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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를 아십니까? 이우 왕자 이야기
이 분이었으면 친일파 올킬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처벌 받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
 
kr.blog.yahoo.com/zootooboo/20 기사입력 :  2012/04/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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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 왕자님 이야기
 


<의친왕의 차남 이우>

1912년 출생-1945년 사망.
아버지 의친왕의 기개를 닮았으며 총명하고, 수려한 외모에 왕족으로서의 위엄이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따뜻하고 너그러웠으나 일본인에게는 사납고 냉정하였고,
"호랑이 같은 조선 왕족의 핵심"으로 불리며 일본의 감시·경계 대상이었다. 



<이우 왕자>

일본이 일본 왕족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자, 이우 왕자는 "일본인과 결혼할 수 없다"며 버텼다.

독립운동가 유동렬의 딸과 정혼했지만, 결국 일제의 반대로 친일파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하는 '타협'을 했다고 한다.

하루는 농부들이 서울로 올라와 왕자에게 일본의 공사 보상여부를 호소하자 왕자는 즉시 일본군
사령부로 달려가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구하였다. 일본 장교가 거절하자, 왕자는 총을 꺼내들며
그의 머리에 겨누고, "나는 너 하나 죽여도 처벌 받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위협하였다.
결국 공사는 취소되었다. 



<왜구들 사이에서 블링블링 빛이 나는 왕자님>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그는 일본인 급우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켜일제의 요주 감시
대상이었다. 일본에서도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거의 사용하였으며, 조선 출신 생도에게는
조선말로 크게 호령하였다고 한다.

술자리에서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황성 옛터'를 부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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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군 정보 창모라는 직위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독립군에게 넘겨주는 등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고 한다.

왕자는 중국 태원에서의 근무 3년 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수도 있었을 만큼 실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 왕자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다.

이에 왕자는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운현궁으로 들어가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한다. 그 사이 왕자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다 결국 설득 끝에 히로시마로 가게 되는데, 왕자가 히로시마에 간 그날 원자폭탄이 투하
되면서 부상을 입는다.

이우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상태가 호전되는 듯 하였는데, 그날 밤 갑작스레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8월 7일)

(이우 왕자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이 왕자의 부상을 틈타 독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후에왕자의 시신은 조용히 귀국하여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다. 공교롭게도 그의 장례식날에
일왕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하니 바로 그날이 8월 15일이며, 왕자는 죽어서야 그토록 열망하였던
조국의 해방을 볼 수 있었다.  

그 해 왕자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우 왕자>

이우 왕자의 호칭은 "전하", 황실의 여동생들에겐 "운현궁 오빠"라 불렸다고 한다.  

 
||||||||||||
 
 







이우왕자 1912년 - 1945년




고종의 셋째 아들 의친왕 이강과 셋째 부인 수인당 김홍인의 아들




형 이건왕자가 일본에 순응하며 친일을 하는데 반해 동생인 이우왕자는 일본을 증오했다. ( 그래서 고종과 의친왕은 이우왕자를 매우 아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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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痛哉! ~哀哉 哀哉라! 숭례문이여!! 남대문이여!!!


이우가 서울에 있을때 하루는 전라도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에게 몰려와  일본군이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채면서도 보상을 안해준다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우는 즉시 용산의 일본군사령부로 갔다. 그리고 당시 도로건설을 담당하던 장군을 만나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청하였다. 담당장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이에 이우는  즉시 권총을 빼어 장군의 머리에 겨누며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소리쳤고 이 말에 일본 장군은


버로우탐.( 농민의 청원은 이루어짐)




1929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인의 길을 걷고 일본군 정보 참모까지 올라간다. (일본인들을 싫어했기때문에 학교에서도 매일 마찰이 생겼고 일본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게됨. 그리고 정보 참모의 직위를 이용해서 독립군들에게 수집한 정보를 넘겨주는등  독립군의 후원자로 활약함)




이우는 태원에서의 근무 3년 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이우의 독립운동은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알려지기도 전에 히로시마에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다. 오로지 주변 증언으로 종합하여 보면, 이우는 근무지 근처에서 태항산 유격대의 조직확장에 은밀히 간여하였다.

이우는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판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판단되면 이 태항산의 유격대와 주변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 일본군내의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수도 있었을 만큼 실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다. 이에 이우는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운현궁으로 들어가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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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한국에 배속시켜 달라는 청원도 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어린 아들 청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간호를 위해 늦게 간다고까지 하면서 히로시마로의 배속을 늦추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이우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이때 이우의 동계급 부관이며, 일본정부가 임명한 감시원이었던 요시나리는 히로시마로 갈것을 설득하여 6개월만에 이우는 일본에 가게 된다. 요시나리는 애초에 이우를 감시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하는 밀정의 임무에 충실하였지만, 후에 가서는 이우의 인품과 배포에 매료되어 이우의 사람이 된 군인이다. 그런 요시나리의 설득에 이우는 운현궁을 나서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하필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게 된 날이 미국의 히로시마원폭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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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을 그리워 함"
오호, 痛哉! ~哀哉 哀哉라! 숭례문이여!! 남대문이여!!!



결국 이우왕자는 방사능에 피폭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고 호전될 것 같았는데 요시나리가 정밀 검사를 위해 일본에 요청해 도쿄병원으로 이송함

이송 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서 돌아가셨다. ( 요시나리는 이 일이 자기 책임이다. 하고 할복해서 죽음)










3줄요약

1. 의친왕과 셋째 부인 사이에서 이우왕자의 출생.

2. 농민들의 청원을 위해 일본장군 머리에 총을 겨누고 협박 ( 농민들의 청원 이루어짐. 이외에 다른 업적도 많음)


3. 히로시마에 간 첫 날 아침에 원폭에 피복된 후 운명하셨다.






|||||||||||||||||||||||||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를 아십니까?

조선의 마지막 왕조.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고종황제 아들)의 차남. 이우 왕자.

참 반듯하니 얼굴도 미남이시다. 지금시대에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1912년에 태어나 1945년 생을 마감한 이우 왕자.

그 영화같이 짧은 인생 속의 그의 업적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조선인을 사랑한, 조선인에게 따스했다던 이 분. 


일본군들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작전 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챈 후 보상을 해주지 않아

그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 왕자에게 호소했다고. 





이 호소를 들은 이우 왕자는 그 즉시 사령부로 달려가 공사 취소를 요구. 

이를 들어줄리 없는 일본인. 공사 취소요구를 거절하자 이우 왕자는 

그 일본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고.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

이 위협으로 이우 왕자는 결국 목적을 달성. 



일본은 황제의 자손인 이우 왕자에게 '일본여성'과 결혼할 것을 강요. 

독립운동가인 유동렬의 딸과 정혼한 상태였으나, 황족과 독립투사 가문의 결혼을 일제가 강렬히 반대.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한 이우 왕자는 결국 친일파 대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 


 

대한 제국의 황복으로서 일제의 요주 감시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굽힘이 없었으며,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사용하고, 술자리에서는 당시 금지곡인 '황성옛터' 노래를 불렀다고. 

일제의 장교로 근무한 이우 왕자는 동기인 이형석에게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

조선의 황족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늘 잊지 않고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우 왕자.

직접 비밀 결사대를 조직,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얻어낸 고급정보들을 

독립군들에게 전달해주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줌과 동시에 정신적 지주로 활약.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의 관동군과의 전투계획을 눈치 챈 일본이 

그의 보직을 교육참모로 변경, 일본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게 되고. 

히로시마 전출을 거부하며 한국 배속 청원을 넣고 버텼으나, 청원을 거절당하며 히로시마 행에 오름.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던 1945년 8월 6일. 이 날,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 

이에 부상을 입은 이우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도쿄의 전문병원으로 옮겨저 상태가 호전되어가고 있었는데

옮겨진 그 날밤, 34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 

일각에서는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진실은 밝혀진바 없음. 



당시 이우 왕자를 간호하였던 한 일본인 간호사는 

"그 분은 매우 큰 분이셨다. 아마도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이우 왕자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고, 그의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이우 왕자는 조국의 해방을 죽어서야 맞이하게 되었다.

나의 애국심이 부끄러워 지는 순간. 

지금 내가 발을 디디며 살고 있는 내 나라가 이런 위인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희생과 숭고한 독립정신으로 

일궈졌음을, 역사속에 묻힌 한분 한분을 다 기리지 못함도 죄송한 마음. 

네티즌 사이에서는 '얼짱 왕자'로 통하는 이 분.

얼짱이라는 수식어가 나쁜의미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조선의 마지막 왕자를, 

오래토록 기억될 대한 제국의 왕자에게 얼짱이라는 수식 단어가 참 씁쓸하구나. 

꼭 기억하겠습니다, 곧은 절개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꼭 잊지않겠습니다,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그 정신을.


Source: http://kr.blog.yahoo.com/zootoobo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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