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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복원은 시대착오” 조선조 마지막 공주 이해경 여사 뉴욕서 쓴소리
“조선총독부 기록을 내세워 소송하다니… “황실 복원은 시대착오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황실역사 바로세우기가 돼야”
 
뉴시스 기사입력 :  2012/04/1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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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복원은 시대착오” 조선조 마지막 공주 이해경 여사 뉴욕서 쓴소리



【서울=뉴시스】유세진 기자 = “조선총독부 기록을 내세워 소송하다니… 황실 복원은 시대착오적 미몽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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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마지막 공주’로 불리는 이해경 여사(82)가 최근 일부 황족 자녀들이 선친의 토지를 찾겠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한 쓴소리를 했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는 이해경 여사는 8일(현지시간)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황손 자녀를 앞세운 엉뚱한 사람들이 여황을 세우고 황족회 운운하며 진짜 황손들과 문중 종친회를 난처하게 하고 있다”면서 “황실 복원은 시대착오적이며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황실역사 바로세우기가 돼야한다”고 질타했다.

이해경 여사는 고종 황제의 아들로 당시 생존한 왕자 중에 순종 다음의 왕위 서열인 의친왕(義親王)의 다섯 번째 딸이다. 의친왕은 모두 12남9녀의 자손을 봤으나 정실부인 연안 김씨와의 사이엔 후손을 보지 못했다. 이중 장자인 이건 왕손과 차자인 이우 왕손만이 황적에 입적됐으나 이건은 훗날 일본인으로 귀화했고 이우는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으나 34세의 나이에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해경 여사가 조선 황실의 유일한 공주로 불리는 이유는 의친왕비가 자신의 호적에 이 여사를 유일하게 올렸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딸을 공주, 후궁에게서 얻은 딸은 옹주로 불렀기 때문에 정식 입적된 이해경 여사를 공주로 불러야 맞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정작 이해경 여사는 의친왕이 왕위 계승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 역시 공주의 자격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해경 여사가 많은 황손 가운데 주목을 받는 것은 의친왕비와 함께 유일하게 왕궁에서 생활해 격동의 조선왕조의 궁궐 생활을 또렷이 기억하는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3일 의친왕의 둘째딸인 이해원 옹주(93) 등 후손 16명이 서울중앙지법에 선친 땅을 돌려달라며 국가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들은 경기 하남시에 위치한 1만2700㎡ 땅이 지난 1965년 새 토지조사 과정 후 정부 소유로 넘어갔으나 이보다 앞선 조선총독부 기록 등에는 이해원씨 선친 이기용씨 땅으로 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해원 옹주는 지난 2006년 9월 일부 황손 일가가 모여 대한민국 황족회를 구성하고 문화대한제국 여황으로 추대됐다. 이른바 대한제국황족회는 정부가 해당 토지를 황실 후손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이 추진하는 대한제국 황실 복원과 토지소송 등에 대해 이해경 여사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 이번 언론 보도는 잘 알고 계시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언론 보도가 사실관계부터 잘못됐어요. 해원 옹주가 의친왕의 둘째 따님이라고 해놓고 선친 이기용씨의 땅을 찾는다고 보도됐는데 의친왕은 본명이 강(堈)이거든요. 이기용씨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의친왕과 이기용씨를 마치 한 인물처럼 묘사했어요.”

- 그럼 이기용씨는 누군가요?

“이기용씨는 흥선 대원군 큰형님 되는 분의 종손입니다. 의친왕의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려면 일제가 만든 호적이 있어야 했는데 황실 호적은 불허했거든요. 그래서 언니들과 저까지 다섯명의 자녀가 집안인 이기용씨 양자로 입적된거에요. 그때 만든 제 이름이 해경이고 둘째 언니는 해원이 된거죠.”

- 해원옹주 등이 국가에 귀속된 양부의 토지를 돌려달라고 한거군요.

“그런데 토지반환소송이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저는 1954년 의친왕비의 호적에 정식 입적됐기 때문에 이기용씨와는 관계가 없는데 서류상 양자로 남아 있는 모양이에요. 이기용씨 후손들이 선친 토지를 찾는다며 저한테 포기각서를 받아간 게 세 번이나 되거든요.”

- 이기용씨의 토지가 부당하게 수용됐다면 이번 소송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글쎄요. 국가에 소송을 하면서까지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기용씨는 일제하에서 황족이라는 이유로 작위(남작)를 받았어요. 그게 친일파로 규정된 결정적 빌미가 되어 해방 후 반민특위에까지 회부됐어요.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조선총독부 기록을 근거로 재산권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진짜 친일파 후손들이 다 재산을 찾겠다고 나서지 않겠어요? 국민 정서상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 이분들이 2006년 황실 복원과 함께 해원 옹주를 황위 계승자라고 선언했는데요.

“얼토당토않은 논리에요. 아다시피 조선왕조는 순종 이후 더 이상의 즉위를 하지 못했습니다. 순종께서는 후사가 없었고 왕위를 계승한다면 이복동생인 의친왕이 되어야 하지만 일제는 반일감정이 투철했던 의친왕 대신 스무살이나 어린 당시 열한살의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토록 했습니다. 영친왕은 강제로 일본에 보내져 훗날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고 이구 황세손이 태어났어요. 이구 황세손이 2005년 타계했을 때 역시 후손이 없었어요. 그래서 문중에서 제게는 조카뻘인 이원씨를 양자로 입적해서 후사를 잇게 했습니다. 굳이 황실 계승의 논리를 편다면 전주이씨 종친회 총재인 이원씨가 황세손이 되어야 하는 거죠.”

- 황실 복원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황실 복원이 아니라 황실 역사 바로세우기가 돼야 합니다. 일제에 의한 황실 해체는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입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회복시키는 일이니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황실 복원이 소수의 이익을 탐하는 것이라면 허황됐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옆에서 부추기며 환상을 심어주는 이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대한민국황족회라고 만들었지만 둘째 언니(해원 옹주)말고는 진짜 황족도 없어요. 이분들이 2006년 황실 복원한다고 했을 때 마침 한국에 있었어요.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이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방송국에서 취재하길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더니 집안싸움 났다고 보도하더라구요. 그후로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지만 명분없는 땅을 돌려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까지 하다니 낯이 뜨겁네요.”

- 이씨 종친회와도 관련이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종친회의 이원 총재와 통화를 했는데 정말 자기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저런 일을 벌이니 얼굴 뜨겁고 속상하다고 하소연하더라구요. 2005년에 이구 황세손 타계 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이원씨가 황사손(皇嗣孫)이 된 이후 낙선재에서 3년상을 치뤘고 해마다 종묘대제(宗廟大祭) 등을 주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너무 많아요. 종묘와 왕궁 이런 것이 다 문화재인데 전통 의식을 이끌어가는 후손도 인간문화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황실의 역사를 살리는 차원에서 종손이라도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던 낙선재에 살도록 돌려주면 좋겠는데 사람이 못살게 온돌도 뜯고 전기도 끊어버렸어요.”

- 아닌 게 아니라 황실 후손들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들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왕가를 폐지하고 재산을 몰수해서 살고 있던 궁에서 내쫒는 바람에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곤궁한 처지가 되었어요. 정작 후궁의 소생으로 궁밖에서 생활한 이들은 개인 재산이 인정돼 먹고사는데 큰 불편이 없었지만 왕손들은 집도 절도 없이 거리로 나앉은 꼴이 된게지요. 직업을 갖기 위한 교육도 못받았고 재산도 없어 한동안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왕족이라는 신분은 명예가 아니라 쉬쉬하며 말할 수도 없는 족쇄였을 뿐입니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성악과를 졸업한 이해경 여사가 1950년대에 80달러를 들고 어렵게 미국 유학을 떠난 것도 이 같은 환경이 주된 요인이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되면서 아버지 의친왕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아냈고, 의친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복권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10여년 전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 의친왕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의친왕은 젊은 시절부터 호방한 성품으로 일제에 굽실대지 않고 왕족의 위엄을 드러낸 분이었습니다. 1919년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했다가 만주 안동에서 발각 송환되는 일도 있었지요. 아버지가 사동궁에 들어오시면 팥밥을 물에 만 팥수라를 드시곤 했어요. 취미는 골패맞춤과 마작이었는데 온 가족이 함께 할만큼 스스럼 없으셨지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이해경 여사는 현재 맨해튼 컬럼비아대 인근의 원룸 아파트에 거주하며 일주일에 한번 뉴저지 엥글우드에 있는 FGS커뮤니티센터에서 노래강습을 하고 있다. 왕년에 ‘비둘기집’으로 인기를 모은 가수 이석씨(72)가 이복동생이다.

수 년 전 프린스턴대에서 ‘조선 황실을 말하다’ 행사 이래 지속적으로 초청강연을 하고 있는 이해경 여사는 “다 망한 집안에서 왜들 이렇게 시끄럽냐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왕손들이 처신을 잘해야 한다”면서 “국민들과 함께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바로 세우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dbtpwl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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