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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면 산다' 믿었기에 … 백성들이 쌀 들고 모였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상> 신뢰·실력의 리더십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4/08/1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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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면 산다' 믿었기에 … 백성들이 쌀 들고 모였다

[중앙일보] 입력 2014.08.11 01:20 / 수정 2014.08.11 09:20

[왜 지금 이순신인가] <상> 신뢰·실력의 리더십
상관 인사 청탁 거절했다가 파직 출장 갈 때 받은 쌀 남으면 꼭 반납
병법·전략·전술 '장군의 역량' 갖춰 도망갔던 군사들 자발적으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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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7월 30일 개봉, 감독 김한민)이 10일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중앙일보 8월 11자 22면> 개봉 12일 만으로 역대 최단기간 기록이다. 영화와 함께 ‘이순신 열풍’이 일고 있다. 세월호 비극 등 잇따른 사건·사고와 지도층의 통솔력 부재로 한국사회에 위기의식이 높아진 가운데 충무공의 리더십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지용희 세종대 석좌교수와 함께 이순신 리더십의 요체를 3회에 걸쳐 알아본다.

1579년(선조 12년)의 일이다. 이순신이 훈련원 봉사(종8품)로 근무하며 군의 인사행정을 담당할 때 그의 상사인 병조정랑(정5품) 서익(1542~1587)이 청탁을 했다. 자신의 친지를 참군(정7품)으로 승진시켜 달라고 한 것이다. 이순신은 “서열을 건너뛰어 진급시키면 당연히 진급해야 할 사람이 진급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불공평한 인사 조치는 법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서류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서익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1582년 1월 관직을 잃었다. 이순신은 정직하고 원칙에 충실했다. 그는 출장 갈 때 지급받은 쌀에서 남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도로 가져와 반납했다. 발포 만호로 있을 때는 상관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청의 오동나무를 베려 하자 이를 단호하게 저지했다. 올곧은 성품 탓에 윗사람에게 미움을 샀으나 부하들은 이순신을 진심으로 신뢰했다.

 이순신은 그 존재만으로도 백성의 구심점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피란민은 전쟁터인 명량까지 이순신을 따라갔다. 보통 피란민들은 전쟁터에서 멀리 도망가게 마련인데 반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순신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신들을 잘 보살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1597년 이순신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백의종군하는 사이 우리 수군은 일본에 참패해 거의 없어질 처지였다. 이후 다급해진 선조는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고 후회한다는 내용의 교지(敎旨)를 내리며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빈손으로 수군을 재건해 기세등등하게 침투해 오는 대규모의 일본 수군을 막으라는 것이다. 이순신은 병력·배·무기·군량 등에서 역사상 가장 초라한 해군사령관이 된 셈이다.

 이 ‘초라한 해군사령관’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군사를 모았다. 이순신이 나타나자 도망갔던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9명의 군관밖에 없었으나 이순신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군사가 늘어났다.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 돌격장으로 맹활약하던 이기남도 “앞으로 어떤 구덩이에 쓰러져 죽을지 모르겠다”고 한탄했지만 이순신을 따라나섰다. 의병도 늘었다. 이순신은 승려 혜희에게 의병장 임명장을 주기도 했다.

 백성의 호응도 뜨거웠다. 이순신은 “관리와 백성이 눈물을 흘리며 인사했다. (중략)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제로 권하였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피란민들은 명량까지 따라왔다. 다음은 이순신의 유고전집 『이충무공전서』 권9에 나타난 기록이다. “이순신은 몇 백 척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란선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피란민들에게 물었다. ‘큰 적들이 바다를 뒤덮는데 너희들은 어쩌자고 여기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저희들은 다만 대감님만 바라보고 여기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측 전선은 한 척도 침몰하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자 이순신을 따르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더욱더 깊어졌다. 피란민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식량과 옷을 갖고 와서 우리 수군을 도왔다. 현지 주민들도 군량 등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이순신과 함께 싸웠다. 군민이 하나가 됐기에 이순신은 기적과 같은 명량대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전사했다. 이에 대한 좌의정 한음 이덕형(1561~1613)이 임금 선조에게 보낸 보고서의 일부분이다. “노량해전의 승전 보고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무지한 노약자들마저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피란민들이 명량해전이 벌어진 최전선까지 이순신을 따라온 것과는 반대로 임금인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갔을 때 부하들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리더가 되려면 남들이 신뢰하고 따라줘야 한다. 이순신이 주위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공정하고 원칙에 충실한 몸가짐 때문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장군으로서 필요한 핵심역량(core competence)도 골고루 갖추고 있어 실력 면에서도 신뢰를 받았다. 이순신은 활 쏘기 연습에 매진해 명궁이 됐으며 꾸준한 학습과 연구로 병법·전략·전술·행정에 통달했기에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피란민들이 이순신을 전쟁터까지 따라간 이유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신뢰라는 재산, 즉 신뢰재를 쌓아나가야 한다. 인격적으로 신뢰를 받아야 함은 물론 자기가 하는 분야에서 꼭 필요한 핵심역량을 쌓아 나가야 한다. 지금과 같은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경쟁자가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기술, 경영·조직·마케팅·디자인 능력과 같은 지식 재산에서 핵심역량이 창출된다. 따라서 물적 자원이 부족하더라도 구성원의 신뢰를 얻는 동시에 핵심역량을 갖춘 리더가 있다면 이순신의 명량대첩과 같은 기적도 가능하다.

지용희 세종대 석좌교수

◆ 지용희(71)=세종대 석좌교수. 이순신리더십연구회 이사장. 한국경영연구원 이사장. 서울대 상대 졸업. 미워싱턴주립대 경영학 박사. 서강대 경영대학장·한국국제경영학회장·공정거래위원 등 역임. 저서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중소기업론』등.

[사진 CJ E&M, 영화 '명량' 공식 SNS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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