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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장진호전투 (1부)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장진호전투 (2부)
 
다음블로그 기사입력 :  2014/09/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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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장진호전투 (1부)
 
Uesgi 2014.06.21 15:19

이번 이야기는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던 장진호 포위망 돌파이야기입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맥아더 등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모두 결과론이어서 그냥 객관적인 이야기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진호 전투의 황초령 협곡Funchilin Pass 사건


1950년 12월 7일, 북한 산맥오지의 뼈저리게 추운 날이 밝았다. 고토리 평원 함정에 빠진 14,000명의 UN군은 지옥과 같은 10일을 견디고 있었다. 11월 26일,  중공군 제9 집단군Army Group은 장진호(일본어 초신)의 산악로 몇 km에 걸쳐서 길게 늘어선 미 제1 해병사단의 2개연대, 미 육군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과 혼성부대를 강습했다. 



 
고해상도의 그림을 못 구하겠군요. 제가 가진 자료에는 2페이지에 걸쳐 큰 그림으로 소개되어서 병사들의 지친 얼굴표정까지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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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동쪽의 중공군은 이미 육군 31연대를 궤멸시켰고 생존자는 흥남항구까지 살기 위해 달려야했다., 이제 중공군은 해병을 포위했다. 


10일 동안 끊임없이 달려드는 중공군과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추위를 견딘 1해병사단은 탈출준비를 마쳤다. 그렇지만 황초령 협곡을 잇는 다리가 날아가버려 북한에서 발이 묶일 위험에 처했다. 콘크리트 다리가 약 9m 정도 끊어져 해병은 부상자, 전사자와 차량을 모두 뒤에 남겨두고 사격을 받아가며 포위망을 돌파해야 할 판이었다. 
끊어진 다리를 연결해야 하는데 해병은 고토리에 가교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공군에게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철판투하를 급히 요청했다. 다리를 연결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것이라도 있어야 했다. 



 

장진호의 물을 보내는 대형 송수관이 있는 지역의 다리가 끊겨있습니다. 건너편의 산악지형을 보면 장진호 전투의 악전고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돌파하는 연합군뿐만 아니라 빈약한 보급에 공습까지 받아야 했던 중공군도 큰 피해(최소 37,000명의 전상자)를 입었습니다. 


12월 7일 오전 9시, 8대의 C-119 플라잉 박스카가 고토리 상공에 나타났다. 각각 1톤이 넘는 가교장비를 싣고 있었다. 해병은 4개만 필요했지만 제대로 회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2배인 8개를 요청했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에 배치된 대형 수송기로 4.5톤의 수하물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비행기도 수송했군요.



수송기가 저공비행을 시작하자 중공군은 대공사격을 퍼부었지만 승무원이 귀중한 수하물을 조심스럽게 투하하기 시작했다. 흥암 부근 연포공항에서의 시험투하에 실패해서 가교장비 하나에 2중으로 G-5 낙하산을 달았다. 이번마저 실패하더라도 해병 1사단에게 다시 투하할 시간여유가 없었다. 


(느닷없이 배경 설명으로 전환하는군요. 제가 그래서 Military Heritage를 안 좋아합니다.)


11월 말, 중공군의 기습을 받은 UN군은 북한에서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세좋게 UN군을 부산 부근까지 몰아넣었던 북한군은 더들러스 맥아더의 화려한 인천상륙작전으로 배후가 끊겼고 북한군은 포위망을 풀고 중국국경까지 달아났다. UN군이 중국국경 근처까지 진격하자,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친미국가와 국경을 맞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중공군 전차부대의 모습입니다. 중공군이 극소수의 JS-2 중전차를 투입했다는 설도 있고 사진 2장도 있지만 한국전쟁이라는 확증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JS-2가 한국전쟁에서 사용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북한 서쪽편의 미 8군은 38선을 향해 후퇴하고 있었고 동쪽에 있던 10군단, 그 중에서도 제1 해병사단은 위험한 상황까지 몰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압록강을 건너 몰래 배후에 침투했던 중공군의 강습으로, 이 지역의 UN군은 해안까지 온전히 후퇴한 후에 흥남항구를 통해 남한으로 빠져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중공군 제9 집단군은 해병 1사단을 섬멸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불가능한 임무는 절대로 아니었다. 미해병과 혼성부대, 약 20,000명은 산악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진 상태였다. 중공군 9개 사단이 6:1의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것도 기습을 했으니 임무를 문제없이 완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해병은 중공군에게 없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은 중공군에 비해 훨씬 무장이 잘 되어 있었고 제공권은 완전히 UN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중공군 포로를 잡은 미군이 멀리 후방을 폭격하는 아군 비행기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1950년 10월, 1사단은 원산항에 내렸고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에게서 흥남을 거쳐 산맥 깊숙히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최종 목표는 압록강 국경이었다. 1사단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알몬드의 명령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군단과 도쿄 총사령부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에, 전투경험이 많았던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고 있었다. 



 
맥아더 오른쪽의 깡마른 체구가 스미스 소장입니다. 그는 10군단장 알몬드 중장과 불화가 상당했는데, 장진호 전투에서는 그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았습니다. 그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해병 1사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그는 해병대 대장으로 전역했습니다. 다른 지휘관과 달리 각반까지 찬 그의 모습을 보면, 그럴만도 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8
군과 10군단 전선에서 지난 10월부터 소규모 중공군 지원병을 자주 만나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 두 군대 사이에는 120km나 되는 간격이 있었고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침투하기 충분한 공백이었다. 


11월 말에 함정이 드러나면서 스미스의 사단은 끔찍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몬드는 산악지대로 최대한 빠르게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스미스는 연대장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반대명령을 내렸다. 그 덕분에 중공군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에, 각 연대는 소규모 단위가 아닌 연대단위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제1, 제5와 제7 연대가 산개해 있었고 1,500대의 차량이 단 하나의 산악도로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해병은 유담리부터 하갈우리, 다시 고토리까지 후퇴하는 내내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아래는 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이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밀려나는 전황을 설명하는 지도입니다. 결국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됩니다. 중공군 참전정보가 속속들어오는데도 이미 북한에 있던 중공군이라고 오판했고 병력규모도 겨우 3만 5천 명으로 과소평가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도 간단하게 설명하는 8군과 10군단의 압록강 단거리 경주가 벌어졌고, UN군은 중공군 4개군 500,000명 이상의 병력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중공군은 미국과의 공식적인 교전을 피하기 위해 중화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흔한 오해처럼 무장이나 훈련이 안된 비숙련병이 아니라 중국내전을 겪은 정예병을 투입했습니다. 그렇지만 산악지대를 통해 이동했기 때문에 추위에 더 큰 고생을 했고 병참선이 워낙 늘어져서 아사직전까지 몰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12월 첫 주말이 되자, 사단 전체병력과 잡다한 UN군은 고토리에 집결해 마지막 탈출준비를 했다. 스미스는 고토리에서 진흥리까지의 16km가 마지막 고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구간은 협곡을 지나는 좁은 경사로로 양쪽의 절벽에는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이 황초령 협록의 다리를 파괴하면서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다. 스미스는 "산 옆은 너무 가파랐기 때문에 우회할 방법이 없었다. 온전한 다리가 관건이었는데, 다리가 없었다면 차량, 전차와 포 어느 것도 가져올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진호에서 물이 내려오는 4개의 콘크리트 송수관 그리고 바로 옆에 끊겨진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리는 12월 1일과 12월 4일에 폭파된 것을 공병이 수리했었는데 3번째로 다시 끊겼다. 3번째 파괴로 10일 동안 악전고투를 한 14,000명의 병력이 고토리에 발이 묶여버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중공군보다 훨씬 무서운 적을 만나야했다. 바로 무시무시한 시베리아 바람이 쓸고 내려오는 북한의 겨울이었다. 2차대전 당시의 벌지전투는 순해보일 정도로 비교가 안되는 맹추위였다. 계곡의 온도는 영하 30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해병사단의 장진호에서 흥남까지의 철수 다큐멘터리입니다. 한글번역 자막보다는 영어자막으로 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bSPG1k9tss&feature=player_embed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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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장진호전투 (2부)
 
Uesgi 2014.06.22 14:14
 
 



북한이 무려 유효범위 1km 이상의 EMP탄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북한이 EMP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무려 1km라... 할 말은 많지만 몇 년 후로 미루겠습니다. 
북한의 귀신같은 잠수함전력도 정말 많은 곳에서 시비가 붙었었는데, 얼마 전에 김정은이 탄 로미오급 잠수함 실체가 공개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죠? 

스웨덴평화연구소가 북한이 핵탄두 5~6개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핵탄두를 그만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사실확인은 안된다고 공개했는데 국내에는 '북한 핵탄두 5~6개 보유'라고 대단하게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말만 하겠습니다. 도대체 북한은 못하는 것이 뭘까요?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만 해도 국방예산 대부분이 투입될판에 폭풍호와 천마호 전차는 최신식 사격통제장치까지 갖춰 수 백 대씩 개수했다고 주장합니다(전문가랍시고 이런 주장하시는 분... 제발 개수비용 간단하게라도 계산해보세요. 제발 좀.) 그리고 EMP탄까지 보유하고 있습니다. 천연장애물이 가득한 서해 앞바다도 누빌 수 있는 첨단 잠수함까지 자체 생산한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텔스 도료까지 개발했다고 하죠? 무인기에 핵과 생화학탄 장착한다고 했죠? 북한 해커는 미국방성까지 마구 뒤진다고 하죠? 


정신력도 세계최고인데다가 심지어 미국과 러시아도 하기 힘든 하이테크까지 세계최고입니다. 도대체 못하는 것이 뭘까요??? 
우리는 세계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무기를 수입하면서도 이렇게 못할까요? 세계 최고수준의 IT기술을 자랑하는데도 EMP탄 하나 개발하지 못할까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장진호 전투의 황초령 협곡Funchilin Pass 사건(2부)


해병과 육군공병의 대단한 활약덕분에 얼어붙은 땅위에 활주로가 만들어졌고 심각한 동상과 중상자를 후송했다. 그렇지만 많은 해병은 동상으로 손발이 까맣게 변하고 있는데도 치료나 후송을 거절하고 주보급로를 따라 남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걸을 수 없는 부상자만 지프와 트럭에 탔고 나머지는 모두 걸었다. 

유담리에서 항구까지의 거리는 약 130km였다. 전세계는 제1 해병사단의 악전고투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1사단의 전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직 해병대만이 탈출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제 이야기는 장진호 전투 후반의 포위망 탈출부분입니다. 장진호 전투에 대해서는 위 지도로 대신합니다. 초신은 일본발음인데 당시 지도 등의 자료가 모두 초신이어서 지금조차도 초신호 전투로 알려져있습니다. 클릭하면 커지니까 큰 그림으로 잘 확인하세요. 



 


12월 5일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공군 전투수송단은 하갈우리의 활주로를 이용해서 사단 전체를 소개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할 경우 병사들은 소화기만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수송기를 타게 될 후미병력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탈출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스미스 소장은 장진호까지 함께 올라갔으면 내려갈 때에도 함께 내려가야 한다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수만 명의 중공군이 노리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수송기가 부상병을 싣고 날아가는 동시에 하갈우리에 보충병을 싣고 도착했다. 





장진호 전투의 전사자를 한 곳에 모아두었습니다. 


스미스 소장의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고토리에 모든 병력을 모은 후에 도로 양쪽의 고지대에 대대병력을 투입해 중공군을 밀어내고 도로병력과 함께 남진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제1 해병연대가 후미에 남아 모든 병력이 고토리를 빠져나갈 때까지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로 했다. 
고토리 남쪽 16km 지점 진흥리에 있던 제1 대대는 1081고지를 점령하기로 했다. 이 고지를 점령해서 주변을 제압해야 전투공병이 다리를 다시 놓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공군과 포병의 지속적인 근접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화력지원없이는 양쪽 고지대를 공격하는 병력이 훨씬 많은 적을 밀어낼 수 없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제1 해병공군단Marine Air Wing이 24대의 공격기를 띄워두고 바로 화력지원을 해주었다. 





제1 해병항공단의 구성과 주력기입니다. 나중에는 F86 세이버 등으로 교체되었습니다. 겨울이라 산위가 황량한데다가 F4U가 무시무시한 네이팜탄을 쏟아부으니 중공군이 버틸 수가 없죠. 물론 장진호 전투에서도 오폭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전 영화 햄버거 힐을 보면 오폭이 얼마나 황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밤에는 특수장비를 갖춘 야간전투기가 부족하나마 화력지원을 해주었다. 동해와 남한에서 출격한 미공군기도 지상의 아군을 지원하고 중공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그렇지만 기상이 악하된데다가 서부전선에서 무너져내리는 8군도 동시에 지원해야했다. 


항공지원덕분에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지상병력은 최소한 탄약걱정은 없었다. 그렇지만 음식은 또 다른 문제였다. C레이션과 K레이션은 모두 완전히 얼어붙어서 녹이기 정말 힘들었다. 길옆에서 불을 피웠다가는 중공군의 목표물이 될 수 있었고 밤에는 아예 담배불도 허용되지 않았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를 거쳐 고토리까지 이동하면서 병사들의 체력은 극심하게 떨어졌다. 한 번은 공중보급이 콘돔박스를 떨구고 갔고 한 해병은 이렇게 비웃었다. "도대체 우리가 중국애들하고 무슨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중공군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점령한 고지는 끊임없이 공중폭격을 받았고 2주동안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장진호에서 고토리까지 후퇴하는 해병대를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병대의 대열을 따라가며 전투를 벌이다보니 이제는 자신들도 병력이 산개되어버렸다. 서로 협력이 안되었기 때문에 해병대의 대열 중간을 공격해서 끊으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연합군을 괴롭히는 지독한 추위는 마찬가지로 중공군도 괴롭혔다. 그들도 극심한 추위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고 보급로는 완전히 끊어졌다. 결국 굶주림, 추위와 탄약부족으로 많은 중공군부대가 자멸했다. 심지어 투항하는 중공군 중에는 손과 소총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병사도 있었다. 무기를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손가락을 부러트려야 했다. 고지대를 공격하던 병력은 개인참호에서 얼어죽은 중공군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제 다리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도 고토리에는 육군공병대가 있었고 가교를 설치하는 6톤짜리 대형트럭 2대가 있었다. 만약 트럭이 없었다면 투하된 가교장비를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12월 7일, C-119 수송기에서 투하된 8개 중에서 6개를 온전하게 회수했다. 7번째 것은 부숴지기는 했어도 쓸만했고 8번째 것은 중공군 진영으로 떨어졌는데, 투하시점이 맞지 않아서 아군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중공군 진영에 떨군 것이었다. 
오후에 모든 장비를 모아서 황초령 협곡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이튿날 고지 1081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날씨는 그 어느 때보다 안좋았다. 영하 14도의 기온에 눈보라가 몰아쳐서 시계는 20m도 안되었고 공중지원은 아예 불가능했다. 
1대대는 악천후를 틈타 중공군이 지키고 있는 고지 1081로 기어올라갔다. 중공군을 기습한 1대대는 13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성공적으로 중공군을 고지에서 몰아내고 밤사이의 반격도 견뎌냈다. 


반면에 고토리부터 도로양쪽의 고지대를 공격하는 계획은 생각보다 많이 지연되었다. 동상자가 워낙 많아서 공격병력이 부족했고 서로 공조가 안되었다. 특히 3대대의 경우에는 3개 중대 중에서 겨우 130명만 투입할 수 있었다. 2대대가 추가로 투입되었지만 악천후때문에 12월 8일 밤이 되어도 고지대를 청소하지 못했고 가교장비를 실은 트럭은 고토리 방향으로 다시 후퇴해서 이튿날을 기다려야 했다. 


12월 9일, 2대의 브록웨이Brockway 트럭이 가교장비를 싣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날씨도 좋아졌고 주변의 중공군도 청소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 끊어진 폭과 너비가 며칠 전의 측정과 달랐다. 그 동안 중공군의 공격으로 좀 더 파괴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근처에서 일본이 철수하기 전에 쌓아둔 커다란 통나무들을 발견했고 통나무를 아래로 던져 쌓은 후에 가교장비를 올려 다리를 연결하기로 했다. 
중공군 포로가 통나무를 운반하는 동안 공병이 가교장비를 연결하고 옮겼다.
 





M-2 가교와 6톤짜리 브록웨이 가교트럭입니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가교장비가 연결되었고 전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찍한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불도저가 길 위에 놓인 철제 다리잔해를 옆으로 밀어냈다. 이제 진흥리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런데 문제가 다시 생겼다. 새로 만드는 다리는 50톤의 무게까지 견딜 수 있었지만 M2 중앙의 10cm 두께의 합판부분은 20톤까지만 버틸 수 있었다. 트랙터가 지나다가 중간에서 주저 앉아버렸다. 트랙터를 다뤄봤던 해병이 운전석에 앉아 다리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전차도 중앙의 합판부분이 아니라 양 옆의 철제연결부분을 지나게 했다. 

한 시간에 3km 정도였던 이동속도는 더욱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어두워지자 공병이 든 플래시빛에만 의존해서 낭떠러지 길을 위험스럽게 건너갔다. 양쪽 고지대를 청소했다고 해도 장거리 저격이 가능한데다가 전조등은 박격포탄을 부르는 신호였다.


12월 10일 새벽 2시 45분, 첫 번째 해병부대가 진흥리에 도착했다. 흥남까지 아직도 60km 정도가 남았지만 그래도 중공군의 포위망은 벗어난 곳이었다. 
정오가 되자 고토리는 완전히 비워졌다. 후위는 정찰중대와 전차가 섰고 그 뒤를 수 백 미터에 걸쳐 한국인 피난민이 따라 나섰다. 해병대열은 수송대와 함께 앞뒤로 400m 거리를 두고 고토리를 빠져나왔다. 이렇게 넓은 간격을 두면 소규모 중공군이 대열 중간을 끊을 위험도 있지만 대규모 기습을 받아 모든 수송대를 한꺼번에 잃을 위험도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양쪽 고지대를 따라 보병 중대가 도로를 엄호하며 함께 후퇴했다. 
진흥리까지 오는 길에, 수백 명의 중공군 포로를 잡았는데 일부는 동상으로 이미 팔다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고지대의 중대는 포로를 산 아래로 호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고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1사단 병력이 새로 놓인 다리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12월 10일 한 밤 중에 진흥리 남쪽을 가로막은 중공군과 교전이 벌어졌지만 큰 위험없이 중공군의 봉쇄를 밀어내고 흥남으로 계속 남하했다. 황초령 협곡에 힘들게 놓은 다리는 12월 11일 오후에 파괴했다. 
해병대는 고토리에서 진흥리 그리고 흥남까지 철수하면서 전사 75명, 행불 16명, 부상 256명의 손실을 입었다. 흥남에서는 다른 UN군과 함께 철수했다. 중공군은 그동안 워낙 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추격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고 미군은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흥남항을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장진호 전투가 참패라고 하더니 큰 피해가 아니네? 하는 분들이 있을텐데, 이 피해는 장진호에서 빠져나온 다음 흥남항까지 후퇴하는 과정의 피해입니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약 18,000명의 병력 중에 8,000명 정도의 전사나 부상-동상자 제외-을 당했으니까 궤멸에 가까운 피해입니다. 그것도 최정예 해병 1시단의 피해입니다.)


제1 해병사단의 극적인 탈출은 전세계에 보도되었는데 타임지는 미전사상 유례가 없는 전투라고 표현했다. 바탕Battan, 안지오Anzio, 덩케르크Dunkirk, 밸리 포지Valley Forge, 1만 명의 후퇴(기원전 400년)의 특징을 모두 가진 전투라는 뜻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언론은 해병대가 황초령 협곡을 통과하기 전까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중공군 제9 집단군은 전투와 극심한 추위로 절반의 병력을 잃었다. 9집단군은 가장 필요한 시기였던 이후 3개월 동안 전투에 투입되지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제1 해병사단도 7,000명이 전사했고 절반정도를 동상과 질병으로 후송했다. 10군단의 육군은 2,700명을 잃었다. 


제1 해병사단은 전장은 내줬지만 이들 덕분에 한국전쟁의 패전은 피했다고 평가를 받았다. 


아래 사진은 대표적인 흥남철수 사진입니다. 마지막으로 흥남부두를 완전히 파괴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늘 해병 1사단만 거론되는데 실제로는 육군 7사단 병력도 있었죠. 마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300명만 언급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아주 짧게 요약하겠습니다. 


장진호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아래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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