식량원조를 부탁하자 미국 측 인사는 "기술진 조사로는 그리 심한 것으로 나와있지 않다"며 미온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특히 한국 안전보장 문제의 핵심이었던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해서도 시원스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소를 띤 채 "선거 후에는 내가 지금 자리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장 방위조약에 서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이에 변 장관은 "방위조약이 없는 것은 일본이 다시 한국을 병탄(倂呑)해도 좋다는 신호로 알기 쉽다"고 지적하자 애치슨은 다시 빙그레 웃으며 "당신들에게는 해야할 문제가 많지 않느냐"며 비켜나갔다.
 
 
◇ 대선 앞둔 美대사 "민감한 연설내용 빼달라" = 유엔 정치위원회에 우리 정부대표단이 참석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 나라는 태국이었다. 변 장관은 태국 대표인 프린스 완을 찾아가 정치위원회에 한국 대표단을 참석시키고 북한 대표단의 참석은 불허하는 내용을 발의해달라고 청원했고 태국 측은 이를 수락했다. 정치위원회 표결에서 54대 5로 한국 대표단의 참석 안건이 통과됐다.그러나 유엔에 정식 가입하지 않은 옵서버의 지위로는 발언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 대선 하루 전날인 11월3일로 연설 날짜를 받았다.
문제는 전날인 2일 소련 측 대표인 비신스키 외상이 무려 3시간39분에 걸쳐 대한민국과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특히 정부 대표단을 자극한 것은 "대한민국이 먼저 침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변 장관과 대표단은 밤을 새워가며 이를 반박하는 연설문을 작성했다. 문안에는 "미국이 3차대전 유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의 북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확집(確執)에서 우리 국군 장비를 계획적으로 열약(劣弱)한 상태에 두었다는 사실(변영태 저 '외교여록')"이 적시됐다. 북진이 생리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때 미국 대표단의 어니스트 그로스 주 유엔 대사가 연설 직전에 이 대목을 빼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내왔다. 바로 이튿날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에 변 장관은 이미 인쇄된 연설문 일부를 발표 몇 분 앞두고 삭제하는 게 어렵거니와 가능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입장을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이를 도저히 뺄 수 없다고 통보했다.
 
대선 당일 아침 뉴욕 타임스와 헤럴드 트리뷴 등 미국의 유수 신문들이 이 대목을 부각시켜 대서특필했다. 선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 몰라도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는게 변 장관의 회고였다.

인터뷰하는 전상진 前 유엔 대사
인터뷰하는 전상진 前 유엔 대사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전상진 전(前) 유엔 대사가 16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950년대 한국 유엔외교의 '뿌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2.1.16 dohh@yna.co.kr
◇ 인도 포로교환案에 분통..한국 '고립무원' = 당시 휴전협상의 마지막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문제의 돌파구를 낸 것은 중립국 인도였다. 인도는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방식을 주장하는 미국과 제네바 협정에 따라 강제송환 원칙을 강조하는 소련의 입장을 절충한 총회 결의안을 내놨다.
 
핵심은 ▲모든 포로는 합의된 비무장 지대에 이송하고 ▲중립 4개국 대표로서 송환위원회를 설치해 포로들이 본국송환을 원한다면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인도는 미국의 입장을 반영하고 공산 측 의사를 타진해본 뒤 수정에 수정을 거쳐 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표단은 인도의 중립정책에 거부감이 컸다. 표면상으로는 중립국이지만 이념적으로 소련에 동조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특히 소련이 겉으로는 인도안에 반대하고 있으나 두 나라 사이에는 분명히 '묵계'가 형성돼 있을 것이라는 게 변 장관의 생각이었다. 중립지대에 공산포로와 비공산포로가 섞여 있으면 공산권의 설복공략으로 포로들의 자유의사가 유린되고 테러 가능성도 있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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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표단은 두 차례에 걸쳐 인도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12월1일 인도대표 메논 외무장관이 결의안을 설명하는 연설을 하자 이에 격분한 변 장관이 미국 그로스 대사에게 다가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정녕 인도안에 찬성할 것이냐"며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에 그로스 대사는 천연덕스럽게 "예스(yes)"라고 답했다. 변 장관은 그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메논의 연설에 이어 소련 측의 반대연설이 나왔고 이에 변 장관은 사회자에게 발언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튿날 속개된 회의에서 한국 대표단의 발언청구 수용안이 토의에 부쳐졌으나 메논이 강하게 반대해 무산됐다. 회의장에서 한국 편을 두둔해주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이틀 후인 12월3일 결의안은 유엔 총회를 통과했고 이듬해 5월부터 본격화된 포로교환 협상의 중요한 준거로 작용했다.
 
분을 끝내 참지 못한 변 장관은 준비된 연설문을 인쇄해 유엔 대표들과 관계기관에 배포하려다가 이를 중단했다. 그러나 이후 정부로부터 인쇄하라는 훈령이 내려왔고 이듬해 2월 각 국가 대표단에 배포됐다.
 
당시 대표단 일원으로 총회에 참석했던 전상진 전 대사가 전하는 제7차 유엔 총회의 비화는 초기 유엔외교가 '두 개의 전선'으로 전개됐음을 보여준다. 공산측과는 '눈에 보이는' 대결을 벌였지만 맹방인 미국과도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공산 측과 적절한 타협을 모색해보려는 미국을 상대로 정부 대표단이 통일 없는 정전협정과 포로 강제송환에 반대하는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듬해인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과정에서 한국이 서명을 거부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제7차 유엔총회를 통해 드러난 미국의 기류변화는 아무리 가까운 맹방이라도 이해관계의 변화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입장이 바뀔 수 있다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이익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외교 격언이 재차 확인된 셈이다.
전 전 대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양심과 도의심으로 한국을 도와준 고마운 존재임에는 틀림없다"면서도 "그러나 강대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이 안되고 골치 아픈 약소국이라면 언제라도 제외시킬 수 있다. 아무리 가까워도 관계를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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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진 전 유엔 대사 = 1950년 고시 외교과에 합격해 외무부에 들어온 뒤 주뉴욕 부영사와 주중국 참사관ㆍ외무 차관보ㆍ주미국 공사ㆍ주카메룬 대사ㆍ주말레이시아 대사ㆍ주유엔 대사 등을 거치며 전방위적인 외교 경험을 쌓았다.특히 1950~60년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외교의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며 오늘날 외교통상부의 기틀을 세웠다. 퇴임 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맡아 88 서울올림픽 유치에 힘을 보탰으며, 강릉대 초빙교수와 한국국제교류재단 자문위원ㆍUNICEF 한국위원회 이사ㆍ서울평화상문화재단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을 펼쳐왔다.
 
 
▲강원 철원(83)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주뉴욕 부영사 ▲구미과장 ▲주미국 1등 서기관 ▲주중국 참사관 ▲외무차관보 ▲주미국 공사 ▲주카메룬 대사 ▲주페루 대사 ▲주말레이시아 대사 ▲주유엔 대사 ▲대한체육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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