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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임정 수립 90주년 특집 - 의친왕을 망명시켜라!~
 
kbs역사추적 기사입력 :  2012/04/1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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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해 임시정부, 의친왕 망명 계획!~

    - "나는 조선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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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의 숨막히는 추격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려는 의친왕.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조선총독부.

 

의친왕의 망명은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조선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 독립신문, 1919.11.20

 

1919년 11월 11일 중국 안동역.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90년전인 1919년은 일투쟁의 역사에서 뜻 깊은 한 해였습니다.

한일합방 십 년째가 되었던 그 해 3월 1일에 전국에 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러퍼지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4월 13일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일제로써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휩싸이게 되는데요,

그 해 11월엔 일제를 또 한 번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상해임시정부가 고종의 아들이면서 순종의 동생인

의친왕을 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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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가 비밀스럽고 치밀하게 준비하였던 의친왕 망명 사건,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중국 최대의 국경도시인 단동시.

교통과 무역, 그리고 관광의 중심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이곳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 아지트가 있었다.

 

 

 

1919년 11월 임시정부의 비밀아지트 안동교통국은 유난스레 분주하고 술렁이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방문객이 이곳에 주위의 눈을 피해가며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의친왕.

그가 여기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상해 임정으로의 망명은 성공하는 셈이다.

 

독립기념관문서수장고.

1919년에 의친왕 망명 사건은 세상의 이목을 식민지 조선에 집중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중국 신문민국일보에서는 의친왕 망명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한국의 태자 의친왕이 일본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고 공개하기에 이른다.

 

상해 임정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엔 의친왕 관련 기사가 여러 차례 특집 보도된다.

 

'전 황족이 안동현에서 피포'

'의친왕 친서'

'의친왕의 상보'

'의친왕 출경 상보'

'의친왕 상해행 동기'

                                  -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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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 망명하다면 독립운동 진영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임시정부가 의친왕 망명을 계획한 것은 그 파급효과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의친왕의 가치를 주목했던 것은

조선 왕조는 결코 한일합방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던 것이고,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가장 큰 선전 효과를 기대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 신복룡 교수,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그런데 임정이 조선 왕족 중에서 다른 이가 아닌, 의친왕 이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의친왕은 고종의 둘째 아들이면서 순종 황제의 동생이다.

일제에 의해 황태자에 봉해지고 일본으로 끌려간 영친왕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많았다.

 

그는 대한제국의 특사 자격으로 유럽을 방문했고

5년 동안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서 누구보다 국제 정세에 민감했다.

 

 

 

조선 왕족을 대표하는 인물 중에서 유달리 독립의지가 강했던 의친왕.

 

1919년 3.1만세운동에 이어서 11월 추진되었던 제2차 독립만세운동,

그 선언서에 의친왕 이강의 이름이 보인다.

 

1921년 8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5대 열강 회의,

조선의 독립을 촉구한 건의서에서도 황족 대표 이강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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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한일합방후 의친왕보다 낮은 지위인 이강공으로 끌어내리고 마는데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게 보낸 문서를 보면

독립운동의 무리가 의친왕 이강을 꾀여 상해로 탈출시키려는 풍설이 있어 엄중히 경계하는 정황을 살필 수 있다.

 

의친왕 이강!

임시정부가 그의 망명을 추진한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 열강들이 모여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 도시 상해.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 독립운동의 구심체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이시영.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고

힘있고 일관된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원동력은 바로 3.1독립만세운동이었다.

조국의 광복을 얻고자 전국에서 물밀 듯 일어난 성난 민심의 외침.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

독립을 염원하는 국민과 중국 상해 임시정부를 이어줄 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의 해답이 바로 연통제교통국이었다.

 



 

연통제는 오늘날의 시, 도, 군과 같이 임정이 만든 국내 지방행정조직이다.

함경도와 평안도, 경기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 거의 전국에 걸쳐 있다.

그리고 교통국은 이런 지방을 연락하기 위한 비밀통신기관이었던 것이다.

 

"상해 임정과 국내에 있는 국민을 연결하는 고리가 맺어진 것입니다.

정부가 국민과 떨어지지 않고, 국민들을 기반으로 하게 되는, 그것이 연통제교통국입니다."

                                                                                       - 한시준 교수, 단국대 역사학과

 

그리고 상해 임정과 국내 연통제와 교통국을 오가던 공작원,

그들을 특파원이라 불렀다.

 



 

국내에 잠입한 함경남도 특파원 이종욱.

그런데 내무총장 안창호는 아주 특별한 비밀 임무를 이종욱에게 지시한다.

 

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게 보낸 총독부의 문서를 보면

이종욱이 의친왕과 김가진, 기타 귀족 명사를 

상해로 도해케 할 임무를 띠고 국내에 잠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문서, 전협 경찰조서에서도 이종욱이 의친왕을 망명시키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종욱의 망명 인사 목록에는 의친왕은 물론이고,

박영효, 김윤식, 이용직, 윤치호, 이상재 등 유명 인사 30여 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작진은 수소문 끝에 임시정부 특파공작원 이종욱의 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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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임무를 부여받은 특파공작원 이종욱. 

그는 국내에 잠입한 목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1919년 이종욱은 국내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 단체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스님으로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던 이종욱을

내무총장 안창호는 임정과 국내를 오갈 특파공작원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종욱이 안창호의 지시를 받고 처음 국내에 잠입할 당시는

국내와 상해를 연결할 조직이 없는 상태였다.

 

"상해와 국내를 연결하는 뭔가가 있어야 했잖아요.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특파원이 필요했지요.

선친과 같은 경우는 안창호 선생님이 연통제를 조직하라는 그런 임무를 주신 것이죠."

                                                                                                  - 이재창, 이종욱 아들

 

그런데 이곳에서 의친왕 망명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강원도 주문진에 있는 한 사찰 동명사.  

이곳은 스님 이종욱이 말년에 머물며 수행했던 곳이다.

 



 

제작진은 이곳에 이종욱이 특파원 활동 시절을 기록한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종욱이 1965년 6월 28일에 남긴 기록.

이종욱의 친필 문서와 축원문이다.

 

초고본에는 안창호가 국내 연통제를 실시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또 다른 문서를 보면 이종욱이 두 차례 국내에 들어온 사실과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이종욱이 노년에 쓴 글이라 글씨가 흔들리고 내용을 알아보기 힘든 부분도 종종 눈에 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입국한 시기를 1919년 10월경으로 남기고 있다.

두 번째 입국의 목적은 의친왕을 상해까지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2.  의친왕 망명 작전 진행!~

                             이종욱, 전협, 나창헌...그들은 누구인가?

 

 

"상해 임시정부는 의친왕을 망명시키기 위해서

중국 단둥의 비밀루트를 통해서 특파공작원인 이종욱을 국내로 잠입시키게 됩니다. 

 

3.1운동 이후 삼엄해진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임시정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의친왕을 망명시키려고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927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상해 임시정부가 의친왕의 망명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내외 이목을 놀라게 하는 동시에 자금모집에도 일조의 힘을 얻고자'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조선 왕족을 대표하는 의친왕이 상해 임정에 합류한다면

세계에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알리고,

상해 임시정부로 독립운동세력이 결집하는 한편,

국내외에서도 군자금을 모으는 데 유리한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의친왕을 상해까지 탈출시킬 수 있을까요?"

 

동아일보를 보면

이강공 전하를 상해로 망명 시킬 계획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온 상해 대표 이종욱이

전협 일파 대동단에게 거사를 맡긴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전협, 가 도대체 누구길래 그를 믿고 의친왕 망명 계획을 맡긴 것일까?

이종욱은 의친왕 망명의 계획을 전협과 모의하기 시작한다.

 

조선민족대동단은 어떤 단체일까?

 

 

 

김가진이 총재,

전협이 단장,

최익환이 출판을 맡은 대동단

3.1운동 이후 만들어진 비밀결사조직이다. 

 

대동단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

수많은 단체로 나눠져 있는 단체를 모으길 원했다.

 

임시정부 내무총재 안창호와 김가진 사이를 이종욱이 오간 끝에 의친왕 망명 사건은 완성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과연 의친왕을 망명시킬 수 있을까?

 



 

1919년 11월 9일로 거사일은 정해졌다.



1910년대 의친왕의 자택인 사동궁.

 

그날 저녁 의친왕은 사동궁을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는 전협과 비밀리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늘 고등계 형사 미와경부가 따르고 있었다.

미와경부는 의친왕을 뒤쫓았지만 의친왕은 그를 따돌릴 수 있었다.

 

총독부의 문서를 보면

밤이 깊어 의친왕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보고 추적했지만 실패했다고 되어 있다. 

 

의친왕전협이 만나기로 한 비밀 가옥.

약속 시간이 되자 광평동 비밀 가옥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날밤 미와경부를 따돌린 의친왕이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탈출 계획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전협은 의친왕과 만나기 위해

조선총독부 직원 정운복을 통해 만나기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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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인 정운복은

전협에게 속아 의친왕 망명 계획에 끼자 내심 당황한 상태였다.

 

정운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의친왕 망명 계획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황.

하늘이 도운 끝에 만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 때 정운복이 찬성하는 것처럼 말했다.

"전하, 말씀하시옵소서!~"

 

전협 왈,

"상해 독립정부에서 전하를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오늘 그 시기가 도래하여 전하께 왔음으로 결심이 서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의친왕은 그 자리에서 상해 망명을 결심한다.

의친왕이 결심하자 한순간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당시 전협 검찰조서 기록을 보면

전협이 의친왕에게 상해 망명을 권하자

의친왕도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고 한다.

 

얼굴이 알려진 의친왕이 언제 일경에게 발칵될 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는 변장을 하기 시작했다.

 

"듬성듬성한 누런 수염을 위아래 턱에 붙이고

헙수록한 양복에 중절모자를 눌러써서

얼른 보기에 시골 면서기 모양을 꾸민..."

                                                              동아일보. 1927. 7. 19

 

1919년 11월 10일.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상해로 망명하는 첫발을 그렇게 내딛기 시작했다.

언제 변심할 지 모르는 정운복에게 재갈이 물려졌다.



 

우선 첫 번째 비밀 가옥에서 두 번째 비밀 가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현장에 육혈포를 들고 의친왕을 호위하는 스물네 살의 청년이 있었다.

 

전협을 도와 의친왕 망명 사건에 깊숙히 개입했던 나창헌.

제작진은 다행히 나창헌의 아들을 만나 의친왕 망명하던 날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대동단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임시정부 의정원 회원이 되신 분은 아버지 한사람밖에 없어요.

 

그 때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정운복이니

이강공하고 전협 선생이 만날 때 성사가 안 되면 묶어서 죽일려고 구덩이까지 파두었습니다."

 



 

나창헌은 의친왕 망명 사건후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내무차장 겸 경무국장으로도 활약했던 나창헌.

 

 

나창헌과 전협 선생 및 동지들은 정운복으로 인해 계획이 탄로날까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의친왕 망명 사건을 기록해둔 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창헌의 부인 김희숙이 나중에 남편의 증언을 문서로 남긴 내용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망명 진행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힘센 장사 한 명을 충청도에서 데려와 10일 동안 훈련 시킨 다음 이강공씨를 궁에서 모셔나왔음' 

'나창헌은 인력거꾼이 지나갈 때 사정을 해서 인력거꾼의 옷을 빌려입은 후'

 

이렇게 의친왕 망명 계획 실행 내내 위기일발의 상황이 계속 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밤새 의친왕이 사라진 사실을 보고받고

신의주 안동현 부산 등지에 지급 전보를 발송하는 한편 형사들이 총출동시켰다.

 

그 시간, 의친왕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비밀 가옥 공평동에 도착해 있었다.

 

의친왕의 연락을 받고 수인당 김흥인이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그 안엔 비밀 서류와 함께 고종 황제께서 남긴 150만원의 채권이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의친왕은 기차를 타고 상해로 망명하기 위해 수색역에 도착했다.

집을 나선 지 만 하루가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사동궁 집을 나와 공평동 비밀 가옥에서 접선,

적선동, 청운동, 세검정, 고양군 비밀 가옥에서 수색역에 이르기까지 다행히 일본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이제 의친왕은 왕족이 아닌 평민 이강이 되어 고국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무사히 상해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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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친왕 망명 계획 한 달 전,

                   왕족 김가진 부자의 상해 망명 성공!~ 

 

 

"임시정부의 의친왕 망명 작전은 여러 단계에 걸쳐서 치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먼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안창호에게서 의친왕 망명 계획의 비밀 지령을 받고

특파공작원 이종욱이 국내로 잠입한 시기는 1919년 9월이었습니다.



 

이종욱은 의친왕과 접촉하기 위해 온갖 루트를 찾다가

마침내 전협을 만나서 보다 구체적인 탈출 계획을 모의하게 됩니다.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로부터 시작해서
특파공작원 이종욱, 전협, 의친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 단계를 거쳐서 망명 작전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의친왕의 망명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바로 한 달전 다른 망명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의친왕 망명 사건이 벌어지기 한 달 전
귀족 김가진이 아들과 함께 상해로 탈출한 사건을 알 수 있었다.
김가진이 상해로 망명하자 일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대체 김가진은 누구일까?
그리고 왜 임시정부에 합류했을까?
 
동농 김가진은
한말 중추원 의장, 농공부 대신과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대한제국 최고의 대신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그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대동단 총재를 맡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그 때 임시정부 이종욱은
김가진을 만나 망명 의사를 확인한다.
 
김가진은 이미 안창호에게 상해로 망명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상태였다.
 
이종욱의 친필 문서를 보면
자신이 김가진과 그 아들을 상해까지 안내했다고 밝히고 있다.
 
내무총장 안창호는 특파공작원 이종욱에게 김가진 망명 공작을 지시했고
그는 김가진을 만난 것이다.
 
김가진은 당대의 명필로도 소문난 인물.
조선의 귀족을 대표하는 그가 상해로 망명한다면 그 자체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의친왕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나라가 망한 후에 의친왕과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나라 걱정을 하였고 친분이 있었지요.
의친왕의 아들이 많죠. 어떤 아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의친왕 아들하고 작은 고모하고 약혼까지 했대요." 
                                                                                                                  - 김자동, 김가진 손자
 
조선의 왕족과 귀족이 함께 망명하는 일엔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가진은 의친왕보다 먼저 길을 떠났다.
 
일산역.
90년전 이곳에서 이른 넷의 노구를 이끌고 상해로 떠난 것이다.
 
"그 때 시월인데 날씨가 추운 편이 아니었는데
키가 큰 편인 할아버지께서는 남의 눈에 띌까 겨울에 쓰는 귀마개까지 하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일산역에서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이 만난 사람은 이종욱.
이로부터 멀고 먼 망명길에 오른다.
 
독립신문엔 상해로 떠나는 김가진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졌다는 말을 듣고
내 나라 정부가 있는 땅에서 죽겠노라는 비정한 마음을 품었다."
                                                                                              - 독립신문, 1919. 11. 4
 
김가진 부자는 일산역에서 평양을 지나 신의주 너머 안동역에 도착하게 된다.
옛 지명 안동은 이름이 바뀌어 현재 단동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 단둥씨.
안동에 도착해 김가진이 도착한 곳은 이륭양행이었다.
 


 
 
김가진의 며느리인 정정화의 글을 보면
'시아버지가 이륭양행에서 대리하는 계림호 편으로 상해에 도착했다'고 되어있다.
 
백범일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국인이 운영하는 이륭양행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비밀아지트인 이륭양행.
이곳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곳은 안동 구시가지에 있어서
일제의 신시가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지 엘 쇼우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이 운영하는 이륭양행
임시정부의 비밀아지트가 있었다.
 
그곳은 안동 교통사무국으로 불리었는데  
이곳은 상해와 국내를 오가는 독립인사들의 은신처였다.
 
무기는 이곳을 통해 국내로 들어갔고
군자금은 이곳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되었다.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서 정보전달이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것은 조지 엘 쇼우에 의해 가능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우는 아일랜드 조국을 가진 그에게  
일제의 탄압과 한국의 독립운동은 자신의 일처럼 다가왔다.
 
조선총독부 문서를 보면,
 
쇼우
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많은 한국인 친구들이 독립에 대해 상의를 받았을 때는
적당한 조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륭양행에서 운행하는 선박을 통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안전하게 왕래케 하거나 
또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각종 신문, 자료 , 지령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수집한 정보까지 
전부 이륭양행을 운영하는 쇼우를 통해 가능했다고 봅니다."
                                                                              - 한철호 교수,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김가진은 이륭양행이 있는 교통국에 머물다 또 다시 길을 떠난다.
이륭양행에서 멀지 않은 압록강에서 계림호를 타고 또 다시 먼 뱃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다.
김가진은 서울을 떠난 지 20여 일만에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하게 된다.
 
중국 안동역까지 기차로 달려 다시 배를 통해 상해 황포강까지 도달하는 이 루트는
김가진은 물론이고 의친왕에게도 중요한 루트였다.
 
김가진은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하자 크게 환영을 받았고
임시정부의 고문에 추대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전직 대신으로서, 대한제국 말기를 살아간 가장 거물급 정치인으로서
최초로 항일 투쟁에 몸을 던지고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주장했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만큼 일제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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